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가들과 함께하는 비엔나 투어
: 전설적인 영화 음악 작곡가 한스 짐머
우주야! 아빠와 함께 하는 세계여행의 첫 번째 여행 도시는 바로 오스트리아 비엔나란다.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처럼 아빤 너에게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닌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 재미난 여행을 선물해 주고 싶었어. 단순히 눈으로만 보고 즐기는 여행이 아닌, 역사와 예술 그리고 이야기가 함께하는 오래 기억되는 여행을 말이야. 그래서 나름 지역에 대해서 공부하고 아빠도 몰랐던 사실들을 찾아보면서 준비했단다. 아빠가 너에게 들려주었던 이야기들을 나중에 커서 기억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글로 남기게 되면 조금이나마 기억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글로 남겨보기로 했어. 그리고 우주처럼 어린아이들과 함께 이야기가 있는 스토리가 있는 여행을 하고 싶어 하는 가족들에게도 조금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있었고 말이야. 최대한 아빠가 좋아하는 이야기들과 관심사 내에서 접근하겠지만, 유명한 이야기들 그리고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과 함께 즐겁게 여행을 떠나보려 해. 나중에 커서 아빠와의 추억이 어렴풋하게라도 난다면 아빠는 그걸로 좋아. 그리고 그 기억이 따뜻했고 재밌었고, 너도 모르게 미소 지어지는 그런 기억이 되었으면 좋겠어.
자 거두절미하고 떠나볼까?
비엔나는 오스트리아의 수도로 영어로는 비엔나, 독일어로는 빈이라고 해. 음악의 도시, 세계 음악의 수도로 불리며, 클래식 음악의 팬이라면 다른 어느 도시보다도 먼저 빈을 찾는다고 해. 우리는 클래식 음악을 엄청나게 좋아하진 않지만, 아마 이번 여행을 다녀와서부터는 클래식의 매력에 제대로 빠져들 거라고 아빠는 확신해.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음악의 유산을 오롯이 지켜오면서 동시에 전 세계적인 자극을 통해 그 유산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내는 도시가 바로 비엔나이기 때문이야.
이곳에서 음악의 천재 모차르트와 악성(樂聖) 베토벤이 생애 대부분을 보냈고, 가곡의 왕 슈베르트가 태어났으며, 요한 슈트라우스가 감미로운 빈의 왈츠들을 작곡했다고 해. 시대를 초월해서 많은 천재 음악가들이 탄생하고 활동했던 클래식음악의 유서 깊은 도시로 특별한 추억이 깃들어져 있는 곳이 바로 비엔나야. 비엔나는 풍부한 클래식 음악의 유산을 간직한 ‘음악의 수도’로 오늘날까지 그 역동성과 다양성이 살아 숨 쉬고 있어. 250년 전이나 지금이나 비엔나는 음악계를 선도하는 도시지. 매일 밤 약 1만 명의 음악 애호가들이 비엔나 시립 오페라 극장, 빈 음악협회, 콘체르트하우스 등의 셀 수 없이 많은 훌륭한 공연장에서 라이브 클래식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도시야. 비엔나는 클래식 음악의 역사적 유산을 시대에 발맞춰 재구성하고 언제나 새로운 동력을 통해 이를 더욱 풍부하게 가꿔왔어. 현대의 클래식 음악 형식은 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초 사이에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그리고 브람스와 말러를 통해 빈에서 완성되었어. 고전음악 이전 시대의 예술작품이 형식적인 아름다움만 추구하거나 정신적인 부분만을 강조함으로써 어딘가 부족하게 느껴졌던 데 비해, 이 시대 고전음악의 작품들은 형식미와 내용의 균형을 이룸으로써 조화로운 아름다움에 도달할 수 있었다고 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고전 음악은 시대와 민족을 뛰어넘어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일으켰으며, 수백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사라지지 않고 계속 연주되고 있는 셈이지.
하이든, 모차르트, 그리고 베토벤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겠지? 어쩌면 비엔나 음악의 대표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여행한다면 그렇지 않아도 아름다운 비엔나의 풍경이 달리 보일 거야.
