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불이 아닌, 할부형
국토종주를 할부로 해도 괜찮다 느낀 건,
일본 시코쿠의 순례길을 걸으면서였다.
시코쿠는 일본의 4대 섬 중 가장 작다. 강원도와 비슷한 크기의 섬.
유배지였던 역사가 있는 만큼, 느낌도 강원도와 닮았다.
외지고, 그다지 발달되지 않은 곳이다.
이 섬을 한 바퀴 도는 순례 코스가 있다.
— “오헨로(お遍路)”
시코쿠 88개 사찰 순례(四国八十八ヶ所巡礼)라고 한다.
강원도만큼 큰 섬을 걷자면 도보로 40-60일,
자전거로도 약 15-20일 정도 걸린다.
처음엔 어떻게 이걸 한 번에 걸을까, 궁금했다.
그런데 순례길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들이 말했다.
“그냥 주말마다 시간 내서 걸어요.”
듣자마자
아, 그렇구나 —
그래도 되는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여건이 되어 한 번에 걸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러지 않아도 괜찮다.
내가 이 길을 다 걷는 것.
그 자체에 의미가 있으니까.
그렇게 마음이 가벼워졌다.
국토종주도,
이런 마음으로 하면 되겠다 생각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생각이 날 때마다
국토종주 수첩을 들고
이 나라에서 스탬프 랠리를 하듯 돌아다니자.
고로,
스탬프 구간만큼 내 국토종주는 할부로 하기로 했다.
무겁고 진지한 국토종주가 아닌,
가볍고 재밌는 국토 스탬프랠리라고나 할까.
언젠가 시간이 난다면 한 번쯤 무겁고 진지하게 달려보는 것도 좋겠다.
하지만 지금의 나에겐 이 정도의 스탬프랠리가 적당히 즐겁다.
그렇게 시작한 가벼운 국토종주. 그럼에도 출발점에 섰을 때는
꽤나 긴장되고, 기대감도 들었다.
처음으로 파란색 국토종주 길 입구에 들어섰고,
“국토종주 시작점입니다.”
라는 문구를 봤을 때,
아, 이 길만 따라가면
언젠가 부산 끝까지 가 있겠구나 —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어질 긴 길을 상상하며
살짝 긴장감이 돌았고,
광활한 땅을 떠올리며
두근거렸다.
그런 마음은 나만이 아니었다.
인천에 있는 정식 국토종주 출발점엔
많은 사람들이 출발선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곳은
서울에서 출발하는 이들에겐 ‘시작점’,
부산에서 출발한 이들에겐 ‘종점’이 된다.
왔다는 것만으로도 왠지 ‘치하’해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곳이다.
마라톤의 출발점 같은 구조도 있고 곳곳에 포토스팟도 있다.
완주하면 메달도 받을 수 있게 되어 있다.
출발은 치하받아 마땅하고,
완주는 축하받아 마땅하다.
출발은 어렵기 때문이다.
완주는 더 어렵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처음 시작하기가 어렵다.
이미 출발점에 섰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하다.
시작이 어렵다면,
그걸 유지하는 건 더 어렵다.
그러니, 완주는 진심으로 축하받아야 한다.
나는 사실 국토종주는 굳이 누구에게 추천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국토종주 같은 일’은 누구에게나 하나쯤 있었으면 한다.
꽤나 무리하고, 어쩐지 할 수 없을 것 같은 일.
그런데 막상 시작하면 할 수 있는 일.
그건 분명 출발할 때 약간의 긴장감과 신나는 기분을 줄 것이고,
완주했을 땐 하나의 더할 나위 없는 뿌듯함과 함께
진짜 축하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한 번에 다 하지 않아도 된다.
할부라도 좋다.
가벼운 스탬프랠리 같은 기분이면 된다.
하다 보면 어느새 수첩 속 도장이
가득 차 있는 날이 올 것이다.
지금 이 순간도,
진행형인 나의 국토종주 수첩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