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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미니꾸 Sep 11. 2023

오스트리아, 비엔나 2편

미술과 함께 하는 비엔나 투어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


                                                      (Der Zeit ihre Kunst, Der Kunst ihre Freiheit)'






 여전히 시차 적응에 힘든 우리 우주. 재미도 없는 여행 따라다니느냐 고생이 많아. 그래도 나중에는 이런 여행이 더 기억에 남을 거라고 아빠는 생각해. 놀이터도 갈 거고, 놀이공원도 갈 거고, 우주가 좋아하는 전망대도 갈 거니까 조금만 참아 줄래? 그래도 이번 여행은 우주가 좋아할 만한 여행이야. 바로 미술 여행이거든.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는 우리 우주한테 비엔나에서 활동했던 유명한 미술작가들의 그림도 구경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도 들려줄 테니깐 힘내서 출발해 볼까?



황금의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 관능을 담은 선 에곤 쉴레.

독창적인 화풍으로 이목을 집중시키는 두 화가는  중요한 공통점이 하나 있어. 둘 다 19세기말 오스트리아에서 활동한 예술가라는 점이야. 사실 이 시기에 오스트리아에는 정말 독특한 예술가들이 많아. 현대 음악의 시초라 불리는 쇤베르크, 현대 건축의 선구자라 불리는 오토 바그너 등 독창적인 자신만의 세계를 펼쳐 보인 예술가들이 바로 이 시기 오스트리아에 활동했어. 이처럼 19세기말 오스트리아의 예술은 아주 독창적인 세계를 구축하고 있어. 19세기말 오스트리아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오스트리아는 유럽의 한가운데 위치해 있어. 이러한 위치적 특성이 독특한 문화를 형성했던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아. 북부의 게르만 문화권, 남부의 지중해 문화권, 그리고 동유럽 문화권을 모두 흡수했기 때문이야.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는 과거부터 대도시였어. 19세기 무렵에는 수만 명 정도의 인구가 평균이던 유럽의 다른 도시들과 달리 이미 10만 명이 넘는 인구가 살정도였어. 이러한 비엔나를 세계적인 문화 도시로 격상시킨 것은 19세기 중반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야. 지난 음악 이야기에서도 아빠가 설명해 주셨던 분인데 우리나라의 세종대왕과 같은 분이라고 생각하면 될 거야. 많은 건축가들과 함께 콘서트홀, 국립 오페라 하우스, 비엔나 미술 아카데미 등 문화의 중심이 되는 기관과 시설들을 만들었어. 이에 따라 도시의 명성이 세계적으로 더욱 강하게 뻗어나가기 시작했어. 그러면서 기회를 꿈꾸는 유럽 전체의 수많은 인재들이 비엔나로 몰려들게 된 거지.  계급과 민족, 인종이 마구 섰여들었고, 그 안에서 새로운 문화의 씨앗이 심어지고 발전하게 된 거지. 또한 19세기 중후반은 유럽 전역에 새로움을 추구하는 바람이 불던 시기였어. 프랑스혁명 이후 유럽 전역에서는 자유주의의 바람이 불었고 이는 기존의 권위에 대한 의문들을 낳게 되었어. 기존의 질서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려는 탈 전통운동이 일어났어. 정치 사회적인 변화뿐만 아니라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이러한 바람은 일어나게 되었지. 이 시기에 새롭게 등장한 부르주아들은 새로움과 자신의 부를 내보이기 위해서 화려한 건축물을 활용했어. 그 결과 '아르누보' 양식이 탄생하게 된 거지. '아르누보'는 프랑스어로 '새로운 예술'을 의미해. 당시 고전적인 방식을 추구하던 건축방식에서 벗어나 자연의 미를 건축에 담고자 한 움직인이데, 자연의 곡선과 유려함을 담은 아르누보 양식은 이전과 달랐기 때문에 눈에 싑게 띄었지. 자신의 부를 뽐내고 싶었던 신흥 부르주아들은 이 방식을 애용했고, 유럽사회 전역에 유행하기 시작하지. 현대 건축의 선구자라 불리는 오토 바그너는 이러한 흐름을 받아들여 비엔나에 자신만의 건축물을 만들었어. 지금도 비엔나에선 그의 수많은 건축물들을 만나볼 수 있는데,  그중에서 마욜리카 하우스라는 건물을 보면 알 거야. 아르누보 특유의 장식과 건축양식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거야. 이후 건축중심이었던 아르누보 양식은 공예, 조각, 미술 등 다양한 분야에도 영향을 미치게 돼.


