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자 가라사대(29)
<화천대유>와 <천화동인>의 참뜻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과 함께 가을이 서둘러 물러가고, 이른 추위가 닥쳐왔다.
얼마 전, 놀자는 시골에 있는 친구 집에 내려가서 며칠 묵으며 가을걷이를 도와주고 올라왔다. 친구도 만나고 바쁜 일손도 도울 겸해서 해마다 늦가을이면 되풀이하는 연례행사였다. 열심히 살고 있는 친구 내외를 보니 코로나로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터라 더욱 반가웠다.
비록 고향 뒷산에 자리 잡은 조그만 오두막이지만, 이름만은 거창하게 <현빈 산장>이었다. 놀자가 노자 도덕경에 나오는 말을 따서 지어준 이름이었다. 나지막한 산들로 둘러싸인 <현빈 산장>은 늦가을을 맞이하여 제법 운치 있고 정감이 있었다.
“오랜만에 이렇게 땅 냄새도 맡고, 고추도 따서 널고, 들깨도 말려서 털고 하니까, 나도 시골 농부가 다 된 기분이다, 야!”
놀자는 며칠간의 노동으로 허리가 뻐근했지만, 마음만은 더없이 평화로웠다. 오랜만에 자연의 풍요로움을 만끽하니 고향에 온 실감이 났다.
“그러게 넌 뭐 좋은 일이 있다고 그 복잡한 서울에서, 그것도 비좁은 옥탑방에서 개고생을 하며 살고 있냐. 빨리 여기로 내려와라.”
친구가 옆에서 매번 되풀이하는 지청구를 또 늘어놓았다.
“나도 그러고 싶지만, 아직은 할 일이 좀 남아있어서 최대한 버티는 거야.”
“이 나이에 무슨 미련이 더 남아있다고 그래?”
“막상 내려오려고 하니까 이것저것 걸리는 게 많아.”
“지금 하는 일 정도는 여기 내려와서 컴퓨터로 해도 되잖아.”
“그렇긴 한데 그런 것 말고도 내가 아니면 안 되는 일이 꼭 한 가지 있어.”
“그게 뭔데?”
“음, 그러니깐 두루, 그게 뭐냐면, 21세기를 지배하고 있는 저 거대한 자본의 야만적인 위력 앞에서, 나처럼 가진 것 하나 없고 지지리도 못난 인간이 감히 자존심과 소신을 지키며 당당하게 살 수 있다는 걸 증명하는 일이라고나 할까---.”
“허허허! 돈키호테가 따로 없구만. 지나가는 똥개가 듣고 포복절도할 일이로다!”
“어허, 나의 거창하고도 고독한 전 지구적 차원의 치열한 투쟁을 그리 함부로 비웃다니!”
“아이고, 그러셔? 위대한 우리의 놀자 님을 몰라봬서 죄송합니당!”
친구가 모자를 벗고 과장된 몸짓을 하며 머리를 숙였다.
“뭐 그렇게 죄송할 것까지야, 흠흠!”
놀자도 먼 산을 바라보며 헛기침을 하였다.
“이 자발 머리 없는 친구야. 넌 아직도 그렇게 지지리 궁상을 떨며 사는 게 좋냐?”
“지지리 궁상이라니. 이래 봬도 우주적 차원의 안빈낙도를 몸소 실천하는 중이라고.”
“허허, 안빈낙도면 안빈낙도지. 거기서 우주는 또 왜 나와?”
“내 비록 보잘것없는 무명시인이지만, 늘 우주와 소통하며 사니까, 히히! 미시적 차원에서 보면, 모든 존재는 다 하나야. 왜냐면 다 같이 원자보다 훨씬 더 작은 소립자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그 정도는 나도 알아.”
“그래서 우주 안의 모든 존재는 하나야. 단지 각각의 인연에 따라 서로 다른 에너지와 파동으로 뭉쳐 있을 뿐이지. 이건 현대 물리학에서도 늘 하는 얘기야.”
