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mw X5 그리고 간사함
“군자는 말로 다른 사람을 이끌고 행동으로 다른 사람을 금하게 한다. 따라서 말을 할 때는 반드시 그 끝을 헤아리고 행동할 때는 반드시 그 폐단을 살핀다면 백성들도 말을 신중히 하고 행동을 신중히 할 것이다.”
‘예기(禮記)’라는 책에 나오는 공자의 말이다. 여기서 군자란 고위 관리를 말한다. 즉 고위 공직자라면 말을 할 때는 그 말에 따른 결과를 미리 생각하면서 신중히 해야 한다는 것이고, 어떤 일을 할 때는 그 일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생겨날 수 있는 문제점들을 미리 생각하면서 신중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자는 이미 ‘논어’에서 ‘말은 신중히 하고 일은 주도면밀하게 하라’고 했다. 그럴 때라야 백성들이 그것을 보고서 관리를 믿고 임금을 믿고 나라를 믿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백성들 사이에 믿음이 생겨나지 않으니 그리 되면 나라도, 임금도 설 수가 없다. 그게 유명한 공자의 말, 민무신불립(民無信不立)의 깊은 의미다. 굳이 공자와 논어가 아니라도 우리는 삶의 이면을 통해 끊임없이 신중한 말과 행동의 중요성을 느끼게 된다. 최근 삼사일언(三思一言)이라는 가훈을 다시 한번 가슴에 새겨야 한다는 일이 있었다.
나는 주행 거리가 20만 킬로미터 가까이 되는 오래된 차를 현재 타고 있다. 연식도 오래되고, 여기저기 고장 나고 있던 시점인지라 여유가 된다면 좋지는 않더라도 괜찮은 차로 바꿔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이다. 벤츠나 bmw 같은 좋은 차로 바꾸면이야 좋겠지만, 사정상 그럴 일은 없을 듯했기에 고장이라도 나지 않고 잘 달려주는 자동차에 대한 감사 정도로 지내고 있었다. 전혀 불만 같은 것은 없었다. 오히려 제대로 관리도 못해주고, 조심스럽게 다뤄주지 않았음에도 별다른 고장 없이 잘 달려주는 녀석에게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러던 중 bmw x5라는 1억이 넘는 차를 2달여 타게 되었다. 고급스러운 실외 디자인과 널찍하면서도 화려한 실내 디자인과 옵션들은 정말 대단했다. 1억이라는 돈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모든것이 멋진 차였다. 엑셀레이터에 발을 옮기자마자 질주하길 기다렸다는 듯이 100킬로 미터를 4초에 주파했고, 주차를 할 때도 위에서 카메라로 찍어 보여주듯이 섬세하게 케어해 주는 모습에서 묘한 쾌감을 느꼈다. 일주일 정도 타다 보니 하차감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어느 순간부터 느끼고 있었다. 그저 잘 달려주고 안전하게 우리가 운행하는 동안 지켜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던 자동차에 대한 사고가 바뀐 것은 그때 즈음이었다. "몸 대신 사상을 키우고,비싼 차를 살 돈으로 나 자신이 성장할 수 있는 투자비용으로 써라". 내가 어려서부터 줄곧 가지고 있던 생각이었다. 창문을 내리고 음악을 크게 키워놓고는 사정없이 속력을 내며 질주하는 나는 언제부터인지 그런 생각을 잊게 되었다. 내가 돈을 지불하고 구매한 차도 아니었음에도 난 이미 이 차를 나와 동일시 여기며 무언가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양 말하고 행동하기 시작했다. '나 이런 차 타는 사람이야.'라는 생각들이 온몸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 같다. 80킬로 미터의 정속 주행을 하며 끼어드는 차를 모두 받아주던 나는 언제부턴가 앞에서 천천히 가는 차를 보면 추월을 하기 시작했다. 추월을 하면서도 마음속으로 '거북이야, 굼벵이야.'라고 생각하며 추잡스러움을 떨었다. 차체가 크다는 핑계로 주차도 상대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로 대충 하기 시작했고, 오래된 국산차가 옆에 정차라도 하면 옆눈길 한번 주며 액셀레이터를 세게 밟으며 신호가 켜지자마자 튕겨나가곤 했다.