 19세기말 오스트리아 예술을 대표하는 구스타프 클림트도 이 아르누보 양식을 접목한 대표적인 화가야. 그는 당시 아르누보 스타일에서 유행하던 황금색과 곡선을 주로 사용해 화려한 작품들을 남겨. 특히나 입체적인 느낌을 추구하던 기존의 회화 양식과는 다르게 그림 속 대상들이 더 평면적으로 보일 수 있도록 형태와 구성을 고민했어. 거기에 인물의 표정과 포즈에는 특유의 관능미를 더하기도 했지. 유럽 사회에서 유행한 아르누보 양식에 더해 자신만의 색을 더한 클림트의 도전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볼 수 없는 독특한 그림들을 만들었어. 비엔나의 대표적인 건축물 중 하나인 벨베데레 궁전은 세계 최대의 클림트 컬렉션을 보유하고 있어. 이곳에선 오스트리아 미술 사상 최고의 걸작으로 불리는 클림트의 '키스'를 만나볼 수 있어. 반짝이는 금장식과 휘어지듯 어우러진 두 남녀. 입체와 평면을 오가는 클림트만의 독특한 화풍은 이 작품을 많은 사람들에게 각인시키고도 남았어. 지금도 수많은 관광객이 이 작품을 만나기 위해 비엔나의 벨베데레 궁전을 찾고 있어. 클림트는 또한 자신의 유려한 곡선과 반짝이는 색감을 표현하기 위해 자연 풍경을 자주 그린 것으로도 알려져 있어. 1912년에 만들어진 장미정원은 클림트의 가장 유명한 풍경화인데, 세밀하게 묘사된 풀밭과 그 안에 피어오른 장미의 모습을 클림트의 스타일을 통해 만나볼 수 있지. 그림 속 공간은 클림트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실제로 지냈던 빌라의 정원이라고 해. 클림트는 정원의 매력에 푹 빠져 매년 식물을 옮겨 심고 정성으로 가꾸었어. 비엔나의 클림트 빌라는 현재 박물관으로 탈바꿈하여 유럽 문화유산으로 선정되었는데 , 다수의 원예전문가들이 모여 클림트의 작품 속 아름다운 정원을 가꾸고 있다고 해. 관능적인 선으로 유명한 에곤 쉴레 역시 비엔나가 낳은 예술가 중 한 명인데, 배경 없이 인물만 강조하여 관능적인 형태를 표현하는 그는 비엔나에서 클림트를 만나 후 돈독한 관계를 쌓았어. 이후 보수적인 예술에 반발하고 지인들과 새로운 예술가 그룹을 결성해 리더 역할을 하기도 했어. 이 당시 오스트리아에선 사상이 비슷한 예술가들끼리 모여 그룹을 결성하는 게 흔했는데, 오스트리아 비엔나에는 600여 개가 넘는 카페가 있었고, 누구나 쉽게 대화할 수 있는 환경이었기 때문이야. 서로 다른 사람과의 대화는 항상 영감이 되었고, 때문에 예술가들은 매번 새로운 것을 꿈꿀 수 있었던 거야. 에곤 쉴레는 누드화가 금기시되던 당대 분위기에 반항이라도 하듯 생생하고 개성적인 에로티시즘을 그렸어. 거칠고 황폐하면서 고독함이 느껴지는 그의 거친 선은 그만의 개성을 드러내게 돼. 그는 수많은 누드화와 자화상을 남겼는데, 특히나 그의 거칠고 불안한 기운의 자화상은 많은 이들의 영감이 되었어. 항상 단정하게 다녔던 스스로의 모습과 다르게 자화상 속 쉴레는 벗겨지고 뒤틀려 있는데, 그는 자화상을 통해 아름다움을 보여주기보다는 본연의 감정과 모습을 표현하려 노력했어. 그의 또 다른 대표작인 <죽음과 소녀>는 그의 연인이자 모델인 발리와의 이별 후 그린 그림인데, 내면의 격렬한 감정을 강한 선으로 표현한 것이 특징이야. 그의 이러한 솔직하고 직설적인 그림은 당시 수많은 비판과 비난을 맞기도 했어. 하지만 그의 실험적인 도전에 공감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 결과 자신과 비슷하게 실험을 추구하는 예술가들을 만났고 그룹을 결성해 작품 활동을 지속해 나갔어.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현대미술관인 레오폴트 미술관에서는 에곤 쉴레의 관능적인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어.  레오폴트 미술관은 세계 최대의 에곤 쉴레 컬렉션을 자랑하는데, 자신만의 표현을 찾기 위해 노력했던 그의 예술 철학처럼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그만의 그림 세계를 만나볼 수 있어.