“이론적으로야 맞는 말이지만, 그건 단지 관념일 뿐이야. 우리가 미시의 차원에서 삶을 살아가는 건 아니니까. 아니, 우리의 실존은 미시와는 무관하게 직접 보고 듣고 만지고 느끼는 현실과 밀접한 연관이 있으니까. 소립자의 존재보다는 인간들끼리 지지고 볶고 부대끼는 세상이 진짜 세계란 얘기지.”
“그건 그래. 하지만 자기 존재의 기반을 이루고 있는 미시의 세계를 모르면 말짱 다 꽝이야. 그것과 하나가 되어 소통하는 게 중요해. 그게 진정한 깨달음이야.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와 평화와 행복이야. 그리고 그것을 목표로 노력하는 것이 진짜 수행이고.”
“말이야 쉽지. 그게 가능하기나 한 얘기야?”
“그러니까 믿음이 중요하지.”
“믿음? 무슨 믿음?”
“소립자 안에는 또 아직 밝혀지지 않은 물질이 들어있어. 아니, 물질이라고도 할 수 없는 그야말로 초극미세 물질인데, 그것이 바로 영혼이야. 불교에서는 공이라고 하고. 근데 과학자들은 아마도 영원히 밝힐 수 없을 거야. 물질이 아니니까.”
“어이쿠, 산 넘어 산이로구만! 넌 그걸 어찌 알아?”
“다 아는 수가 있지, 히히히!”
“이런 순 사이비 궤변 망상 병자 같으니라고!”
”어쨌거나 옛날 성인들은 이런 사실을 고도의 직관을 통해 깨달았기 때문에, 우주와 내가 하나요, 우주는 시작도 끝도 없는 하나의 거대한 영혼이라는 말을 그렇게 수없이 되풀이해서 얘기했던 거야.”
“그래서 언제까지 그렇게 지지리 궁상으로 살 거냐고요, 이 사이비 도사님아!”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아하니, 아마도 조만간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환란이 닥칠 것 같은데, 그때 가면 나를 진심으로 이해할 거야. 그리고 다들 나를 부러워할 거야.”
“얼씨구!”
“아니, 지금 당장이라도 빌 게이츠가 날 찾아와서 서로 처지를 바꾸자고 애원해봐라, 내가 눈 하나 깜짝 하나, 히히히!”
저녁 무렵, 하루 일을 마친 두 친구는 야외 탁자에 앉아서 곱게 물든 단풍과 함께 짙어 가는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송하주 잔을 기울였다. 조금 떨어진 마당에 피워 놓은 모닥불에서는 낙엽 타는 냄새가 진하게 날아왔다. 한동안 모닥불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노라니 텅 빈 충만감이 두 사람의 주위를 에워쌌다.
“가을에는 저 낙엽 타는 냄새처럼 좋은 건 없어.”
친구가 마음을 내려놓은 자만이 지을 수 있는 미소를 빙긋이 지으면서 말했다.
“그건 그래. 봄꽃보다 더 곱게 물든 단풍으로 둘러싸인 산중에서 맡으니 더 좋다, 야! 구수하면서도 쌉싸름한 저 냄새는 말이지, 서글프고 허전한 상실감에 빠져들게 하면서도, 후련하고 홀가분해지는 느낌과 함께 영원한 수수께끼인 삶의 비의를 조금이나마 일깨우는 것 같아. 아무튼 존재의 심연에 문득 모락모락 와닿는 그런 느낌이야. 아마도 낙엽귀근이라고, 한 해 동안 열심히 생명을 가꾸고 다시 뿌리로 돌아가는 존재라서 그럴 거야.”
놀자가 불콰한 얼굴로 넋두리하듯 중얼거렸다.
“나도 이 산중에서 웬만하면 자급자족하고 살면서, 너처럼 가능한 자본주의와 무관하게 살아보려고 노력 중이야. 근데 그게 생각보다 참 어려워.”
친구가 주위를 둘러보며 덤덤하게 말했다.
“알아. 예전에 그렇게 큰 사업을 했던 늬가 이렇게 살고 있다니, 정말 믿기지 않는 일이야. 어쩌면 늬가 나보다 더 현명하게 자본주의와 싸우고 있는지도 몰라. 이런 자족의 삶이 어쩌면 가장 급진적인 저항의 방식이 될 수도 있어.”
놀자는 진심으로 친구를 격려하였다.
