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의 코로나19 사태가 매우 심각하다. 이제 세계에서 가장 심각하고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다. 자고나면 연일 확진자 수와 사망자 수를 갱신하고 있다. 전파력과 치사율이 훨씬 높은 인도 발 변이바이러스의 존재도 좀비처럼 공포스럽기만 하다. 넘쳐나는 환자들로 병원과 치료시설과 약이 태부족하다니 너무 가슴이 아프다. 뉴스 화면으로 접한 길거리 화장터의 모습들은 그야말로 지옥을 방불케 한다.
처음에는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그런대로 잘 대처해서 찬사를 받기도 했다. 그런데 대규모 종교행사를 치르고 난 뒤로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었다 한다. 종교를 우선시하는 문화도 이럴 땐 문제지만, 종교를 정치에 이용하려는 간악한 정치인들이 특히 문제다. 인도는 떠오르는 희망이다. 전 세계를 상대로 폭군처럼 군림하고 있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잘 돼야 하는데,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안타깝기만 하다. 하지만 인도의 엄청난 저력을 생각할 때, 이 비극적인 사태도 조만간 잘 해결되리라 믿는다. 나마스떼!
놀자는 인도에 대해 나름대로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 젊은 시절 군부독재에 대한 혐오감과 좌절에서 비롯된 병적인 도피심리가 서글픈 자기부정 끝에 찾아낸 막연한 동경과 환상의 귀의처였던 데다, 후일 몇 번의 인도 여행을 통해서 수없이 부딪치고 깨지며 얻은 아주 구체적이고도 생생한 체험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독특하면서도 소중한 감정이었다. 그래서 인도의 코로나19 뉴스를 접할 때마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그리고 많은 인도인들의 몹시도 가난하고 남루한 삶에 대한 연민과 함께, 지난날의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남인도를 처음 여행할 때였다. 어느 오래된 사원 앞의 연못가에서 쉬고 있는데, 근처에 있던 남루한 차림의 사두 하나가 슬슬 다가오더니 수작을 걸기 시작했다. 진짜 사두인지 아니면 사두 행세를 하는 걸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인도여행 경험이 많은 동행친구가 귀찮다는 듯 손짓을 하며 뭐라고 했지만 막무가내였다. 여행기에서 많이 읽었던 풍경이었다. 놀자는 흥미를 느껴 서툰 영어로 더듬거리며 대화를 했다.
“당신은 정말로 신을 믿는가?”
놀자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물론이다. 신이 없으면 이 세상도 없다.”
사두는 이마에 칠한 하얀 선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그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당신과 내가 지금 여기서 이렇게 대화하고 있는 게 그 증거다.”
“이게 어떻게 증거가 될 수 있는가?”
“신이 당신도 만들고 나도 만들었으니까.”
“정말로 그렇게 믿는가?”
“물론이다. 그리고 신은 오늘 나에게 당신을 보내셨다.”
“왜?”
“나에게 100루피를 주라고 보내셨다.”
“하하하! 그 말을 누가 믿겠나? 너무 빤한 거짓말 아닌가?”
“나는 사두다.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내가 100루피를 주지 않는다면?”
“그건 당신 자유다. 하지만 신에게 죄를 짓는 일이다.”
“당신이 믿는 신은 비즈니스 능력이 무척 뛰어난 것 같다.”
“나는 그런 건 모른다. 다만 신의 메시지를 전할 뿐이다.”
“자, 여기 10루피 있다. 미안하지만 이걸로 대신해도 되겠는가?”
“물론이다. 당신의 정성은 100루피 그 이상이다.”
놀자는 남인도 곳곳을 여행하면서, 외부인의 시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인도인들의 불가사의한 신앙심을 가까이에서 목도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소름이 돋곤 했다. 한번은 근대 인도가 낳은 최고 성자 중의 한 분으로 알려진 라마나 마하리쉬가 평생 살았다는 아루나찰라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아루나찰라는 인도인들이 시바 신의 현현이라고 할 정도로 신성하게 여기는 산이었다.
산기슭에는 크고 정갈한 아쉬람이 있었는데, 세계 각지에서 명성을 듣고 찾아온 방문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오후 늦게 도착한 놀자와 친구는 아쉬람 안에 들어가 사람들 틈에 앉아서 잠시 명상도 하고, 주변을 천천히 거닐며 대 성자가 남긴 흔적들을 둘러보았다. 살아생전에 상대를 말없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강한 영적 파장을 느끼게 했다는 성자의 눈동자가 낡은 그림 속에서 이방인들을 무심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 지상에서는 좀체로 만나 보기 힘들 만큼 맑고 투명한 눈동자였다.