오스트리아 비엔나는 오래전부터 구축해 온 문화적 유산과 다양한 문화권의 융합, 또한 유연한 사고와 교류가 가능했던 환경을 통해 이전에는 보기 어려웠던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만들었어. 실제로 19세기 말을 시작으로 오스트리아의 각 분야에의 실험적인 혁명가들이 등장했어. 클림트 에곤 쉴레 같은 화가뿐만 아니라 현대음악의 창시자 쇤베르크, 철학자 비트겐슈타인, 정신의학의 프로이트까지. 그들의 실험적인 도전은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의 영감이 되고 있어. 여전히 이곳 비엔나에선 각 분야의 혁명가들이 남긴 흔적들을 만나볼 수 있어. 변화와 혁명을 이끌었던 비엔나. 그 안에서 펼쳐진 독창적인 작품 세계 중에서 오늘은 미술작품들과 예술가들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해.  








구스타프 클림트

 우주는 클림트 아저씨가 누군지는 몰라도 이 그림에 대해서는 잘 알 거야. 우리 집 냉장고에 붙어 있는 황금색으로 된 남자와 여자가 키스하는 그림 말이야. 이 그림을 그린 아저씨가 바로 클림트라고 하는 아저씨야. 아빠는 예전에 존 말코비치 아저씨가 주연이었던 클림트라는 영화와 클림트의 그림 속 주인공이었던 아들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화의 작품에 얽힌 우먼 인 골드라는 작품에서알게 되었어. 그는 어려서부터 우주처럼 미술을 좋아했데, 그런데 집안 형편이 간난 한 탓이 미술을 제대로 배울 수 없었다고 해. 다행히도 주변사람들의 추천과 도움으로 비엔나 응용미술학교에서 회화와 수공예적인 장식 교육을 받을 수 있었어. 졸업 한 이후에는 동생과 함께 공공건물에 벽화를 그리는 일을 했는데, 이게 그의 인생의 전환기였던 셈이야. 바로 부르크 극장을 장식하는 작업을 맡게 되었는데, 이 작업으로 그는 요제프 국왕에게 특별 격려상인 황금 공로 십자 훈장을 받게 되었어. 그때부터 비엔나의 유명인사가 되었고 오스트리아뿐 아니라 루마니아 왕궁의 벽, 체코슬로바키아의 온천 천장화까지 주문을 의뢰받게 돼.


그러다 동생이 죽고 그 충격으로 그는 정신공황에 빠져버렸어. 1895년 그가 다시 붓을 들기 시작했을 때 그의 화풍은 180도 달라져있었어. 인상파와 상징주의 등 다양한 아방가르트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 거야. 보수적인 미술 단체를 벗어나 '빈 분리파'를 결성해 초대 회장으로 추대되었지. 빈 분리파는 이따가 제체시온을 설명하면서 다시 하겠지만, 라티어구 '성스러운 산에서 평민의 분리'에서 유래했어. 에곤 쉴레, 오스카 코코슈카, 칼 몰, 오토 바그너 등 당대 오스트리아를 선도한 화가, 디자이너, 건축가들이 빈 분리파에 참여했어. 분리파 활동을 하면서 대성골을 거둔 돈으로 지은 건물이 바로 제체시온이라는 건물이고 이 건물은 건축가 요제프 마리아 올브리히가 만들었고 오늘날까지고 빈의 문화적 상징물이 되었지.


1905년 그는 화풍의 외설성으로 인해 인기가 식어갔고, 분리파 안에서도 지지를 잃으며 분리파를 탈퇴해. 오히려 그 이후 그는 자기만의 색이 담긴 작품들을 만들 수 있었어. 누군가와도 어울리는 것도 타협하는 것도 원치 않던 그는 에로틱, 강렬한 상징주의, 창조적인 예술세계에 몰두하면서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해 나가기 시작해. 이탈리아 라벤나의 모자이크와 장식적인 패턴, 금을 사용해 눈에 띄는 독창적인 양식을 발전시켜 나가지. '키스',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 '다나에', '아담과 이브' 등 황금 시기의 대작들도 이때 완성이 되지. 갑자기 56세 때 뇌출혈로 인해 그해 2월 합병증으로 조용히 숨을 거두었고, 그의 사후 50년 후부터 재평가되기 시작하면서 언제부턴가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화가로 손꼽히게 되었어.






