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도미니꾸 Dec 15. 2021

30일 차> 위스키란 무엇인가?

john coltrane  -  naima


 오랜만에 외부에서 술을 한잔 했다. 선배의 자동차를 타고 대리운전 서비스를 이용했다. 운전석에만 있던 내가 뒷좌석에서 이용을 해보니 느낌이 달랐다. 묵묵히 운전만 하시는 기사님의 모습에서 추운 날 밖에서 떨며 콜을 기다렸을 모습이 눈에 선했다. 능숙하게 운전대를 돌리며 운전하시는 모습을 뒤에서 보고 있자니 남의 일 같지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선배와 난 곧 그 기사님의 존재는 잊은 채 우리만의 대화를 이어갔다.




우리의 대화 주제는 위스키였다. 가끔 주변 친구들에게 "whiskey가 뭐야?"라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그러나 그렇게 마치 콜라를 원샷으로 목으로 넘겨버리듯 물어오면 이쪽은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공연히 그저 고개만 갸웃거릴 뿐이다. 그것은 예를 들자면"인지심리학이란 어떤 학문인가요?라는 질문과 같아서 "그건 이러이러한 겁니다"하고 한마디로 딱 잘라 설명할 수 있는 깔끔하면서도 구체적인 정의라는 게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령 정의가 없다 해도 어느 정도  술을 마셔본 사람이라면 위스키의 향을 맡아보거나 약간의 음미를 통해서도 '아하, 이건 위스키야', '아니, 이건 위스키가 아니야'라고 바로 판단할 수 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경험적이고 실제적인 것으로 'whiskey는 무엇인가'에 대한 판단 기준을 일일이 칼같이 적용한 결과는 아니다. 누가 뭐라 하든 whiskey와 whiskey가 아닌 다른 술들을 비교해보자면 향기가 다르고, 울림이 다르며, 마음을 흔드는 방식이 다르다. 어떻게 다른가는 실제로 그 차이를 경험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기 때문에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에게 그것을 말로나 글로 전달하는 일은 실로 어려운 일이다.


 아직도 위스키를 알아가는 중이고, 느껴보는 중인 초보 음주가인 나다. 그런 내가 먼저 경험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에게 '뭐든 좋으니 아무 whiskey나 10번 정도는 천천히 마셔보고 다시 찾아와'라는 식의 깐깐한 언사를 입 밖에 낼 수는 없다. 그렇게 말해버리는 게 차라리 편할 테지만, 매정하게 문밖으로 내치듯 단정해버리면 대화는 벽에 부딪혀 툭 끊기고 만다.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고,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잠이 오면 잠을 잔다. 뻔하지만 뻔하지 않듯 우리네 인생은 흐른다. 늘 곁에 있는 공기의 소중함을 잊으며 우리가 생활하듯 자연스럽게 물들어가는 것들로 우리들의 인생은 가득하다. 파블로프의 조건반사 속 강아지가 벨소리에 반응하듯 우리는 본능적으로 어울림에 대한 갈증이 있다. 나 같은 경우 10월에는 Barry Manilow의 ‘When october goes’를 듣는다. 9월에는 Earth Wind & Fire의 'Semptember'에 맞춰 신나게 춤추기도 하고,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머라이어 캐리의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를 흥얼거린다. 뻔한 수학 공식 같은 소리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그러한 어울림 속에서 마음의 안정을 찾게 되고 평안의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된다. 영화와 음악, 그림, 여행 등 내가 좋아하는 각각의 조각들을 끄집어내 나만의 모양으로 뭉쳐놓고 즐기는 것을 즐기며 평안을 얻는다. 예를 들자면 부에나 비스타 소셜클럽이라는 쿠바 음악에 관련된 영화 속 'Chan Chan'이라는 곡을 즐기는 Rum 한잔이 그렇다. 쿠바 여행을 가서  노인과 바다의 저자이자, 자칭 입양 쿠바인 헤밍웨이가 사랑했던 모히또와 다이끼리를 주문한 다음 넘치게 한잔을 마시는 것이 그렇다. 커티삭을 마시며 하루키를 떠올리고, 블랑톤 버번을 마시며 영화 속 존 윅과 켄터키 더비를 떠올린다. 더 쉽게 말해 '007 제임스 본드'를 떠올리며 젓지 말고 흔들어서 마시는 보드카 베이스의 마티니를 떠올리듯 말이다.


