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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미니꾸 Oct 22. 2020

Genocide

AFRICA 그리고 영화 호텔 르완다

콩고 주재원으로 일할 때 가끔 출장 갔던 르완다는 다른 아프리카 나라들보다 반듯한 도로와 깔끔한 도시의 풍경으로 기억되는 곳이다. 아픈 상처를 가지고 있는 나라이지만, 그들은 의연하고 현명하게 대처했고, 그 상처를 아물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르 완다의 수도 키갈리의 중심부에는 밀 콜린스 호텔이 자리 잡고 있다. 우리 같은 주재원들의 출장 숙소는 언제나 호텔이다. 이곳은 1994년 르완다 대학살을 다룬 테리 조지 감독의 영화 '호텔 르완다'의 실제 무대다. 당시 호텔 지배인이던 폴 루세사바기나는 후투족 민병대를 피해 호텔로 찾아온 투치족 1268명을 100일간 숨겨주고 그들의 목숨을 구했다.  


 '호텔 르완다'의 내용은 이렇다. 후투족 폴 루세사바기나(돈 치들)가 지배인으로 일하고 있는 호텔은 서구의 기자들과 몇몇 UN군이 상주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학살의 현장에서 안전지대였다. 그는 가족들과 투치족 이웃들을 호텔에서 지낼 수 있게 하는 조건으로 후투족 장성에게 뇌물을 주면서 UN군과 세계의 도움을 기다린다. 호텔에 투숙하고 있는 기자는 현장을 카메라에 담아 제삼자 개입의 필요성을 알리지만 선진국의 지도자들은 외면한다. 급기야 사태가 심각해지자 UN과 각 나라들은 호텔에 투숙하고 있던 자국 여행객과 기자들을 모두 철수시킨다. 연일 죽음의 위협이 계속되고 결국 폴은 후투족 장성에게 마지막 뇌물을 건넨 후, 투치족 난민들과 함께 UN군 피난민 수용 시설을 통해서 겨우 탈출한다. 


  영화가 전하는 것은 당연히 도움을 줄 것이라고 믿었던 UN과 세계의 평화를 지킨다고 자처하던 서구 선진국들이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고 오히려 자국민만을 철수시킬 때 주인공 폴이 느끼게 되는 고립감이었다. 실존 인물인 그는  얼마 전에 르완다에서 체포되었다.





1. 후투 그리고 투치

: 르완다 내전은 강경파 후투족이 온건파 후투족과 투치족을 수십만 대량 학살한 사건이다. 영화에서 후투(90%)와 투치(10%)가 별개의 민족 인양 소개되는 데 그건 사실이 아니다.  르완다 내전 이후에 후투와 투치를 연구한 학자들에 의하면 투치와 후투는 원래 같은 민족이라고 한다. 단지 투치는 유목하던 사람들이고,  후투는 정착 농민들이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계급적 명칭에 불과했는데 양자의 관계는 투치가 유목민이면서 전사 계층이었기 때문에 지배계층인 건 확실하지만 공물을 받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벨기에가 르완다를 식민 통치하면서 통치의 편의를 위해 투치와 후투를 민족 개념으로 확대 재생산한 것이다. 이전 블러드 다이아몬드에서도 말했지만, 벨기에는 진짜 악랄한 방법으로 단물 다 빼먹고 악행을 자행한 것으로 유명했다. 벨기에는 투치를 키가 크고 흑인 중에서는 피부가 하얀 축에 속해서 백인에 가까운 종족으로 보고, 후투는 키 작은 순수 흑인으로 취급했다. 벨기에는 투치에게 일종의 마름 역할을 맡기면서 후투를 착취하였고, 당연 후투는 식민통치자인 벨기에보다 투치를 더 증오하게 된다. 르완다가 벨기에에서 독립 한 뒤에 증오가 폭발해 투치를 박해 또는 국외 추방시키고, 그런 상태가 수십 년 계속되다가 국외 추방당한 투치가 군대를 조직 르완다를 침공하게 된다. 이에 위기를 느낀 후투 내 강경파들이 대량학살을 시작하게 된다.  결국 투치반군이 승리해 대량학살은 멈추어졌지만 그 상처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알고 보면 르완다 내전도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처럼 제국주의 식민통치의 유산일 뿐인 것이다. 




2. 제노사이드 이후의 르완다


: 사건의 가해자들은  모두 사법부의 법정이 아니라 르완다판 ‘원님 재판’에 해당하는 ‘가차차’를 거쳐 벌을 받았다. 가차차는 마을회관이나 공터 같은 곳에서 마을의 어른이 주재하는 간이 재판으로, 르완다는 가차차를 거쳐 가해자에 대한 처벌 수위를 결정했다. 제노사이드 가담자들은 저지른 죄에 비해 가벼운 징역 15년 안팎의 처벌밖에 받지 않았다. 하지만 르완다인들은 제노사이드 가해자와 시간을 두고 화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납득하고 있었다. 이는 수많은 가해자를 모두 사형이나 중형에 처하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을뿐더러 또 다른 복수극이 반복될 수 있다는 사회적 논란을 우려해 르완다 사회가 선택한 결론이었다.


