천장지구 - 그 영원한 사랑
놀자는 고향 친구가 가져온 송하주를 함께 마시며 환담을 이어갔다.
송하주란 소나무 뿌리에 달린 커다란 혹 덩어리 -복령이라는 귀한 약재-를 뿌리와 함께 잘라서 술을 잘 빚은 뒤, 항아리를 소나무 아래 구덩이에다 몇 년 고이 묻어두었다가 꺼내 마시는 술인데, 친구는 거기다가 송이버섯까지 듬뿍 넣어서 맛이 유별나게 좋았다.
“캬-! 정말 죽인다. 이렇게 특별한 송하주를 마시고 있으려니까, 꼭 신선이 된 기분이다, 야!”
오랜만에 귀한 술을 맛본 놀자가 거듭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내가 볼 때 넌 이미 신선이야!”
벌써 얼큰해진 친구가 맞장구를 쳤다.
“히히, 이거 또 왜 이래. 내 별명이 ‘옥탑방의 로빈슨 크루소’인 거 몰라?”
“그것 참 재미있는 별명이네. 옛날에는 신선들이 산속에 숨어 살았지만, 요즘 같은 말세에는 너처럼 도시 한가운데 내려와 산다고 하지 않던가?”
“벼락 맞을 소리! 그래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구먼, 히히히!”
“신선이 뭐 별건가? 너처럼 코로나로 인한 이 극심한 불황에도 잃을 게 없어서 무사 태평하고, 아무리 궁색해도 기개만은 하늘을 뚫을 듯 장대하고, 시간만 나면 한가하게 방바닥을 뒹굴면서 동서고금의 현자들과 농담 따먹기나 하고, 설령 코로나에 걸려서 내일 당장 목숨이 끊어진다 해도 아쉬울 것 하나 없어서 태연자약하면, 그게 신선이지.”
“억지춘향이지 뭐. 내 주제에 안 그러면 또 어쩔 건데? 이렇게 사는 거 말고 다른 방도가 있기나 한 줄 알아?”
“참, 그런가? 하하하!”
“알고 보면 참 불쌍한 생계형 신선놀음이라니까, 히히히!”
두 친구는 독한 송하주에 취해 한동안 횡설수설하면서, 어린 시절의 이런저런 추억들을 되새김질했다. 술만 마시면 무한 반복되는 고정 레퍼토리였는데, 아무리 되풀이해도 싫증이 나지 않았다.
문득 놀자가 유튜브에서 노래를 하나 틀었다. 그러자 단조로운 기타 반주와 함께 잔뜩 쉰 목소리를 통해서, 지난날을 회상하는 담담하면서도 비감한 노래가 조용히 흘러나왔다.
“야, 이게 무슨 노랜데 이리도 가슴이 아프고, 눈물이 막 나오게 하냐?”
노래를 다 듣고 난 친구가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놀자를 바라보았다.
“어떤 베이비붐 세대 아마추어 가수가 작곡도 하고 직접 부른 <개망초 인생>이라는 노랜데, 우리 같은 베이비붐 세대들에게는 들으면 들을수록 가슴을 사무치게 한다, 야!”
놀자도 눈가를 슬쩍 훔치며 대꾸했다.
“개망초 인생? 그거야말로 개 망한 우리한테 딱 맞는 노래구먼.”
“응, 그래서 우리 베이비붐 세대에게 바치는 눈물 어린 찬가란다, 히히!”
“허허, 우리가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뭐 그리 대단한 일을 했다고, 황송하게도 이런 찬가까지 바치고 그러냐?”
“대단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지독한 가난과 숱한 고생 속에서 이때껏 죽지 않고 나름 잘 살아온 걸 자축하자는 거겠지.”
“맞는 말이기는 해. 들판의 개망초처럼 누가 돌보지 않아도 거친 비바람 속에서도 절대 꺾이지 않고 끈질기게 살아왔지.”
“전쟁 후에 쑥대밭이 된 나라에서 쑥쑥 잘도 태어나서, 콩나물시루처럼 우글우글한 교실에서도 다들 열심히 공부했지.”
“하도 많이 태어나서 길가의 돌멩이처럼 이리저리 차이면서도, 결코 주눅 들거나 기죽지 않고 씩씩하게 자랐지.”
“그랬지---. 근데 개망초가 6.25 전쟁 때 미군을 따라 들어와서 저렇게 전국의 산야로 퍼진 거 알아?”
“허허, 어디고 지천으로 널려있는 데다, 하도 촌스럽고 볼품이 없어서 우리 토종 풀꽃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게 사실이야?”
“응. 알고 보니 그렇다네.”
“와, 그럼 우린 개망초와 함께 태어난 운명이네?”
