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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단하는 킴제이 Jan 19. 2023

선택들의 틈에서 나는

정처 없이 떠도는 디지털 노마드의 피로함

내일모레면 제리가 떠난다. 친구들과 함께 발리에서 지내다가 둘이서 태국으로 왔다가 이제 제리가 간다.

혼자서 더 지내다가 미국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수없이 밀려오는 선택들에 숨 막힐 것 같고 버튼을 아직 누르지 못한 빈틈의 순간에서 나 혼자 우주에 둥둥 떠 있는 것만 같다. 물론 멋진 일이다. 살고 싶은 나라를 택해서 팟타이도 먹고 일도 하고 나만의 시간을 택할 수 있다. 매번 그럼 나는 다음 도시는 어디를 갈 것인지. 오늘은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 어떤 음식을 먹고 싶은지 선택 선택 선택 택함만이 있다. 맞아 내가 택해서 미국도 갔고 한국에서도 다시 8개월을 알차게 지내다가 동남아를 왔다. 원래는 발리를 갔다가 뉴질랜드를 가는 거였는데 서로의 휴가시간에 극성수기인 뉴질랜드에서 돈만 쓰는 게 허무해서 치앙마이로 왔다. 노마드들의 성지라고 해서 그들을 만나 무슨 일을 하는지도 듣고 일도 하고 싶었다. 그런데 또 몇 주 이야기를 듣다 보니 새롭지 않았고 또 새로운 이들에게 열린 마음으로 반가움을 표하기에는 내가 지쳤다.


내게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왜 나는 제리가 가는 미국 비행기에 같이 타지 않고 홀로 남아 반쩍이는 선택지들이 눈부셔서 귀찮은 걸까.

호찌민에 가서 베트남 사업에 대해서 현지분과 함께 찾아볼 수 있도록 세팅도 해뒀고 우붓으로 가면 지내고 싶은 도시도 분명 있는데.  이 멋지고 화려한 시간에 그냥 이불 덮고 등지고 잠만 자고 싶은 걸까. 치앙마이에도 대찬마음으로 노마드들을 만나보겠어 하고 왔다가 권태가 온 것이 내 탓 같아서? 하기로 맘먹은 일에 시큰둥 해짐이 부끄러워서? 오늘은 미국에서 본격 커머스를 할 수 있는 개발팀과 서비스 이야기도 하고 팔 상품들이 넘치는 재고도 보고 받았다. 한국에 있는 팀은 나를 스타를 만들어서 콘텐츠로 돈 벌자며 줌미팅도 했다. 분명히 신나는 일들인데 잠깐 설레었다가 이내 쳐진다. 잘하고 싶은 게 맞는데 2023년부터는 메인사업에 집중해서 내 발이 든든하게 설 수 있는 땅을 다지고 싶은 게 맞는데, 지금 지원사업들과 상연이랑 잘 알아보고 하나씩 해가면 되는데, 썰려나간 두 부 한 짝처럼 철퍼덕 짜게 퍼져있다. 목표가 커서 첫걸음에 만족 못 해서 실망스러운 건가? 잘하는 내 모습만 마주하고 싶어서인가?


글을 쓰다 보니 내가 이 선택의 도미노들이 벽처럼 느껴지고 그 빈 공간에서 서성인다고 느끼는 이유는 마음의 틈을 채워주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내일모레 떠날 제리에게 같이 보낼 짐도 정리를 하고 미뤘던 보고 이메일도 이제는 보내야겠다. 작은 먼지를 훌훌 털어버리면 되는데 저 선택의 벽을 밀어야 한다며 미뤄뒀던 일들이 마음 구석구석 내려앉아 있다. 운동을 안 하게 된 것도 큰 이유 같아. 미국에선 매일매일 요가를 하면서 미친 듯이 뛰어 차오를 때 정신도 맑아졌는데. 몸을 안 쓰니까 약해진 근육 사이사이에 잡음이 낀다. 마음먹고 해야지 싶었는데 작은 접촉사고로 팔꿈치를 다쳤다는 핑계로 미뤘다. 수영장 물이 짜고 피부에 뭐가 난다고 또 재꼈다. 생각이 많은 사람이라 환기를 시켜줘야 한다. 향내도 고여있으면 시들고 탁해진다. 마음의 문을 열려면 심장 근육이 질겨야 한다. 근육들에 피가 돌아야 정신도 맑아질 준비가 된다. 맞아 몸과 마음은 연결된 거야.




'어쩌면 정은아 지금 마음의 잡음들은 네 탓이 아닐 수 있어. 그저 몸의 피로일 수 있으니 내일 한 바퀴 걷고 오늘밤은 숙소로 돌아가서 스쾃랑 등근육 운동하고 자면 돼.'


'네 탓을 안 해도 돼. 그냥 편히 즐기고 많이 자도 행복해. 그동안 필요했던걸 너는 지금 하는 거야.'




맞아 내가 나에게 친절하지 않았을지도. 상황에 만족이 안될 때 나도 모르게 내 탓을 한걸지도 마음의 혼란스러움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괜한 핑계를 그럴싸하게 정당화 한걸지도. 글을 쓰니까 좀 환기가 된다. 손가락 근육을 써서 그런가 보다. 괜한 마음 꿍함에 이유를 들이대지 말고 마음을 그대로 받아들여야겠다. 한 달간 혼자서도 시간을 잘 보내보기. 큰 계획의 웅장함에 고개 숙이지 말고 오늘 차 한잔하고 책 읽고 운동하면서 나를 달래줘야지. 세상에 대차게 문 박차고 나가는 것도 재미지지만 웅크려서 방황하다 앉아 있는 나를 안아주며.. 같이 이야기 나눠주는 아름다운 마음도 잊지 말아야지.


내가 차오르면 앞으로의 빈틈도 반반해지고 선택들도 큰 산처럼 느껴지지 않고 슬렁슬렁 가볼 만한 등산처럼 느껴질지도 그리고 뭐 잘 못 가면 어떤가 또 지치면 어떤가 하면서 마실 나갈 수도. 지금 가장 필요한 건 내가 나를 가장 따뜻하게 안아주고 괜찮다고 괜찮다고 백번이고 천 번이고 말해주며 잘 재워주는 것


'정은아, 괜찮아. 괜찮다. 다 괜찮고 지금의 너의 이야기가 너무 아름답고 곱다. 더 편한 마음으로 마음을 열길. 지금 마음을 조여 오는 답답함도 너의 길에서 만나는 당연한 테스트이자 지나가는 나무. 괜찮다 괜찮다.


코코넛 워터 한입 시원하게 들이키고 숨 한번 깊게 쉬어본다. 그냥 가고 싶은 곳으로 가. 귀찮아도 괜찮아. 다 괜찮고 나는 고래라 어딜 가든 그곳이 바다다. 그러니 편하게 헤엄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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