이튿날 두 사람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본격적으로 아루나찰라 산 등정을 시작하였다. 중턱까지는 그런대로 경사도 완만하고 큼직한 돌로 된 길도 잘 다듬어져 있어서 걷기에 아주 쾌적했다. 막 떠오르기 시작한 햇살을 받아서 산은 온통 신령스런 정기로 충만하였다. 하지만 성자가 젊은 시절에 기거하면서, 한번 삼매에 빠지면 새가 머리에 둥지를 틀어도 몰랐다는 그 유명한 동굴을 지나면서부터 가팔막지기 시작했다. 해발 700미터가 넘는 붉은 돌투성이의 험한 바위산을 정상까지 계속 기다시피하며 올라가야만 했다.
놀자와 친구가 한참 땀을 뻘뻘 흘리며 오르다가 잠시 쉬면서 숨을 고르고 있을 때, 웬 인도 젊은이 하나가 어깨에 짐을 지고 힘들게 올라왔다. 온 몸이 땀투성이인 젊은이는 두 사람 앞에 오더니 짐을 조심스럽게 내려놓고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남루한 차림새에다 신발도 신지 않은 맨발이라 너무도 보기가 안쓰러웠다.
얼마 후, 놀자와 친구는 젊은이와 자연스럽게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실로 놀라운 얘기를 듣게 되었다. 그냥 맨 손으로 오르기도 힘든 산을 20 리터짜리 물통을 지고,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거의 매일 오전에 산을 올라서 꼭대기에 살고 있는 구루에게 갖다 바치는 게 그의 일과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바로 산을 내려가서 오후에는 거리에서 조그만 수레에 과일을 싣고 장사를 해서 생계를 이어간다고 했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도 아니요, 수고에 대한 무슨 대가를 바라고 하는 일도 아니었다. 단지 존경하는 구루에게 물을 가져다 드린다는 순수한 기쁨과 헌신의 마음에서 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 일을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고 10년 가까이 하고 있다고 했다.
이럴 수가---! 놀자는 이런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는 젊은이를 바라보며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도대체 구루에 대한 신앙심이 얼마나 깊고 강하길래 이런 일을 스스럼없이 해낼 수 있단 말인가. 대부분의 인도인들 또한 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신앙심에 관한 한 이와 비슷하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문득 천연덕스럽게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이 무섭게 느껴졌다. 그리고 군화 바닥보다 더 두껍게 군살이 박히고, 상처로 숱하게 갈라진 발바닥이 성자의 그것처럼 거룩해 보였다.
산 정상에서도 놀라운 광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 올라왔는지 일단의 청년들이 광신도들처럼 신앙 구호를 힘차게 외치면서, 시바의 두 발자국을 새겨 놓은 작은 봉우리를 따라 계속 빙빙 돌며 뛰고 있었다. 정상 부근에는 천막이 하나 쳐져 있었는데, 아마도 구루가 기거하는 곳 같았다. 한동안 그들의 흥미로운 모습을 지켜보고 있노라니, 이윽고 종교행사를 끝낸 청년들이 다가와서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두 사람을 누더기 같은 천막 안으로 데리고 갔다.
천막 안에는 아주 간소한 살림도구가 있었고, 웬 노인네가 작은 화로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불을 쬐고 있었다. 알고 보니 그가 바로 라마나 마하리쉬의 수제자로, 스승이 산 정상에 올라가서 평생 수도하며 살라고 명령하자 그날로 올라가서 지금껏 한 번도 내려오지 않고 오로지 앉아서 기도하고 명상만 하며 살다가 앉은뱅이가 된 바로 그 구루였다. 놀자와 친구는 다가가서 경의를 표하였다. 그러자 그는 멍한 눈으로 잠시 바라보더니 곁에 있는 청년에게 뭐라고 중얼거렸다. 청년은 구루께서 축복의 말씀과 함께 극진히 대접하라고 하셨다면서, 때가 덕지덕지 묻은 잔에다 고약한 향이 나는 차를 한 잔씩 따라 주었다. 차 맛 또한 비위가 좋기로 소문난 놀자도 마시기가 힘들 정도로 역했다. 그래도 두 사람은 시바 신의 은총을 거절할 수 없어서 꾹 참고 끝까지 다 마셨다. 그러자 청년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하였다.
그들과 잠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작별을 고하고 산을 내려오면서, 놀자는 베일에 싸인 인도인들의 영혼 속에 잠시나마 깊이 들어갔다가 나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저 멀리 내려다보이는 티루반나말라이 시내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힌두교 사원들과 높다란 탑들도 색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그리고 지금껏 심정적으로 가까이 해 온 불교에 대해 새로운 측면에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2500년 전, 타락할 대로 타락한 힌두교에서 탈피해서 새로운 종교를 창시한 싯다르타의 내면도 본질에 있어서는 골수 힌두교도와 똑같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런 점을 도외시하고서 불교를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을까. 신성한 언어라서 번역이 불가하다는 불경의 다라니 진언들 중에 상당수가 시바 신에 대한 찬양이라는 전문학자들의 연구결과를 이제는 솔직하게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인도에서 불교가 감쪽같이 사라진 이유는 그 뿌리가 힌두교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뿌리로 돌아간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비슈누 신을 모신 사원에 가 보면 비슈누의 10번째 아바타(화신)으로 맨 마지막에 붓다가 쪼그리고 앉아있는데, 이게 그 확실한 증거가 아닐까---.