 가차차와 함께 제노사이드 이후 르완다 사회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개념은 바로 ‘은두무니아 르완다’이다. 
르완다의 공용어인 키냐르완다어로 “나는 르완다인이다”라는 뜻이다. 현재 르완다에선 “너는 후투냐, 투치냐”라는 질문은 일종의 금지어다. 이렇게 묻는 사람은 르완다 사회를 잘 모르는 사람으로 취급된다. 이런 질문을 받는 르완다 사람 대부분은 “은두무니아 르완다”라고 대답한다.

처벌은 또 다른 아픔을 낳을 것이고, 처벌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므로 그들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좋은 해결책은 눈감고 안아주는 이해였을 뿐이리라.




3. 현재의 르완다


: 내전 직전인 1990년 IMF 구제금융을 받고, 내전 기간 마이너스 성장을 지속했던 르완다 경제는, 카가메 정부 출범 후 정치 안정을 기반으로 연평균 7%(2019년 8.5%) 성장했다. 1인 국민소득(GDP)도 94년 146달러에서 2018년 787달러로 늘었다. ‘아프리카의 싱가포르’를 표방하며 2000년 경제개발 20년 장기계획을 발표한 카가메 정부는 국제 원조와 대규모 외자 유치 등을 통해 농업 외 제조업과 관광서비스업을 집중 육성했다. 2017년 르완다 국가 부패지수(CPI)는 세이셸, 보츠나와 다음으로 낮았다. 2019년 세계은행은 르완다를 기업 하기 좋은 국가 세계 29위로 꼽았다. 학살 후유증으로 총인구의 53%가 19세 미만이고, 그들이 노동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입하면 실업률(2019년 16.7%) 등 인구 압력이 거세질 것이라는 우려들이 있지만, 르완다가 원조 자금을 가장 효율적으로 활용한 아프리카 국가 중 한 곳이란 사실에 토를 다는 이는 없다.




4. 루세사바기나 그리고 체포


: 그런데 지난달 르완다 당국이 국제 체포영장에 의거해 그를 키갈리에서 체포한 뒤 기자회견을 열어 수갑을 찬 그가 호송차에서 내려 르완다 수사국(RIB) 본부에 걸어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줬다고 BBC는 전했다. 다만 그를 어디에서 체포했는지, 구체적으로 어떤 혐의를 받고 있는지 밝히지 않았다.


 그는 2011년에도 정적인 폴 카가메 대통령 정부로부터 테러조직에 뒷돈을 댔다는 이유로 체포될 위기에 몰렸으나 벨기에 망명 중이어서 기소되지 않았다. 물론 그는 당시에도 아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으며 2000년 취임한 카가메 대통령이 자신을 모략을 빠뜨린 것이라고 반박했다. 르완다 학살 생존자들의 모임인 이부카는 과거에도 대학살 기간에 난민들을 피신시킨 루세사바기나의 선행에 부풀려진 대목이 적지 않다고 주장했다.

루사세바기나는 야당을 결성해 콩고 민주공화국에 무장조직을 키운다는 의심이 줄곧 제기됐다. 최근에도 민족해방전선(FLN)이란 반군 조직이 에드가 룽구 잠비아 대통령의 지원을 받고 있다는 재판이 진행 중인데 룽구 대통령은 루세사바기나와 막역한 사이다. 물론 룽구 대통령의 대변인은 혐의 사실을 일절 부인했다. 카가메 대통령은 학살의 후유증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는 등 긍정적 역할도 했지만 야당 인사를 감옥으로 보내거나 망명하게 만드는 등 강압적인 통치 스타일로 악명 높다.


 2007년 루세사바기나는 대학살에 가담한 투치족 반군 조직인 르완다 애국전선(RPF) 일부 성원을 유엔 전범 법정에 세워야 한다며 “난 그저 보통 사람이다. 하지만 난 늘 인권을 옹호해 왔다. 누구도 그들을 대변할 이들이 없는 수백만명의 르완다 사람들 목소리를 내려 노력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RPF는 카가메 대통령이 창설해 후투족 정부군과 1990년부터 내전을 벌여왔다.