“아니야. 너처럼 거창한 명분이 있어서가 아니라, 오갈 데가 없어서 할 수 없이 선택한 거지 뭐. 그래도 궁하면 통한다더니 그럭저럭 살아지더라고.”
“몸속에서 도의 태아가 나날이 자라고 있는 사람이 세상에 뭐가 부럽겠어?”
“속 편한 소리 하지 마. 이 지긋지긋한 고통의 여정이 언제 끝날지도 모르고, 설령 끝난다 하더라도 도가 완성이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데, 부럽긴 개뿔! 뭐가 부러워.”
“어쨌거나 나중에 도통한 뒤에 나를 1대 제자로 받아준다는 약속 잊지 마!”
“거, 쓸데없는 소리 좀 그만해. 민망해 죽겠다, 야!”
“근데 살다 보니 참 별일도 다 있어. 요즘 그 어려운 주역에 나오는 괘사 이름들이 언론에 계속 회자되고 있는 거 알지?”
놀자가 뜬금없이 친구에게 물었다.
“웬 주역?”
“현재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대장동 개발과 관련된 <화천대유>와 <천화동인> 얘기 말이야.”
“아, 그 얘기로구만. 원래는 참 좋은 말이라고 알고 있어. 근데 아주 고약한 일에 관계되어서 영 기분이 더럽구만, 퇫-!”
친구가 술잔을 단번에 비운 뒤 침을 뱉고는 입맛을 다셨다.
“누가 아니래. 주역 14번째 괘인 <화천대유>는 해가 중천에 떠서 만물을 고르고 밝게 비추고 있는 상이니 얼마나 좋아. 그렇게 올바른 뜻을 세워서 하는 일마다 형통하고, 그 결과 크게 소유하게 됨을 뜻하는데, 투기꾼들이 약삭빠르게 회사 이름으로 쓰는 바람에 본래의 좋은 뜻을 버려 버렸지.”
“어쨌거나 아주 크게, 그것도 보통 사람들은 상상하지도 못할 만큼 아주 크게 해 먹었으니, 대유(大有)라는 말이 맞기는 제대로 맞았구만.”
“그런 셈인가? 그 거참,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네. 그 회사를 운영한 인간들의 모임인 <천화동인>은 또 어떻고? 주역 13번째 괘인 <천화동인>은 하늘에 해가 떠올라 만물이 활동하여 서로 모이는 상이니, 모든 사람들이 뜻을 하나로 합쳐서 함께 하는 것을 뜻하는데, 이 역시 내로라하는 엘리트들이 비밀리에 의기투합해서 합법을 가장한 불법 부동산 투기사업을 벌여 어마어마한 이익을 챙겼으니, 괘상이 맞기는 기가 막히게 맞은 셈이네.”
“어떤 사이비 도사가 작명을 했는지 모르지만, 하늘에 큰 죄를 지었구만.”
“허허,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빠져나갈 구멍도 없다던데---.”
“그런 걸 겁낼 작자들이 아니지. 그리고 법을 가장 잘 아는 작자들이 교묘하게 법을 이용해서, 합법을 가장한 불법 투기를 대담하게 저지르는 데야 어떻게 막을 도리가 없지.”
“그게 문제야. 법 전문가라는 작자들이 그런 걸 감시하고 막을 제도를 만들기는커녕 다들 한통속이 되어서 함께 해쳐먹고 있으니 정말로 큰일이야.”
“근데 그런 나쁜 놈들이 감히 주역의 괘를 내세우고 그런 엄청난 비리를 저지르다니, 생각할수록 괘씸하네.”
“누가 아니래. 하지만 사실은 그런 놈들을 불쌍히 여겨야 해. 왜냐하면 아주 오랫동안 못 먹고 못살아서 한이 맺힌 축생들이 마지막 해원의 시간을 맞이해서 한풀이를 하러 온 거라고 하니까. 그리고 한풀이 후에는 저 광대무변한 우주 속으로 먼지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질 존재들이라고 하니까.”
“와,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근데 그거 믿을 만한 얘기야?”
“나도 누구한테 들은 얘긴데, 사실인지 아닌지는 잘 몰라, 씨벌! 히히히!”