에곤 쉴레

 클림트와 떼어 놓을 수 없는 인연의 화가이자, 클림트만큼이나 현대 미술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화가 중 한 명인 에곤 쉴레. 초기에는 스승 클림트의 영향으로 화려하고 장식적인 양식을 선호했지만, 점차 에로티시즘을 주제로 인간을 거칠게 표현하는 독자적인 스타일을 만들어갔어.  그가 살던 시절의 오스트리아 비엔나는 유럽 최고의 환락가였어. 그러나 비엔나는 표면적으로는 아직도 성(性)에 관해서는 아직 보수적이었지. 더군다나 여성의 성은 금기사항이었는데, 그는 성이 인간의 본질을 가장 솔직하게 드러낼 도구라고 여겨서 과감하게도 작품의 주제를 성으로 선택했다고 해. 조금 어려운 이야기지? 우주가 조금 더 나이가 들면 더 이해하기 쉬울 텐데, 그래도 최대한 이해하기 쉽게 아빠가 설명해 줄게.  쉴레는 남녀의 성기, 매춘부, 성직자 등 현대에서도 받아들이기 힘든 소재를 적나라한 묘사와 함께 거리낌 없이 누드로 그릴 수 있었어어. 하지만 누드 자체를 그렸다기보다는 사람의 본질을 관찰하고 예술을 탐구한 것이었어.


예를 들어 작품 중에 '서있는 벌거벗은 검은 머리의 소녀'라는 작품이 있어.

마른 체형과 신경질적인 인상은 이 소녀가 받는 사회적인 억압을, 자유분방한 생각을 하는 소녀의 표정은 사춘기 소녀가 느끼는 성적인 호기심이야. 당시 비엔나는 사회 부조리가 심각해서 빈곤층 소녀들이 매춘부가 되는 일이 허다했다고 해. 쉴레는 이러한 현실의 문제점을 알고 있었고, 소녀를 통해 문제점을 지적한 거야. 단순히 아름다운 자연의 풍경을 그리는 예술에서 사회문제나 본인의 생각을 그림에 투영하고자 했던 그들의 고민이 눈에 보이는 작품인 셈이지. 실제 그의 100여 점에 달하는 자화상은 자신의 욕망을 나타내고 있어. 넓은 배경에 뼈만 남은 듯 앙상하고 메마른 몸과 불안하면서도 날카로운 시선으로 표현된 자화상에서는 아빠는 왠지 모르게 서글픔이 느껴지더라고. 불안한 듯 떨리는 실루엣과 생채기 내듯 긁고 문질러 표현한 기법, 빨갛게 익은 꽈리의 강렬한 색채 등은 공포와 불안을 만들어내는 주범들인데, 불만과 불안감으로 가득 찬 눈으로 세상을 응시하는 모습이 일반적인 자화상들과는 전혀 다르게 보였어. 이런 어린 소녀들을 소재로 그림을 그리고 전시했다는 이유로 그는 24일 구류를 살기도 했지.


"아무리 에로틱한 작품도 그것이 예술적인 가치를 지니는 이상 외설은 아니다.

그것은 외설적인 감상자들에 의해 비로소 외설이 되는 것이다"라고 당당히 주장했어.



아까 클림트 아저씨 이야기 하면서 말했던 분리파 전시회에서 쉴레 또한 비로소 빈 화단에서 인정을 받기 시작했어. 상류층으로부터 초상화 의뢰가 들어왔고 그림 값은 하루가 다르게 상승했어. 목돈이 들어오자 쉴레는 답답한 아파트를 떠나 정원과 아틀리에가 달린 단독주택으로 이사했어. 드디어 쉴레의 성공 시대가 열리는 듯했어. 바로 이즈음 스페인 독감이 유행하기 시작해.  스페인 독감은 우주가 잘 알고 있는 코로나 같은 병인데, 이 병으로 엄청나게 많은 당시 사람들이 죽었다고 해. 아내가 먼저 스페인 독감에 걸렸고, 고통스러워하는 아내를 쉴레는 극진하게 간호했다고 해. 이때 어머니께 쓴 편지에서 그는 '9일 전 에디트가 스페인 독감을 앓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지금 임신 6개월인데, 상태는 아주 절망적이며 목숨도 위태롭습니다. 저는 지금 최악의 상태에 대비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고통에 겨운 가쁜 호흡이 계속되고 있습니다'라고 적었어. 결국 10월 27일 에디트는 눈을 감게 돼. 쉴레는 배 속의 아이와 함께 죽음의 문턱을 넘어서는 아내의 모습을 그냥 보고 있을 수 없었어. 검정 초크로 아내를 스케치했고 이것이 그의 마지막 유작이 되고 말아. 아내가 사망하고 며칠 뒤 이번에는 쉴레가 인플루엔자에 감염되. 독감에 걸린 지 하루 만에 28년 4개월로 천재 화가의 생애는 끝이 나고 말아. 그렇게 스페인 독감은 나흘 만에 세 생명을 앗아갔어.  에곤 쉴레가 10년만 더 살았더라면 아마 세계 미술사는 다시 쓰였을 거라고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이야기하고 있지.  