한 달 정도 지나 보니 엉망이 되어있는 나를 발견했다. 차 때문에 내가 그렇게 변했던 것인지, 원래 나란 녀석 자체가 그럴만한 정도의 수준이었던 것인지 아직도 모르겠다. 물론 난 항상 내가 부족한 사람이고 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살아야 함은 정확히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정도 수준밖에 안 될 정도라는 것에서 느껴졌던 충격은 대단했다. 성격은 얼굴에 나타나고, 생활은 체형으로 나타난다고 했다. 본심은 행동에서 나타나고, 인간성은 약자에 대한 태도에서 나타난다고 했다. 그동안 난 어떤 삶을 살아왔던 것이고, 나름 열심히 노력한다고 했으나 타고난 본능을 이길 수 없는 것이었던 것인지 모르겠다.
일반적으로 동양 문화를 ‘수치심’의 문화, 서양 문화를 ‘죄책감’의 문화라고 부른다. 수치심은 자신의 행동이나 생각이 다른 사람의 눈에는 안 좋게 보인다는 것을 인식할 때 느끼는 부끄러움이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다른 사람을 의식하면서 생활한다. 다른 사람이 없을 때는 별로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다. 반면에 죄책감은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잘못된 행동을 했다는 것을 인식할 때 느끼는 감정이다. 죄책감을 느끼기 위해서는 타인의 존재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양심이 필요한 것이다. 물론 양심은 사회적으로 공유하는 도덕이나 생활 규범이 내재화된 것이지만, 일단 내재화된 후에는 다른 사람의 시선은 의미가 없어진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잘못한 행동이 아니라고 위로를 해줄지라도 자신의 양심에 따라 죄책감을 느낀다. 양심에 거리끼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평가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문화에서는 당연히 체면이 중요하다. 체면은 ‘남을 대하기에 떳떳한 도리나 얼굴’이다. 당연히 남을 대하기에 떳떳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눈’과 평가가 중요하다. 다른 사람이 존재하는 곳에는 그 체면을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 우리 문화에는 체면을 지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려주는 속담이 많다. “벼룩도 낯짝이 있다.” “양반은 물에 빠져도 개헤엄은 안 한다.” “양반은 얼어 죽어도 겻불은 안 쬔다.” “냉수 먹고 이 쑤신다.” 이런 속담들의 핵심은 체면을 지키기 위해서는 추운 것, 심지어 죽음까지도 불사(不辭)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남이 없는 곳에서는 체면을 지킬 필요도 없다. 문화의 탓으로 돌리고 싶지만은 않다. 하지만 그러한 사회의 문화를 나 혼자 거스를 수도 없는 노릇 아니겠눈가. 마스크를 벗으라 말해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잘 벗질 않는다.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겠지만 분명 이러한 부분들이 큰 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우리는 마스크를 얼굴에만 쓰지 않는다. 집이나 차, 입고 다니는 옷이나 화려한 치장들도 모두 일종의 마스크 기능을 한다. 우리의 ‘민낯’이기보다는 예쁘게 화장한 얼굴, 마스크로 감추고 있는 삶이다. 그래서 명품일수록 더 잘 팔리고 비싼 고급차를 타야 ‘하차감’이 좋다고 느낀다. 겉모습이 더 긍정적으로 평가받고, 허영과 허세가 인정받는 곳에서 마스크를 벗는 것은 큰 위험이다. 마스크는 위생적인 기능만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인위적으로 치장하지 않은 ‘민낯’을 보여주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 사회가 될 때, 본모습을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진솔함’이 더 높게 평가받는 사회가 될 때 편한 마음으로 마스크를 벗을 수 있을 것이다.
나에게 bmw x5는 잠깐 동안 쓰고 있던 마스크에 불과했을 뿐이다. 본모습을 자연스럽게 보여주기에 아직 난 부족하고 부족하다. 어느 정도 책도 읽고 바른 생각들을 하며 나아진 건 아닐까 생각했었는데, 아직도 한참 부족한가 보다. 내가 옳다는 것들을 아이에게는 가르치며 정작 내가 그렇게 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면 안될 것 같다. 정말이지 힘든 것이 솔선수범인 것 같다. 어차피 차는 이제 곧 반납할 것이다. 나의 거만함과 간사함 때문에 반납하는 것은 아니지만, 다시 더욱 수행하고 사고하며 조심스럽게 말하고 행동해야 할 것 같다. 나중에 언젠가 내가 다시 저렇게 비싼 차를 타게 된다면 그때는 지금의 나보다 한결 나아진 내가 되길 기대해 본다. 어느 정도 난 괜찮은 사람이라 오해하고 있던 나에게 오히려 이런 기회가 있어 다행이다. 여전히 난 모자라고 부족한 사람이다라는 것을 잊을 만할 때쯤 다시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