“그런 셈이지. 그래서 잘났든 못났든 다 개망초 인생인 거야, 히히히!”
“개망초 인생이라--- 참 좋다! 근데 주변에 지천으로 널려있어서 무심코 지나치기 일쑤인 개망초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쁘더라고.”
“그럼! 해와 별을 닮은 것 같기도 하고, 꼬마전구 미니어처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계란 프라이가 생각나기도 하고, 참 귀엽지.”
“노랫말대로, 우리도 한번 열심히 살아서 저 하늘의 별을 닮아보고자 했었지. 그래서 앞만 보고 죽어라 달려왔는데, 이룬 건 하나도 없고---.”
“이제 다들 똥차가 되어서, 여기저기 고장이 나고, 제대로 굴러가지도 못하면서 독한 매연만 쓸데없이 내뿜고 있지.”
“그래도 태어나면서부터 세상에 크게 한번 붐을 일으키기는 했지, 하하하!”
“암만! 우리가 누구야?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그 이름도 찬란한 베이비붐 세대 아니야? 히히히!”
“야, 너 천장지구라는 옛날 영화 생각나지?”
녹차를 몇 잔 마시고 정신을 좀 차린 놀자가 뜬금없이 영화 얘기를 꺼냈다.
“생각나다마다. 유덕화와 오천련이 주인공으로 나온 아주 멋진 영화였지.”
홍콩영화라면 사족을 못 쓰던 친구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홍콩 누아르의 마지막 걸작이라는 평을 받은 영화지.”
“맞아! 남녀 주인공들의 엇갈린 운명과 이루어질 수 없는 가슴 아픈 사랑 때문에, 홍콩 판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불리기도 했고 말이야. 그래서 많은 이들이 홍콩의 미래를 상징하는 영화라는 얘기를 하곤 했었지---.”
“와, 역시 홍콩 누아르의 왕 팬 답네!”
“한때는 그랬지. 근데 갑자기 그 영화는 왜?”
“홍콩이 중국에 본격적으로 귀속되면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노란 우산 운동도 일어나고 하는 걸 보니, 안쓰러워서 문득 그 영화 생각이 났어.”
“그래, 이제 홍콩도 끝났고, 홍콩영화도 다 끝났어. 아, 옛날이 좋았지---.”
“천장지구(天長地久)라는 말도 사실은 도덕경 7장에 나오는 말이야.”
”그래? 아주 철학적인 말이네? “
”응, 천지는 장구하다, 즉 영원하다 그런 얘기지. 영원히 변치 않는 애정을 비유해서 사용하는 말이기도 하고. 그런데 요즘 지구 상에 왜 이리도 변고가 많은지 모르겠어. 천장지구라는 말도 이제 틀렸나 봐.”
“천지가 무슨 잘못이 있겠어. 항상 인간들이 문제지.”
“그건 그래. 머지않아 남극과 북극의 빙하가 다 녹으면, 대부분의 땅이 물에 잠긴다는데, 그럼 지구 상의 이 많은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가서 어떻게 살까?”
“글쎄, 대부분 굶어 죽거나 아니면 물에 빠져 죽겠지.”
“아니야. 세계 경제를 손아귀에 틀어쥐고 있는 탐욕스러운 다국적 자본가들이 그런 사태를 그냥 보고만 있을 리가 없어.”
“그럼 어쩔 건데? 화성으로 집단 이주라도 시키려나?”
“그들은 틀림없이 첨단기술을 이용해서 해저에 거대한 수중도시를 만들 거야. 자신들을 위해 일할 노동자 계급이 필요하니까. 그래서 돈 많은 사람들은 당연히 땅 위에서 살고, 대부분의 가난한 사람들은 거대한 해저 수중도시에서 죽도록 일하며 살아야 할 거야.”
“허허, 그럴지도 모르겠네. 현재 기술로도 수중도시를 건설하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니까.”
“그게 화성으로 이주시키는 것보다 훨씬 싸고 편리하겠지. 그러면 대부분의 인간도 물고기처럼 물속에서 태어나서, 평생을 물속에서 살다가 죽겠지. 가끔 지배계층이 베푸는 특별 보너스를 받은 사람들만 우주여행을 하듯 물 밖으로 나와 잠시 여행을 하면서, 지구의 망가진 모습만을 기억하겠지.”
“그게 설국열차보다 더 설득력이 있네. 아, 생각만 해도 폐소공포증 환자처럼 가슴이 답답해져 오네. 그리고 노동자 계급은 천지가 변해도 그대로라는 얘기 아니야? 이를 어쩌면 좋아?”
“그런 해저 삼만리 세상이 오기 전에 죽어야지, 뭐. 히히히!”
“그래, 그런 곳에서 백날 살아봤자 뭐 좋은 일이 있겠어. 인어공주를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하하하!”