프리덴슈라이히 훈데르트바서


오스트리아 비엔나는 모차르트와 베토벤 같은 음악 거장들의 흔적으로 가득하지. 클림트와 에곤 쉴레의 흔적들도 거리에 넘쳐난단다. 하지만 아빠는 이 유명한 한 명의 건축가 덕분에 비엔나가 과거에만 머무르지 않고 현대와 공존할 수 있는 도시가 되었다고 생각해. 그의 이름은 프리덴슈라이히 훈데르트바서야.(이하 훈데르트바서) 이 아저씨는 1928년 비엔나에서 태어났는데 유대인인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고, 2차 세계대전 중 히틀러의 유대인 탄압을 직접 경험한 것으로 유명해. 이때의 경험은 그를 평화주의자로 만들었고, 지금의 이름인 프리덴슈라이히 훈데르트 바 서라는 이름도 그가 직접 지은 이름인데 독일어로 '평화롭고 풍요로운 곳에 흐르는 백개의 강'이라는 뜻이란다.  어려서부터 색채와 형태에 대한 남다른 감각을 가졌던 그는 전쟁이 끝난 뒤 비엔나 미술아카데미에 잠시 몸담기도 했지만, 이후에는 유럽 전 지역을 여행하며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했어. 그는 작업실을 따로 두지 않았고, 야외 레스토랑, 기차, 비행기 등 본인이 있는 곳이 바로 작업실일 정도였어. 종이와 캔버스는 물론 포장지, 천조각, 버려진 종이 등 그가 손을 대는 곳은 곧바로 하나의 예술 작품이 되어버렸지. 특히 그가 집착한 것은 나선 형태였는데, "시작과 끝이 정해져 있지 않고 끝없이 돌고 도는 나선은 우리의 삶과 가장 많이 닮아 있다"라고 말한 것처럼 생명과 죽음을 상징하는 형태이 인 나선 형태의 작품들이 많았어. 특히 그는 색채를 조합하는데 탁월한 감각이 있었고, 평론가들은 그를 '색채의 마술사'라고 불렀어.


 1983년 훈데르트바서는 1983년 비엔나 시의회가 의뢰한 공공주택 리모델링 작업에 착수하는데 이 건물이 그 유명한 훈데르트바서하우스야. 건축을 통해 지상낙원을 건설하고 싶었던 그가 가장 깨고 싶었던 고정관념은 '건축은 네모'라는 생각이었어. 지금 우리가 사는 집들만 해도 대부분이 사각형이잖아. 자연에는 직선이 없는 만큼 자연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연스러운 건축이 필요하다는 그의 철학이 훈데르트바서 하우스에는 녹여있는 셈이지. 52호의 주택과 5호의 상점, 어린이 놀이터 두 곳과 두 곳의 카페로 구성되어 있는데, 마지 놀이동산에서나 볼 법한 독특한 구조의 시설이 비엔나의 구도심 한 복판에 자리 잡게 된 거야. 색채의 마술사답게 알록달록 아름다운 색으로 가구마다 다른 색으로 입혀져 있고, 정원에는 무려 250여 종의 나무가 자라고 있어. 우주가 좋아하는 많은 디즈니 애니메이션 제작자들도 실제 애니메이션을 제작할 때 이 주택을 많이 참고했다고 해.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집이 바로 이 훈데르트바서 하우스 인 셈이지. 서민을 위한 싼 값의 임대주택이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갖게 된 셈이야. 흔히 집합주택, 공공주택이라면 누구나 통일화된 건축물들을 떠올리게 되잖아. 하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어. 사람들의 취향이 제각가인 것처럼, 집도 달라야 한다고 여겼어. 각자 다른 사람들이 어울려 조화로운 공동체를 이루는 것처럼 집도 각자 다른 모양이 하나의 아름다운 집합주택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 셈이지. 그리고 결국 그는 그 이상을 실현시켰어.



도시에 메마른 건축물들에게 생명을 불어넣고, 인간과 자연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공간으로 바꿔준 그를 '건축 피료사'라고 부르기도 해. 혹자들은 스페인 바르셀로나를 바꿔놓은 위대한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에 빗대어 훈데르트바서를 '오스트리아의 가우디라' 부르기도 해. 환경운동가로도 유명한 훈데르트바서는 지상의 낙원을 꿈꿨어.


  "파라다이스는 곁에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파괴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이 지구상에서 낙원을 실현하는 것이 얼마나 간단한 일인지 보여주고 싶다."

