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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이 Aug 04. 2019

아무것도 아니었던

올해 나는 불혹이 되었다. 사실 마흔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전과 크게 다를 게 없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렇게 된 것일 뿐이다. 스스로도 분명 아무것도 아닌 자연스러운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남자 나이 마흔'이라는 근원 불명의 단어를 계속 듣고 자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마흔이 되고부터 40이라는 숫자와 이미지에 갇혀 버렸다. 괜스레 초조하고, 불안하다. 그런 내가 위태롭게 느껴진다. 무엇하나 제대로 이뤄 놓은 게 없는 것 같은 기분이 자꾸만 마음속으로 스며 들어온다.


지금껏 무얼 하며 살았나 싶어서, 그 기분이 들 때면 어김없이 공허해진다.


<바람에 흩날리는 내 마음>

요즘  하릴없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부쩍 늘었다. 공허하다는 것을 핑계 삼아 게임도 해보고, 사고 싶었던 물건 구경도 하고, 가고 싶었던 여행지의 사진들을 보며 공허함을 달랜다.


거실 바닥을 이리저리 뒹굴며 스마트폰을 뒤적거리다 몇 년 전 사진들을 보았다. 여성호르몬들이 반응했다. 너무도 당연해서 무감각했던 순간들, 입김 한 번이면 흩어져 버릴 먼지처럼 가벼운 흔적들.


애써 떠올릴 필요도 없고,

그럴 이유도 없는,

그렇다고 딱히 떠오르지도 않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일상의 조각들로

가득했다.


커튼의 그림자.

나른한 주말 오후의 햇살.

햇빛에 반짝이는 바다.

뭉게구름이 가득한 하늘.


추운 겨울의 수다와 창문에 서린 김.

비에 젖은 머리카락.

과즙이 베여버린 아끼는 티셔츠.


축 쳐진 뒷모습.

반창고가 붙여진 손가락.

노랗게 익어버린 여드름.


잔뜩 쌓여 있는 설거지 거리들.

검게 그을린 양은냄비.

얼음이 모두 녹아버린 아이스커피.


탐스러운 과일들.

한여름의 비빔국수.

노릇하게 구워진 식빵.


한아름 장 봐온 물건들.

문 앞에 놓인 택배 상자.

각양각색의 치킨 쿠폰들.


부스스한 얼굴을 하고 커피를 내리는 아내.

꾸벅꾸벅 졸고 있는 아내의 얼굴.

머리를 말리고 있는 아내의 옆모습.


서로를 바라보며 방긋 웃는 우리의 표정.


그 순간들은 분명 아무것도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처럼.


<아무것도 아니었던 순간>

마흔이 되는 동안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했다고 느꼈던 것은 순전히 '나이 듦의 권태' 때문인 것 같다.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소중한 순간이 이토록 빼곡한지 몰랐다. 이 순간을 느끼기 위해, 이 순간의 존재를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구나.


시간은 참 오묘하고 신비롭다.


한 없이 가벼워 작은 바람에도 사라질 먼지일지라도 켜켜이 쌓이고 쌓여 깊이가 생겨나듯, 아무것도 아니었던 순간들 또한 쌓이고 쌓여 아련한 추억이 되었다.


또 언젠가 지난 시간들을 꺼내어 볼 때,

아무것도 아닌 지금이,

공허함에 몸부림치는 마흔의 조각들이

시간의 축복으로 미소 지을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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