특히나 음악과 위스키는 페어링이 나에겐 가장 크다. 입이나 눈으로 어울려지는 위스키의 느낌보다는 귀로 이어지는 페어링이 나에겐 가장 큰 울림을 준다. 사실 음악에는 좋은 음악과 나쁜 음악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널뛰는 본인의 감정을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었던 것뿐이다. 재즈를 듣고 있으면 아무 생각이 없어질 때가 있다. 왜 내가 이 음악을 듣고 있는지, 음악이 주는 느낌이 어떤 건지 생각하기도 전에 그냥 그 음악 속으로 빠져들어가 버릴 때가 많다. 그저 박자와 리듬에 나도 모르게 저절로 끄덕여지는 고개와 함께 나를 음악에 맡기다 보면 머릿속 생각이란 것이 사라져 버려 모든 것들이 맑아지는 느낌이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려 생각해보라던 예전에 만났던 어느 스님의 말씀처럼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그런 상태가 되어 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런 음악과 함께 식도를 타고 부드럽게 넘어가는 위스키 한잔이라면 더할 나위가 없다. 프랑스의 작가이자 비평가인 알랭 제르베르(Alain Gerber)는 재즈를 이렇게 정의했다. ‘재즈, 아마도 그것은 말 그대로 아무 의미 없는 음악일 것이다. 아니면 의미와는 작별을 했으리라. 오히려 그것에 집착하기 위해서.’라고



 나에게 위스키는 그런 존재다. 새로운 만남을 위한 작별을 안내해주는 존재이자 아무 의미도 없지만 내게 의미를 만들어주는 존재다. 이렇게 친구들에게 대답하면 아마 열이면 열 모두 나를 비웃을 것이다. 어쭙잖게 술도 잘 못 먹는 녀석이 비싼 술이랍시고 있어 보일라고 위스키 먹는다는 핀잔을 들을 수도 있을 것이다. 수준에도 맞지 않는 비싼 술이나 찾는다며 아무리 나를 공격해도 내 의지는 변함이 없다. 단순한 맛으로 그리고 향으로 분위기만으로는 설명을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whiskey의 매력일 것이다. 때론 직관적으로 맛있어서도 먹고, 분위기가 좋아서도 먹고 향이 좋아서 먹기도 하지만 그렇게 단순한 이유만으로 즐기기에 whiskey란 녀석이 몇 년간 오크통 안에서 품어왔을 그 무언가를 설명하기엔 부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whiskey가 그래서 도대체 뭐냐고?"라고 또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이런 게 바로 whiskey야"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꽤나 긴 정의지만, 이렇게밖에 설명을 해 줄 수밖에 없다. 아니, 이런 설명만으로도 충분하다. 수많은 전문가들이 whiskey의 정의는 설명을 해줄 것이고, whiskey의 장점에 대해서는 설명을 해줄 것이다. 여전히 내 취향과 맞는 위스키를 찾아가며 알아가는 중 다른 사람들에게 whiskey를 설명해주기엔 나의 경험과 설명이 너무도 부족하다. 설사 나의 경험이 많아지고 whiskey를 잘 안다 치더라도 난 누군가 whiskey가 무어냐 묻는 사람들에게 짧은 설명이나 어설픈 경험담보다는 글렌 캐런 잔을 내밀고 싶다. 손잡고 근처 가까운 bar나 집으로 데려가 위스키를 함께 마실 것이다.  아마도 그게 가장 어울리는 그림일 듯싶다. 백번의 설명보다도 한잔의 whiskey 위스키가 바로 해설을 겸비한 수학 문제 지속 답은 아닐지언정 한 명의 반대도 없이 모두를 끄덕이게 만들 답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