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편의를 위해 시간을 숫자로 만들어 버렸고 덧붙여 단위화 시켰다. (개인적인 소견입니다. 진실은 저 너머에..) 그것을 '년, 월, 주, 일, 시, 분, 초'로 부른다. 우리들은 아니 나는 이 단위화 된 숫자 속에 갇힌 채 지금껏 살아왔다. '빠르다. 느리다.'라는 것, 한 살, 두 살,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도 시간에 숫자와 속도가 더해지면서 생겨난 개념이다. 시간에 어떤 원리나 의미 따위 부여하지 않고 순수한 상태 그대로 두었다면 어땠을까. 그랬더라면 시간에 쫓긴다거나, 촉박하다거나, 부족하다는 개념을 (지금보다) 조금은 더 마음 편한 형태로 받아들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판타지 같은 모습을 상상해봤자 무슨 소용이랴. 확실한 것은 언제가 되었든 누가 만들었든 간에 결국은 지금과 같은 개념으로 만들어지고 통용되었을 것이다.
갓난아이가 뒤집기를 하고 제 발로 우뚝 일어선 모습을 보며, '우리 애는 빠른 것 같다.'라는 말 또는 생각을 한다. 이가 난다던지, 몸집이 커진다던지 하는 것에서부터 글을 익히고 무언가를 배우는 것 까지 '빠르고 느림'을 적용시켜 말한다. 태어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시간과 숫자와 속도의 개념을 부모에게로부터 세상으로부터 배운다.
엄밀히 말하면, 빠르고 느리다는 것은 단순히 속도의 차이일 뿐인데, 경쟁사회의 일원이 되면서부터 느린 것은 도태되는 것이라고 느껴버렸다. 씁쓸한 것은 어느 누구도 콕 짚어서 느림은 곧 도태이고, 도태는 곧 좋지 않다 혹은 나쁜 것.이라고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림은 도태'라는 것이 공식처럼 내 DNA에 깊숙이 새겨져 있는 것만 같다. 아주 자연스럽게 인과관계인 것 마냥 숫자와 속도에 종속되어, 지금껏 시간의 종노릇 하며 살아왔다. 그 증거로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빨리 써야 하는데..' 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어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중이다. 그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나는 '빨리 써야지.'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을까.
20대 중반 즈음 막연하게 였지만, 글을 쓰는 사람, 즉 작가가 되고 싶었다. 제법 진지했고 간절했다. 하지만 그 마음은 내 삶에 어떤 변화도 가져다주지 못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속담에만 충실한 삶을 사느라 그 막연함에 가능성을 더해줄 어떤 노력도 하지 못했다. 아니하지 않았다. 그때의 나는 시간이 가지고 있는 물리적 개념에 압도당해서, 가슴속에서 펄펄 끓고 있는 열정에 스스로 찬물을 끼얹었다. 도태될까 두려웠다. 글을 배우고 쓰는 동안 내 입 속은 거미줄로 빼곡해질 것이라는,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한 걱정이 열정을 삼켜 버렸다. 당연하게도 행함이 없는 열정은 망상에 불과했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 채로 15년이라는 시간이 지났고, 세상은 빠르게 변했다. 독립출판이라는 새로운 문화가 생겨났으며, 예전보다 비교적 수월하게 책을 만들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조금은 머뭇거렸지만 용기를 내어 지난날의 꿈을 조심스레 꺼내어 아내와 함께 이런저런 책들을 제법 만들었다. 만족스러웠다. 덩달아 욕심이 나기 시작했고 그 욕심은 또 어리석은 마음의 씨앗이 되었다. 지난 15년을 따라잡고 싶었다. 계속해서 글을 쓰고 쉬지 않고 책을 만들어야 내 또래의 작가만큼 될 것이라는 마음이 들어섰다. 누구도 경쟁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럴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미련하게도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것으로 스스로 뛰쳐 들어가다니. 트랙에서만 달리는 것이 허락된 경주마가 된 기분이다.
시간의 노예로 살아온 세월의 습관에 짓눌려서, 버릇처럼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이 그저 버릇이라는 것, 지금은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시간의 속도는 나를 여전히 힘들게 한다. 언제쯤 되면 이 지긋지긋한 버릇을 고칠 수 있을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이 불안감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느리다는 것은 잘했다, 못했다. 좋다, 나쁘다의 문제가 아니라 단순히 속도의 차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싶다. 잃지 않고 싶다. 그것의 분실은 결국 글을 쓰고 싶다가 아니라, 글을 써야 한다는 생각을 만들어 낼 것이다. 마흔이라는 것 때문에, 내가 마흔이 되었다는 상징적인 의미에 얽매여 본질을 잃고 싶진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