“---근데 천지가 영원하다는 말도 엄밀히 따지면 맞는 말이 아니야. 우주도 태어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하는데, 천지가 어떻게 영원할 수 있겠어?”
놀자가 뭐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듯이 말했다.
“그야 그렇지. 태양도 앞으로 40억 년 밖에 안 남았다니까. 근데 우주가 사라져도 저 허공은 남지 않을까?”
친구는 뭔가를 애써 방어하려는 듯한 말투로 대꾸했다.
“또 무슨 ‘도를 아십니까?’ 같은 이상한 소리를 하려고---. 허공도 우주의 한 부분일 뿐이야.”
“허공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인데, 어떻게 우주의 한 부분일 수가 있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 공간 자체가 빅뱅에서 생겨난 것이니까.”
“허공은 빅뱅과 무관한 거야. 빅뱅 이전의 절대 무가 바로 허공이지.”
“절대 무? 그게 가능하다면, 거기서 어떻게 빅뱅이 생길 수 있어?”
“그것이 바로 도의 차원이고, 초월의 차원이고, 종교의 차원이지.”
“절대 무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자기모순이요 궤변이야. 안 그래?”
“그래서 말로는 설명이 불가능하고, 직접 체험을 해봐야 아는 거야. 백날 이론만 가지고 떠들어봤자 말짱 꽝이지. 그러니 너도 그만 놀고 도 좀 닦아 봐.”
친구가 빙그레 웃으며 놀자를 놀렸다.
“히히! 바로 그 지점에서 그토록 많은 엉터리 신비주의자와 사이비 도사들이 나오는 거야. 알겠어?”
놀자도 지지 않고 대거리를 했다.
“어쨌거나 난 우주의 모든 은하계가 사라져도 허공은 남는다는 썰에 한 표! 그래야 도가 존재할 수 있으니까, 하하하!”
“난 은하계를 떠난 허공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썰에 한 표! 그래야 힘들게 도를 닦을 필요가 없으니까, 히히히!”
“참, 뱃속의 아기가 가만히 있지 않고 여기저기 돌아다닌다고?”
놀자가 아까부터 궁금해하던 걸 마침내 입 밖으로 꺼냈다.
“그게 아니고, 아기는 아랫배에 있으면서, 뭔가 이상한 기운이 온몸을 쉬지 않고 돌아다녀. 아주 작은 두더지처럼.”
친구가 대단한 비밀이라도 되는 양 속삭였다.
“왜 그럴까? 혹시 몸에서 금맥이라도 찾으려는 걸까? 히히!”
“나도 잘 몰라. 그래서 이런저런 수련에 관련된 책을 찾아봤는데, 대주천이니, 소주천이니, 챠크라니, 쿤달리니니--- 별의별 말들이 다 쓰여 있더군. 근데 내 상태하고는 많이 다르더라고.”
“넌 수련을 전혀 안 했으니까, 그런 특이한 반응이 나오는 걸지도 몰라.”
“그러겠지. 이러다 뭔가 크게 잘못되지나 않을까 불안하기도 해.”
“걱정하지 마. 수련단체들이 흔히 떠드는 말대로 잘 되면 신선이요, 못 돼도 건강은 완벽하게 보장될 테니까, 히히!”
“그러면야 좋겠지만--- 근데 노자가 어머니 뱃속에서 70년인가 80년 동안이나 있다가 나왔고, 태어날 때 머리가 노인처럼 하얗게 세어서 노자라고 했다는 데, 그게 사실이야?”
“그런 이야기가 있는데, 설마 하니 사실이겠어? 후대에 도교를 믿는 무리들이 노자를 신격화시키기 위해서 만들어 낸 왕 구라겠지.”
“아니야, 어쩌면 사실일지도 몰라. 난 그게 조금은 이해가 돼.”
“뭐, 이해가 된다고?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5, 6년째 태아를 품고 있어 보니까, 어렴풋이 좀 알겠더라고. 아마도 노자는 수 십 년 동안이나 도태를 품고 있다가 도를 완성했을 거야. 그래서 불멸의 도인이 됐을 거야.”
“------.”
“그걸 후대 사람들이 그렇게 문학적으로 표현해 놓은 걸 거야.”
“와, 현빈 산장 주인은 역시 다르네! 그래, 넌 이천 오백 년 전의 노자가 다시 태어난 게 틀림없어!”
“예끼, 이 사람아! 제발 놀리지 좀 말아.”
“아니야. 내가 노잣돈은 못 줘도, 마음으로나마 잘 받들어 모실게, 히히히!”
“허 참, 이거 갈수록 태산이로 구만. 하하하!”
두 사람은 또다시 송하주를 마시며 몽롱하게 취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