아빠랑 그린칭이라는 마을로 가는 기차 안에서 봤던 알라딘의 요술램프처럼 생긴 굴뚝 기억나? 그 굴뚝도 훈데르트바서 아저씨의 작품이야. 슈피텔라우 소각장이라고 부르는데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그 굴뚝을 양파라고 부른데. 환경운동가이기도 했던 훈데르트바서는 환경파괴라는 인식 때문에 쓰레기 소각장의 개조작업에 반감을 가지기도 했는데, 분리수거를 해도 소각장이 필요할뿐더러 첨단 기계를 이용하면 환경오염을 최소화할 수 있다고 판단해서 작업을 수락했다고 해. 이를 통해서 비엔나의 6만여 가구에 난방을 공급할 수 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었지. 이렇게 재 탄생한 슈피텔라우 쓰레기 소각장은 초현실주의 작품으로 변모했어. 외관이 뛰어남은 말할 것도 없고, 최첨단 기술을 사용해 분진이나 유해가스의 제거 기능도 있다고 해.

이 밖에도 쿤스트하우스 비엔나의 훈데르트바서 미술관에서도 그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어. 특히 화장실이 유명한데, 크기가 제각 기인 수많은 타일로 이루어진 내부 벽면과 부드러운 곡선으로 처리된 모서리 부분 등이 눈길을 끌지. 흰색을 기본으로 다양한 색깔의 타일을 이용해 흔히 사용하는 화장실이 아닌 색다른 공간으로 재탄생했어.

부정적인 이미지의 화장실, 쓰레기 소각장에 새로운 호흡을 불어넣어 존재의 의미를 되찾아준 거지. 그래서 그를 우리는 건축치료사, 건축의 의사라고 부르는 거야.








<제체시온 Secession>

비엔나의 카를플라츠 지하철 주변에는 제체시온(분리파) 홀(Secession)이라는 독특한 건물이 있어. 제체시온은 1897년 4월 3일 빈의 전시관인 퀸스틀러하우스(Künstlerhaus)의 보수주의 성향에 불만을 가진 예술가들이 퀸스틀러하우스를 탈퇴하면서 결성된 것이 빈 분리파야. 위에서 우리가 알아보았던 클림트, 에곤 쉴레 가 대표적이지. 회화, 조각, 공예, 건축 등의 여러 예술가들이 참가했고,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G. Klimt, 1862~1918)가 초대회장이었어. 이들의 활동 거점으로 삼기 위해 1898년, 당대의 유명 건축가인 오토 바그너(O. Wagner, 1841~1918)의 제자인 건축가 요제프 마리아 올브리히(Joseph Maria Olbrich, 1867~1908)가 설계한 전시관이 제체시온이라는 건물인 셈이지.


 전시관 입구에는 ‘시대에는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Der Zeit ihre Kunst, Der Kunst ihre Freiheit)이라는 표어를 내걸었어. 우주가 아빠한테 물어봤던 황금색으로 그려진 글씨가 바로 저 뜻이야. 1903년에는 건축가 요제프 호프만(Josef Hoffmann)이 빈 공방을 설립했지만 순수 예술을 지향했던 회원들은 빈 분리파에 대한 불만을 갖게 되는데, 1905년 구스타프 클림트 등이 탈퇴하면서 빈 분리파는 소멸되고 말지. 현재 이 건물의 지하에서는 클림트의 34m의 프레스코 벽화인 ‘베토벤 프리즈(Beethovenfries)’를 볼 수 있는 곳이지. 베토벤 9번 교향곡 마지막 악장인 ‘환희의 송가’를 표현한 것인데. 우주가 헤드폰으로 들었던 음악이 바로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고 음악을 들으며 봤던 그림이  베토벤 프리즈야. 제체시온 개막식 때,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 1860~1911)가 이끄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금관악기 주자들이 ‘환희의 송가’를 이 방에서 연주했다고 해. 말러 아저씨 이야기는 다음에 다시 해줄게. 클림트 아저씨와 그리고 많은 유명한 분들과 엮여있는 재미난 이야기가 많거든.




<카페 무제움 CAFE MUSEUM>


  17세기말 런던을 시작으로 파리, 베니스, 비엔나 등 유럽의 주요 도시에 커피하우스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어. 18세기말에 이르러서는 이 도시들마다 1000여 개가 넘는 커피하우스가 생겼다고 해. 초창기에는 커피를 주로 팔았고, 후에는 간단한 식사나 주류도 첨가되었어.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우리에게 세 곳의 카페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했어. 책이나 신문을 읽으며 혼자 시간을 보내는 카페, 친구나 지인을 만나는 카페, 그리고 연인과 가는 카페. 커피를 팔고 마시는 공간을 우리는 카페, 커피숍, 커피하우스 등으로 부르고 있지.