18세기말 서양 음악사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은 바로 비엔나야. 당시 모든 서양 음악가들의 꿈이자 희망이었지. 그 자체로써 서양음악의 역사를 써 내려갔던 곳이며, 현재도 그 유명세와 역사는 이어져오고 있어.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년 1월 27일~1791년 12월 5일),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년 12월 17일~1827년 3월 26일)' 그리고 '하이든(Franz Joseph Haydn, 1732년 3월 31일~1809년 5월 31일)'. 이 세 명의 위대한 음악가들이 1780~1790년대까지 비엔나에서 과연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안다면 서양 음악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거야. 셋 중 가장 연장자인 하이든은 귀족의 신하이자 후원을 받는, 당시 사회적으로 중간 계급인 음악가로서의 전형적인 삶을 살았어. 거의 30여 년 동안 헝가리의 에스테르하지 가문 한 곳에 고용되어 충실한 음악활동을 하며 낙천적인고 온화한 성격으로 사람들에게 사랑받았지. 베토벤이나 모차르트에 비해서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음악가들과 비교해도 상당히 오래 산 편이어서 인지 나이가 들어서는 사람들에게 'papa'라는 애칭으로 불렸어. 24살 차이의 모차르트와 하이든은 스승과 제자 관계를 유지하며 음악계에서 활동했어. 성격적으로 유별난 데가 있었고, 신동소리를 들으며 아주 어릴 적부터 전 유럽의 주목을 받았던 모차르트이긴 하지만 이런 모차르트도 하이든에게만은 존경심을 보여주었다고 해. 모차르트 역시 하이든을 'papa'라 부르며 따랐다고 해. 노베르트 엘리아스의 저서 <모차르트>를 보면 당대 대표적인 작곡가였던 하이든은 모차르트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고, 어린 모차르트를 깊이 경탄했다고 해. 이런 하이든에게서 모차르트는 음악을 비롯한 많은 것들을 배웠으며, 두 사람의 친분은 그 이후로도 계속 이어졌지.
1781년 봄, 하이든 보다 38살 어리고, 모차르트보다 14살 어린 한 소년이 비엔나를 방문했어. 6살에 이미 각국 귀족의 초청을 받아 연주여행을 떠날 정도로 유럽 전체에서 유명했던 모차르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지 몰라도, 이 소년 역시 모차르트처럼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두각을 나타내며 제2의 모차르트라는 수식어를 받을 정도였어. 여러 가지 의견들이 많지만, 이 당시 모차르트는 이 무명의 소년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해.
"우리는 이 젊은이를 주목해야 한다. 그는 이 세상에 이름을 떨칠 것이다."
바로 베토벤이야. 천재 모차르트에게서 찬사를 받은 베토벤 그리고 그들의 스승 하이든이 작곡과 무대 활동을 이어갔던 곳이 바로 비엔나였던 거야.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만남은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어. 건강이 좋지 않던 어머니와 동생들을 돌보기 위해 비엔나를 떠날 수밖에 없었고, 1792년 되어서야 다시 비엔나로 돌아올 수 있었기 때문이지. 모차르트는 베토벤이 비엔나로 돌아오기 1년 전 사망했고, 런던에 있던 하이든은 몇 개 월이 지나고서야 그의 사망 소식을 들었어. 사망하기 직전 겨우 한두 달 동안 모차르트는 세 개의 작품을 더 완성했고, 35년 동안 630곡이 넘는 음악을 우리에게 남겼어. 이것은 80년을 산 하이든과 60년을 산 베토벤의 작품번호를 모두 합한 것과 비슷한 작품수야.
1792년은 프랑스가 시민 대혁명을 이뤄내었고, 무명의 나폴레옹이 등장한 시기이며, 미국에서는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조지 워싱턴이 미국을 건국했던 중요한 해야. 나중에 프랑스에 가면 나폴레옹에 대해서, 미국에 가면 조지 워싱턴에 대해서도 설명해 줄게.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건과 인물들이니까 나중에도 같이 떠올려보면 아주 재미날 거야. 같은 해 전 유럽에 걸쳐 최고 평판을 유지하던 하이든도 비엔나로 다시 돌아와 베토벤에게 가르침을 주기 시작했어. 모차르트와 베토벤보다 가장 길게 살았던 하이든은 모차르트의 친구로서 그리고 베토벤의 스승으로 두 사람에게 큰 영향을 끼쳤어. 하이든은 성격적으로도 부드럽고 온화했고, 세계관적으로도 비교적 평범했지.