그날 이후, 놀자는구도나 명상 같은 것을 생각할 때마다, 그리고 인도인들 못지않게 열렬히 도를 추구하는 유별난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아루나찰라에서의 추억을 떠올리곤 했다.
놀자는 길거리를 걷다가 수상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만났다기보다는 그들이 먼저 알아보고, 확신과 기쁨에 찬 얼굴로 스스럼없이 다가왔다. 누가 봐도 어리숙하고 주변머리 없게 생긴 놀자야말로 결코 놓쳐서는 안 되는 귀인으로 비치는 모양이었다. 오래전에는 아주 귀한 밀수품을 싸게 준다면서 팔랑귀인 그를 꾀어 으슥한 골목으로 데려가더니, 나중에는 특별한 도나 진리의 세계로 친절하게 인도하겠다면서 늘 마음속에 구멍이 숭숭 뚫려있던 그의 발목을 끈질기게 붙잡았다.
하지만 우리의 놀자가 누구던가! 처음에 멋모르고 몇 번 당한 뒤로는 나름대로 대처하는 요령과 능력이 생겨서, 더 이상 호락호락 당하지 않고 유혹의 손길에서 쉬이 벗어나게 되었다. 나중에는 오히려 그들과 말도 안 되는 실랑이를 하면서 은근히 입담을 즐기기까지 했다. 그리고 최근에 놀자가 거리에서 어느 사이비 종교단체 전도자와 벌인 겨루기는 흡사 산중에서 참선을 오래 한 수행자들 간의 불꽃 튀는 법 거량을 방불케 했다.
“선생님, 도를 아십니까?”
“알고 있소.”
“그래요? 그럼 도가 무엇입니까?”
“도가 도지, 뭐 별거요?”
“그런 말장난 말고, 한 말씀만 해주십시오.”
“말할 수 없소.”
“보아하니, 선생님은 진짜 도가 뭔지를 모르십니다.”
“허허, 원래 정해진 도라는 게 없는 법인데, 진짜 가짜가 어디 있겠소?”
“그래서 저희가 진짜 도를 알려드리려고 이렇게 나왔습니다.”
“당신네가 진짜라는 증거를 어디 한 번 대보시오.”
“저희와 함께 가셔서 법사님 말씀을 딱 한 번만 들어보시면 아실 겁니다.”
“그가 법사인지 밥상인지 밥사발인지, 내가 어찌 알겠소?”
“아이고, 선생님은 밥이 거의 다 되신 분 같습니다.”
“그래서 다 된 밥에 코라도 빠트릴까 걱정되시오?”
“네. 하지만 저희와 함께 조금만 더 노력하면 틀림없이 도를 완성하실 겁니다.”
“허허, 코로나로 다들 저렇게 죽어나가고 있는 마당에, 길가의 돌멩이보다도 못한 도가 무슨 소용이 있겠소?”
“바로 그겁니다! 이런 전 지구적인 환란이야말로 진정한 도의 세계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그런 거 다 필요 없소. 당신네들이 그토록 기다리는 후천세계가 오든 말든, 그저 꼴리는 대로 착하게 사시오.”
“선생님은 누구십니까?”
“나는 이 시대의 모순과 아픔을 대변하는 빛나는 백수이자, 개뿔 철학자요.”
“정말이십니까?”
“그렇소.”
“개똥 철학은 들어봤지만, 개뿔 철학이라는 말은 또 처음 들어봅니다.”
“히히! 그건 내가 만들어 낸 말인데, 노자 도덕경 같은 고전에 대해 뻔한 해석을 놓고 이러쿵 저러쿵 개소리들을 늘어놓기 보다는, 세상에 없는 엉뚱하고 기발하고 번뜩이는 궤변을 통해서 훨씬 더 본질에 깊이 접근해 보자는 철학을 말하는 거요.”
“헐! 보아하니 뭘 좀 깨달으신 모양인데, 어찌 깨달으셨습니까?”
“꼭 뭘 깨달아야 아는 건 아니오.”
“그럼 어찌 아셨습니까?”
“우리가 이렇게 숨 쉬고 먹고 싸고 하는 것들도, 따지고 보면 다 도가 아니오?”
“그건 그렇지요.”
“그러니 천하의 등신이 아닌 이상 어찌 도를 모를 수가 있단 말이오?”
“에이, 씨벌! 잘 알았습니다. 그럼 계속 잘 먹고 잘 싸십시오.”
“고맙소! 내 걱정일랑 하덜 말고, 너나 잘하세요, 히히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