340년의 역사만큼 비엔나에는 유서 깊은 커피하우스가 즐비해. 작가들의 단골이던 카페 첸트랄(Cafe Central), 구스타브 클림트를 비롯한 예술가들의 아지트였던 카페 무제움(Cafe Museum), 초콜릿 케이크가 유명한 카페 자허(Cafe Sacher) 등이 대표적이야. 엄마랑 같이 갔던 그 카페는 자허라는 카페인데 우주가 아주 맛있게 먹었던 케이크가 바로 자허 토르테야. 케이크 안에는 살구 잼이 들어가고, 표면은 달콤하고 향긋한 초콜릿이 듬뿍 감싸고 있었지? 이 케이크를 처음 만든 곳이 자허 호텔이라고 해. 1815년 메테르니히 총리에게 특별한 디저트를 대접하고자 만든 것이 시작이야. 우주는 아직 커피맛을 잘 모르겠지만, 따뜻한 커피 한잔과 함께 먹는 자허 토르테는 정말이지 기가 막혀.


카페 센트럴에 가면 시인 알텐베르크를 형상화한 인형이 눈길을 끌어. 과거에 알텐베르크는 친구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편지봉투에 주소를 ‘센트럴’이라고 적었다고 해. 늘 그곳에서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그곳에서 편지를 받았다는 거야.  알텐베르크 뿐 아니라 당시에는 하루 종일 카페에서 원고를 쓰는 작가가 많아서 ‘카페 문학’이란 말까지 생겨났다고 해. 훗날 러시아 혁명가로 이름을 남긴 레프 트로츠키도 망명객 시절 카페 ‘그린슈타이틀’의 단골손님이었어. 기성체제에 반대하는 인사들이 주로 숨어 지낸 공간으로, 스탈린과 히틀러도 이곳에 자주 왔다고 해.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 비엔나의 지식공동체는 카페를 중심으로 돌아갔어. 설사 정치적 취향은 다르더라도 이들끼리는 서로 잘 알고 지냈다고 해. 토론과 대화가 오가는 소통의 집이 바로 카페였던 셈이지.


물론 자허 토르테와 아펠슈튜르델(사과 파이)도 안 먹어 볼 순 없겠지?





<레오폴트 미술관  Leopold Museum>

레오폴트 미술관에는 에곤 실레의 세계 최대 컬렉션을 비롯해 오스트리아 예술가들이 역사상 가장 활발하게 창작 활동을 꽃피운 오스트리아 미술사 황금기인 19세기말 ~ 20세기 초 시대의 세계 최대 규모의 컬렉션이 소장돼 있어. 미와 에로스를 대표하는 천재 화가 에곤 실레는 본인의 욕망과 고뇌에 집중해 누구보다 솔직한 예술을 표방했지. 1900년대, 누드화가 금기시되던 풍조에 반항하듯 실레는 다양한 누드화로 개성적이고 생생한 에로티시즘을 추구했어. 그의 예술적 관심의 중심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자화상이 반영된 자신의 존재에 대한 명상이 있었고 괴상한 몸짓과 표정으로 존재론적 질문을 육체와 '섹슈얼리티'의 조합으로 자기 성찰의 메시지를 전했지. 그는 작품을 통해 자신을 현자이자 투시자로, 현실과 진실에 대한 강렬한 감각을 가진 전달자로 표현했어. 레오폴트 미술관은 42점의 그림, 187점의 원본 그래픽(그림 및 컬러 시트), 수채화, 소묘, 판화, 수많은 실레의 글 등 세계 최대 에곤 실레 컬렉션을 소장하고 있어. 전시를 둘러보며 입장권에 인쇄된 실레의 주요 작품을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아직 우리 우주가 누드와 존재론적인 질문과 답을 이해하며 그림을 보기는 어렵겠지만, 한 번쯤은 가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미술관의 대표 명소 '카페 레오폴트'(Café Leopold)는 예술에 민감한 빈 힙스터들에게 유명한 곳이야. 작은 휴식처로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목재 인테리어로 따스한 분위기의 카페 내부, MQ를 조망하는 테라스 석을 비롯해 여름에는 MQ 정원 안에 테이블이 놓여 개방적인 분위기로 가벼운 식사나 주류를 즐길 수 있다. 또한, 레오폴트 미술관에 새롭게 떠오르는 핫 플레이스를 놓칠 수 없지. 2020년 가을, 약 25m 높이의 미술관 꼭대기에 600㎡ 공간의 루프탑 테라스 MQ 리벨레(MQ Libelle)가 문을 열었는데, 비엔나 시내부터 빈 숲까지 탁 트인 전망을 자랑해. 엄마가 좋아하는 예쁜 사진 찍기 좋아하는 곳이지. '리벨레'(Libelle)는 잠자리라는 뜻으로 테라스 곳곳 위치한 타원형의 감각적인 조명이 잠자리가 쉬어 가는 모양을 연상케 하지. 무료 이용이 가능한 테라스 공간은 화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개방된다고 해.