천재들이 그러하듯 모차르트와 베토벤은 유별난 점들이 많았고, 하이든과 달리 유별났던 두 사람의 인생과 말년은 평탄치 못했어. 귀족사회인데도 불구하고 예술가의 지위변화와 자유를 갈망하던 궁정사회의 시민음악가였던 천재 모차르트는 어쩌면 세상과의 충돌은 불가피했던 거였을지 몰라. 베토벤은 어땠을까? 모차르트와 반대로 베토벤은 그 누구보다도 운이 좋은 사람이었던 것 같아. 비록 어린 시절 제2의 모차르트를 만들어보겠다는 무능한 아버지의 욕심에 현대사회에서 말하는 학대 수준의 음악 교육과 연습을 받으며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행운아였어. 그가 살았던 시대는 시민혁명의 시대였거든. 그토록 모차르트를 괴롭혔던 궁정사회는 몰락해 버렸고, 더 이상 베토벤에게 그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어. 혁명의 흥분과 변화의 강력한 기운이 베토벤을 더 위로 끌어올려 주었고, 자신만의 완전한 세계관과 성격에 맞는 삶을 이어져갔고 음악 또한 그의 의지대로 만들어냈어. 혁명을 이뤄내었던 시민사회가 가진 최고의 희망이 베토벤의 음악에는 오롯이 담기게 되었고, 그로 인해 지금까지 그 어떤 음악가도 베토벤을 넘볼 수 없는 절대적인 영광을 가져다주게 된 것이지.
: 모차르트 사후 78년이 되는 1869년 애 개관한 국립 오페라 극장은 파리의 가르니에 오페라하우스,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과 함께 유럽 3대 오페라 극장으로 불려. 이 극장이 처음으로 문을 열면서 올린 공연이 바로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인데 당시 공연에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와 엘리자베트 황후도 참석했었던 곳이야. 1년 365일 높은 수준의 오페라를 감상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한데 아주 재미난 이야기가 있어. 들어볼래?
'도시의 확장을 위해 성벽을 허문자리에 새로운 도로를 만들고 공공 건축물을 세워라'. 1857년에 합스부르크 제국의 프란츠 오제프 1세 황제가 명령을 내린 거야. 예전부터 500년 동안이나 비엔나를 지켜주던 성벽을 무너뜨리고 새로 길을 냈는데 이 길이 바로 링 슈트라쎄(링 순환도로)라고 부르는 길이야. 이 길 위에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위용을 널리 알릴 수 있는 건물들이 필요했는데, 공모전을 열어서 유명한 건축사들이 엄청나게 지원을 했다고 해. 당시 40대 후반의 오스트리아 출신 건축가 늴과 시카르드스부르크는 함께 공모전에 작품을 냈어. 한 살 차이인 두 사람은 오랫동안 같이 일을 해온 사이였는데, 비엔나에서는 호흡이 잘 맞는 건축 가였다고 해. 두 사람의 설계안은 1등을 차지했고, 전문가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어. 그런데 요제프 황제의 생각은 달랐던 것 같아. 노골적으로 비난을 했거든. 신문과 여론에서도 시작부터 절반의 실패라느니라며 설계안을 물고 늘어졌고, 더군다나 릴 슈트라쎄가 여러 가지 이유로 1미터 높아지면서 결과적으로는 오페라하우스는 1미터가 낮아지게 되면서 한 신문은 오페라 하우스를 '가라앉은 보물상자'라고 조롱하기도 했어. 괜히 공모전에 뛰어들어 지금까지 쌓아 올린 명성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릴까 항상 노심초사 걱정하고 괴로워하던 뉠은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말아. 공사를 진행하고 있던 1868년 스스로 집에서 생을 마감하지. 내성적이었던 황제는 소식을 듣고는 큰 충격을 받았어. 이후 황제는 모든 천재 예술가들을 평가할 때 절대로 비판을 하지 않았다고 해. 대신 늘 "정말 훌륭한 작품이야 마음에 쏙 드는 군." 이런 식으로 평가했어. 그런데 비극은 여기서 끝난 게 아니야. 시카르드스부르크 또한 그의 동료의 죽음 소식으로 괴로워하다 불치병에 가까웠던 결핵으로 인해 두 달 뒤 세상을 뜨고 말았어. 두 사람이 모두 죽고 나서 오페라 하우스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는 쏙 들어갔지. 오페라 하우스 공사는 계속 진행되었고, 1869년 5월 결국 완공이 되었어.