 난 아프리카에서 주재원으로 있으며, 수많은 친구들에게 배신과 사기를 당해왔다. 그런 과정을 몇 년 거치는 동안 그들의 선함보다는 결핍에서 나오는 그들의 시커먼 속 내를 먼저 떠올리곤 한다. 선의를 베풀면 선의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악의로 돌아오는 경험이 대부분이었다. 한 예로 숙소에서 일하는 가정부 아주머니에게 월급 이외에 개인적으로 힘든 가정사를 눈여겨보고는 적은 돈이라도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챙겨주곤 했다. 한 달, 두 달 챙겨 주곤 했는데, 어쩌다 다른 나라 출장이 많거나 일이 바빠 잊고 넘어갈 때면 나에게 불같이 화를 내며 왜 돈을 주지 않냐 화를 내곤 했다.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들이 아프다 약을 사야 하는데 돈이 없으니 빌려달라와 같은 비슷한 스토리로 돈을 빌려가서는 그날 밤 술집에서 몽땅 술을 마시고는 사라져 버리는 일들이 부지기수였다. 서구 열강들에게 그들의 모든 것을 빼앗긴 그들에게 나 또한 아프리카에서 무언가를 가져가기 위한 또 다른 열강이라 느낄 수도 있다. 그러니 그런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이런 식으로 나오는 것은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실제 루사세바기나가 무장조직을 키웠는지는 모르지만, 이와 같은 현실이 아프리카의 모든 나라가 궁핍의 구덩이에서 나오기 힘든 사실은 어쩌면 피하기 힘든 현실일 것이다.





"TWANZE GUTOBERWA AMATEKA(Never We Will Allow) - Kizito Mihigo"



 키지토 미히고(Kizito Mihigo)는 르완다 국민가수다. 르완다 국가(國歌) 작곡 경연대회에서 입상했고, 국비 유학생으로 벨기에와 프랑스 파리음악원(Conservatoire de Paris)에서 기악(오르간)과 작곡을 공부했다. 그는 유럽의 클래식 음악가로 사는 대신 모국어로 노래하는 르완다 대중가수가 됐다. 엄밀히 말하면 대다수 가톨릭 신자인 국민들을 위한 성가(聖歌)를 지어 부르는 특이한 가수였다. 다만 그의 성가는 신을 찬양하는 노래가 아니라 신적인 가치, 생명과 평화와 화합의 메시지를 전하는 성가였다. 그는 자신처럼 내전-학살을 겪고 살아남은 이들을 위로하고자 했고, 반목과 유혈의 역사가 거듭되지 않도록 계몽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의 노래는 모두가 함께 듣고 따라 부르는 대중의 노래, 국민의 노래였다. 그는 “음악이 르완다 사회를 재건하는 데 유용한 수단”이라 믿으며 “인기나 돈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 나라와 신의 뜻을 좇는 이들을 위해” 노래했다. 무대에서든 뮤직비디오에서든 항상 정장 슈트를 입고 설교하듯 노래하는 그를 르완다 인들은 귀하게 여겼고, 2013년 르완다 남성 연예ㆍ스포츠 스타 인기투표에서 ‘최고 섹시남(hottest male celebrity)’ 2위로 꼽기도 했다.

 

 만 38세의 미히고가 2월 17일, 르완다 수도 키갈리의 레메라(Remera) 경찰서 유치장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나흘 전 경찰은 그가 “신분을 감추고 남쪽 국경을 넘어 부룬디로 도피하려다 체포”됐다고 밝혔다. 당국은 그의 사인을 자살로 공식 발표했다. 그 발표를 곧이곧대로 믿는 르완다 국민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국제사회는, 르완다 인권 현실을 주목해온 수많은 국제 인권단체들은 애도에 앞서 일제히 진상 규명을 촉구하는 성명을 냈다. 그리고 그의 석연찮은 죽음은 르완다 내전과 미히고의 짧고 비범한 생애를, 내전 이후 경제 성장의 성과에 감추어진 르완다 정치ㆍ사회의 이면과 인권 현실을 들추어보게 했다. 


 키갈리 중앙교도소에 수감된 미히고는, 함께 수감생활을 했다가 출소한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민족 증오와 복수심에 사로잡힌 재소자들과 줄기차게 대화하며 화합을 호소했다고 한다. 4년여 뒤인 2018년 9월 대통령 특사로 석방된 그는, 키갈리에 음악학교를 세워 초ㆍ중등 학생들에게 작곡과 기악을 가르쳤다. 그의 조국은 그에게 더 이상 작곡가나 가수로서의 삶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석방 18개월여 뒤 망명을 시도하다 체포됐고, 나흘 만에 숨졌다.



“죽음보다 더 나쁜 것은 이 세상에 없다”라고 노래했던 그가

왜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는지, 그게 정말 그의 선택이었는지,

세상은 긴 세월이 흐른 뒤에야 온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노래는 여전히, 국경과 부족의 경계를 넘어 많은 이들이 듣고 따라 부는 노래로, 유언처럼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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