놀자와 친구는 모처럼 과음을 하며 별 하나 보이지 않는 캄캄한 하늘을 향해 울분을 마구 터뜨렸다.
평소 아나키즘을 신봉하는 놀자는 술이 들어가자 또다시 자기만의 독특한 이론을 떠벌렸다.
“자고로 땅은 개인 소유가 되어서는 절대 안 돼. 어떻게 신성한 땅을 감히 개개인이 사고팔 수가 있어? 땅은 우선 국가와 민족 전체의 것이요, 나아가서 인류 전체의 것이야. 그리고 이전 세대가 피땀 흘려 가꾼 공유 재산이자, 후손들이 발을 딛고 살아야 할 소중한 자산이야. 따라서 땅을 개인이 소유한다는 건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일이야. 신성한 어머니의 땅을 인간들이 마치 물건을 사고팔 듯이 사고파는 게 말이나 돼?”
“그럼 공산주의 국가에서 했던 것처럼 집단농장을 운영하자는 얘기야?”
“그 말이 아니라, 개인에게는 사용할 수 있는 권리만 인정해 주고, 소유권은 절대 주지 말고 국가나 지방자치에서 엄정하게 관리하자는 얘기야. 현재 대장동 개발로 인해 온 나라가 시끄러운 것도, 근본적인 문제는 바로 땅을 개인 소유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야.”
“그렇게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너무 공상적이고 망상적인 얘기 아냐?”
“노자는 국가가 작으면 작을수록 좋다고 했지. 그리고 국가 경영은 작은 생선을 굽듯 조심스럽게 해야 한다고 했지. 오랜 옛날에도 벌써 거대 국가의 피해와 문제점을 알고 있었던 거야. 역시 노자는 아나키즘의 원조야! 지구가 온 인류의 공동자산이라는 인식이 없는 한 국가 간의 충돌과 강대국들의 횡포는 계속될 거고, 평화는 요원해. <윌든>으로 유명한 헨리 소로우의 <시민의 불복종>이라는 글에 아주 기가 막힌 구절이 있어.”
“뭔데?”
“잘 생각나지는 않지만, <국가라는 창녀야. 금과 은으로 된 옷을 두른 음녀야. 옷은 걷어 올렸지만, 네 영혼은 진흙 속에 뒹구는구나!> 뭐 대충 이런 내용이야.”
“와, 국가를 창녀에 비유하다니, 정말 대단하다, 야! 하지만 너무 과격한 거 아니야?”
“표현이 좀 거시기하긴 하지만, 제대로 정곡을 찔렀다고 할 수 있지. 그래! 모든 국가는 크든 작든 다 창녀다! 순결한 국민들의 사랑과 목숨과 영혼을 팔아서 먹고사는 더럽고 추악한 창녀다! 그러니 만국의 백수와 백조들이여! 용감하게 일어나라! 우리 다 함께 힘을 뭉쳐서 세상의 모든 국가를 깡그리 없애버리자! 폭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게으름과 무능함과 빈곤의 연대를 통해 손에 손잡고 빙글빙글 강강술래를 추면서, 히히히! "
“너 벌써 취했구나. 그만 안으로 들어가자.”
“그래 취했다! 이런 날 안 취하면 어떡하냐. ---참, 주역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너 주역 맨 마지막에 무슨 말이 쓰여있는지 알아?”
놀자가 갑자기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뭔데 그리 심각한 표정을 짓고 그러냐?”
친구도 덩달아서 정색을 하고 말했다.
“자연과 인간 세상의 온갖 변화를 다룬 심오한 주역의 마지막 말은 정말로 대단해. 다름이 아니라 술자리에서 절대 술 많이 먹고 주사를 부리거나 해롱대지 말고 조심을 하라는 내용이야, 히히!”
“그게 정말이야?”
“응. 근데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잖아.”
“암만! 부실한 몸으로 오늘도 이렇게 과음했으니 더 말해 무얼 해.”
“그래서 주역은 역시 어렵고 따라 하기가 힘들어, 히히히!”
놀자와 친구는 시원하게 방뇨를 하고 몸을 한 번 크게 부르르 떤 뒤, 비틀거리며 현빈 산장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