: 첸트랄프리트호프는 아늑하고 평화로운 산책길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아름다운 세계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공동묘지야. 이곳에 음악가들의 묘역에는 모차르트와 베토벤, 슈베르트, 브람스, 요한 슈트라우스 등의 묘지가 모여있지. 어둡고 적막한 분위기의 묘지와 달리 이곳은 숲으로 우거진 묘역 사이를 달리기를 하거나 산책하는 사람들 또는 책을 읽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어. 특히 고인들의 사진과 묘비명이 새겨진 스타일이 마치 야외 미술관을 방문한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곳이기도 해. 위에서 말했던 모차르트와 베토벤이 함께 잠들어 있는 곳으로도 유명해. 슈베르트라는 음악가를 포함해 세계 3대 거장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곳이지. 우람한 나무들을 배경으로 악보를 들고 있는 여자를 형상화한 모차르트 기념비가 중앙에 서 있고, 그 뒤 왼쪽에는 베토벤의 묘가, 오른쪽에는 슈베르트의 묘가 자리 잡고 있어. 그런데 사실 모차르트의 묘는 이곳에 없어. 죽을 당시 전염병으로 사망한 모차르트는 여러 사람과 함께 매장되는 바람에 정확한 묘지를 알지 못해서 기념비를 대신 세웠어. 평생 동안 베토벤을 흠모했던 슈베르트는 베토벤 옆에 자신을 묻어 달라는 유언을 했을 정도로 각별한 사이였었어. 이들 세 사람의 묘지 옆에는 '왈츠의 제왕' 요한 슈트라우스 2세와 브람스의 묘가 나란히 들어서 있어. 우주도 잘 알지? 우주가 잘 때마다 아빠가 틀어주던 자장가 있잖아. 그게 바로 브람스라고 하는 할아버지가 만든 곡인데 그 할아버지도 이곳에 잠들어 계셔. 천천히 유명한 예술가들의 묘지를 둘러보며 그들이 남긴 황홀한 선율을 듣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거야. 단순한 삶의 안식처인 묘지가 아닌 시민들의 쉼터이자 명소가 된 묘지에서 아마 몇백 년 전의 음악이 들려오는 것 같지 않아?
: 베토벤은 비엔나에서 35년을 살며 80회 넘게 이사를 한 것으로 유명해. 예민하고 민감한 그에게 있어서 음악에 대한 몰입과 집중을 방해하는 모든 것들은 배척의 대상이었을 거야. 천재들이 괴팍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아마도 이 예민함 때문이겠지. 집주인과 갈등이 잦았던 베토벤은 어쩔 수 없이 이사를 자주 다닐 수밖에 없었고, 한 지역에 오래 정착할 수 없었어. 현재 비엔나에서는 수많은 곳에서 그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데, 그나마 당시 베토벤이 오래 거주했던 곳 중 가장 유명한 곳이 바로 파스콸라티 하우스야. 그가 유일하게 3번이나 살다가 간집이 바로후원자였던 파스콸라티 남작의 집 꼭대기층이지. 아까 말한 대로 이 집의 이름은 파스콸라티 하우스야. 베토벤 하우스가 아니고 파스콸라티 하우스라며 물어보겠지. 그래, 베토벤이 살았던 다른 곳의 이름은 전원교향곡의 집 또는 에로이카의 집 등으로 표기했지만 이 집만큼은 베토벤이 아닌 후원자였던 파스콸라티 남작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어. 위대한 음악가를 알아보고 아낌없이 뒷바라지했던 그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남작의 이름을 붙인 채 남아 있는 셈이지. 심지어 그는 베토벤이 원하는 대부분을 들어주었고, 언제나 깍듯하게 예의를 갖추며 시종일관 친절하게 대했다고 해.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을 때에도 언제든 돌아오고 싶을 때 다시 돌아오라며 다른 사람에게 세를 주지 않고 비워둘 정도였다니 베토벤을 향한 그의 사랑과 존경이 느껴지지 않니? 1800년대 초반 11년간 살던 이곳은 현재 베토벤 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중이야. 이사 다닌 80여 곳을 모두 다 가 볼 수 없는 노릇이니, 그의 흔적이 궁금하다면 그가 살았던 맨 꼭대기층까지 가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나머지층은 모두 일반 시민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꼭대기층만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어. 악상을 떠올리며 오르고 내렸던 계단의 오래된 난간을 보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아빠는 마음이 뭉클해지기도 하더라고. 재능만을 소유했던 그와 어울릴 만큼이나 공허한 느낌의 박물관은 베토벤이 숨진 침대와 유서가 있는 걸로 유명해. 교향곡 4,5,7,8번(5번 교향곡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운명 교향곡이다)과 우리에게 익숙한 멜로디의 '엘리제를 위하여'등을 작곡했던 피아노와 몇몇 그림들과 악보, 흉상, 유서가 전시되어 있지.