<쿤스트하우스 빈  &  훈데르트바서 하우스>

원래 1892년에 지어진 가구공장을 훈데르트바서의 디자인으로 리모델링해 1991년 오픈한 쿤스트하우스 빈은 그의 철학과 생태운동을 보여 주는 회화작품, 그래픽 아트, 건축, 태피스트리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어. 훈데르트바서 하우스에선 안을 들여다볼 수 없었지만 쿤스트하우스 빈은 건물 내부까지 들어가 그의 건축 철학과 신념을 눈으로, 몸으로 확인할 수 있어. 외벽에 알록달록한 타일을 붙여 놓고 창문틀이 제각각인 미술관 건물로 들어가면 모든 것이 구불구불한 곡선이야. 안뜰에 있는 테라스 카페의 의자 등받이도 구불구불하고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도 나선형이야. 나선이 그의 작품의 핵심이라고 아빠가 아까 이야기했었지? 공간마다 나무와 풀이 자라고 곡선으로 된 복도는 바닥까지 울퉁불퉁하게 만들어 놓았어. 화장실의 거울도 자유로운 곡선이지. 전시실의 조명은 어두운 편인데, 작품의 색이 바래지 않도록 최소한의 조도를 유지하도록 한 것이라고 해. 작품들은 벽에 바짝 붙어 있지 않고 약간 사이를 두고 걸려 있는데 이는 벽과 그림이 숨을 쉬도록 하기 위해서고 말이야. 처음엔 무척 낯설었지만 자연스러운 곡선으로 지어진 공간에 이내 익숙해질 거야.


2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는 훈데르트바서 하우스도 있어. 각 주택의 규모는 30~150㎡로 다양하고 바닥, 벽, 창문, 계단, 손잡이 등까지 각양각색이지. 안으로 들어가서 확인을 할 수는 없었지만 겉으로 볼 수 있는 창틀만으로도 그 변화무쌍함을 알 수 있어. 각자 다른 모습의 작은 덩어리들이 모여서 하나의 생명체를 이루듯 인간적인 건축이지.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중시한 훈데르트바서는 개별적인 녹지공간이 없는 서민용 공동주택에서 가능한 한 자연과 가까이하도록 배려했어. 그래서 집 주변과 옥상은 물론이고 창가, 테라스 등 공간마다 화초들이 자라고 있지. 개인적인 파티나 휴식을 취하도록 윈터가든도 두었지. 훈데르트바서는 그는 건축 콘셉트를 설명하면서 “인간은 세 겹의 피부를 갖고 있다. 하나는 실제 피부, 두 번째는 의복이고 세 번째 피부는 그가 살아가는 거주지다. 세 개의 피부는 지속적으로 바뀌어야 하고 새로워져야 하고 자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며 생물체는 살아갈 수 없다”면서 거주자들이 외벽과 내벽 어디든 손이 닿는 곳은 원하는 대로 장식하고 바꿀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했어. 하지만 지금까지 누구도 그의 말을 따르지 않고 훈데르트바서의 작품을 원형대로 보존하고 있는 게 참 아이러니야.




<알베르티나 박물관  Albertina museum>


알베르티나 박물관은 원래 1805년 합스부르크 왕가의 왕궁으로 건축된 궁전이야. 왕궁과 미술관으로 활용되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지.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은 가장 아꼈던 첫째 딸 마리 크리스틴에게만 유일하게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을 허락했는데, 그 사랑의 주인공이 알베르트공이야. 미술 애호가였던 알베르트공의 소장품을 전시하면서 이 미술관은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 거야. 이곳에서는 클로드 모네의 ‘수련연못’(The Water Lily Pond), 마르크 샤갈의 ‘연’(The Kite), 파블로 피카소의 ‘녹색 모자를 쓴 여인’(Woman in a green hat) 같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기 작품부터 근세 미술, 100만 점의 그래픽 아트까지, 시기와 장르를 초월한 작품들을 한 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는 유명한 곳이야. 국립오페라하우스 뒤편에 있는 알베르티나는 멜로 영화 ‘비포 선라이즈’(1996)의 배경으로도 등장했어. 아빠가 참 좋아하는 영화인데, 남녀주인공이 새벽에 함께 대화를 나누던 장면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듯하네. 아! 맞은편 오페라 하우스의 외관을 바라보며 테라스에서 사진 찍으면 참 예쁘게 나오기도 해. 비록 우리가 갔던 날은 파티 중이어서 들어가서 사진을 찍기 어려웠지만, 나중에 우주가 커서 영화 한번 보고 다시 가면 되니까.






*클림트의 키스가 걸려있는

벨베데레 궁전은 다들 너무 많이 알고 있을 테니 생략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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