: 하일리겐슈타트는 성자의 도시라는 뜻이야. 옛날 이곳에는 비엔나 상류층들이 더위를 식히러 오던 곳이었어. 1780년대 광천수가 발견되면서 휴양지로 더욱 각광받았지. 그 당시 비엔나 도심에서 마차로 한 시간 반 걸리던 곳이 지금은 지하철과 버스고 20분 정도면 갈 수 있는 곳이 되었지. 딱딱한 도심과 달리 높은 언덕에 펼쳐진 포도밭과 전원적인 분위기가 너무 아름다운 곳이야. 하일리겐슈타트에는 베토벤이 머물렀던 몇몇의 집이 있는데, 이 집 중 프로부스가세(Probusgasse) 6번지에 있는 집이 현재 베토벤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어. 이곳에서 유서를 썼던 곳으로 유명한데 1802년 그가 32살 혈기왕성한 청년이었다니 너무 가슴 아프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서 받은 마음의 상처에다가 음악가에게는 치명적인 귓병의 악화로 인해 그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극도히 쇠약해지고 말았어. 암울하고 어두운 나날을 보낸 던 어느 가을날, 곧 죽음을 맞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동생 앞으로 유서를 썼던 거야. 자기가 죽기 전에는 절대 개봉하지 말라고 했던 이 유서는 그가 세상을 떠난 다음날 1827년 3월 27일에 발견되었어. 유서를 쓴 후 4년이 지난 1806년 그는 교향곡 5번(운명)을 쓰던 도중 교향곡 6번을 구상하고는 본격적으로 스케치를 시작했어. 2년 뒤 1808년 6월 교향곡 6번을 완성해 '전원생활의 회상'이라는 제목을 붙였지. 하일리겐슈타트의 숲길을 산책하면서 즐거우면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이 교향곡을 썼을 거야. 비록 죽음을 기다리며 조마조마했을지언정 그는 이 교향곡에서만큼은 삶의 희망과 기쁨을 자연에 녹여내며 폭풍우가 지난 후 밝게 빛나는 태양처럼 표현해 냈어. 육신은 사라져도 작품은 남는다는 것을 이해한 것처럼 초연한 그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 같아.
: 마이너 암 파르플라츠는 유서의 집 근처가 있는 마치 보졸레 누보처럼 햇와인을 파는 선술집 이름이야. 그런 선술집들을 호이리게(Heuriger)라고 부르고, 햇와인 또한 호이리게(Heuriger)라고 불러. 세계에서 유일하게 수도에 와이너리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유명해. 18세기까지는 자기들이 생산한 와인을 마음대로 팔거나 마실 수 없었던 어두운 역사가 있는데 농민들의 불만이 높아지자 당시 황제 요제프 2세가 허락하여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호이리게(Heuriger)라는 독특한 문화를 꽃피우게 된 거지. 이곳은 4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고, 40ha에서 다양한 종류의 와인을 생산하고 있어. 특히 1600년대 초반부터 사용해 왔던 참나무로 마는 양조설비시설을 아직까지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아주 유명하지. 무엇보다도 베토벤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인 교향곡 9번 합창을 작곡한 것으로 더욱 유명하지. 호이리게와는 다른 이야기이긴 한데, 베토벤이 세상을 뜬 후 부검을 진행했었어. 간이 심하게 손상되었고, 머리카락을 분석했더니 납 성분이 과다하게 검출되었다고 해. 베토벤이 살던 18~19세기에는 와인에 단맛을 내기 위해 아세트산납을 첨가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와인을 자주 먹던 베토벤의 몸에서 납성분이 검출이 된 건 어쩌면 당연한 거였는지도 몰라. 고통의 나날을 살아나가던 그에게 통증을 진정시키는 방법으로는 와인이 큰 도움을 주었고, 실제 의사도 와인을 처방한 의사도 있었다고 해. 나중에는 와인을 가리지 않고 마셨을 뿐 아니라 너무 많이 마신 탓에 부작용이 엄청났어. 수많은 걸작을 작곡하는 가운데 베토벤은 줄곧 고통과 싸워야 했지. 세상을 뜨기 전 뤼데스하임 와인을 부탁했지만 불행하게도 그의 죽음이 임박해서야 도착을 했어. 비서 쉰들러가 와인병마개를 열고 숟가락으로 혼미한 의식인 그의 입에 와인을 흘려 넣었지만 와인은 베토벤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지. 괴테가 이곳의 와인을 마시고는 입술을 통해 혀 끝으로 전달되는 순간은 사랑하는 여인과의 첫 키스만큼이나 감미로웠다고 극찬한 와인이었지만, 그는 결국 마시지 못하고 눈을 감았데. 고통을 잊기 위해 마실 수밖에 없던, 그러나 역으로 그의 건강을 더욱 악화하게 만들었던 와인. 어찌 베토벤의 고뇌를 이해할 수 있겠냐만은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만 마실 수 있는 이 햇와인을 마시며 그의 번뇌와 고통 그리고 대업을 향한 의지를 곱씹으며 아빠는 한 잔 마셔야겠다. 아, 우주는 조금 더 크고 나서 아빠랑 같이 마셔보자 알겠지?
: 우리가 흔하게 일상생활에서 들어본 음악이지만 누가 만든 것인지, 제목은 무엇인지 모르는 곡들 중 아마 가장 유명한 곡이 아닐까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곡이 바로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라는 곡이야. 아마도 대부분은 듣고 따라서 흥얼거리는 것이 가능할 정도로 널리 알려진 곡이 아닐까 싶어. 얼마 전 크게 인기를 끌었던 '오징어 게임'에서도 그들이 게임을 하러 나갈 때, 그리고 게임을 마친 후 이 음악이 흘러나왔지. 얼핏 보면 사람의 생사가 걸린 게임에서 이런 아름다운 왈츠 음악이 흘러나오다니 의아하겠지만, 배경을 알고 보면 고개가 끄덕여질 거야. 이 곡은 1866년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단 7주 만에 패하고 만 데서 시작해. 예상치 못한 패배로 인해 국민들은 큰 충격에 빠지게 되지. 이제 왈츠의 왕이라 불리던 요한 슈트라우스 2 세는 이러한 사회의 공포스러운 분위기와 우울함을 극복시키기 위해 이 음악을 작곡했어. 끔찍한 전쟁 이후의 현실에 좌절하고 있을 국민들에게 살아나아가야 할 힘을 주고 싶었던 거겠지. 죽은 자들에 대해 더 이상 죄책감을 느끼지 말고 괴로워하지 말고 힘을 내서 다시 일어나자 독려한 셈이야. 이후 열린 파리의 만국박람회에서 오케스트라 편곡으로 선보이면서 엄청난 인기를 누리게 되었고, 명실공히 오스트리아를 상징하는 음악으로써 빛나고 있어.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그렇게 굳건히 흐르는 강물을 보며 힘을 얻고 열심히 살아가야 할 이유를 찾았던 것 같아. 해마다 송년과 신년이 되면 전 세계에서 많은 음악회가 개최되는데, 그중에서도 오스트리아의 빈 음악회가 으뜸으로 인정받아.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신년음악회는 항상 오스트리아의 자랑인 왈츠 리듬의 음악이 여러 곡 연주되는데 그 가운게 가장 중심이 되는 곳은 언제나 이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란다. 도나우 강이 비엔나 그리고 오스트리아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 인지 조금 알겠지?
도나우 인젤은 도나우 강을 가장 가까이 지켜보며 산책, 수영 등을 할 수 있는 20킬로미터가 안 되는 작음 섬 같은 곳이야. 특히 어린아이와 함께 여행하는 분들은 가족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그런 곳이지. 물놀이터도 있고, 시원한 나무 그늘아래에서 도나우 강을 바라보며 마시는 시원한 맥주 한잔도 할 수 있는 그런 편안한 공간이야.
6월에는 3일 동안 무려 3백만 명 이 모인다는 세계최고의 음악 축제 중 하나인 도나우인젤페스트(Donauinselfest)도 열리니 한 번쯤은 가봐도 좋을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