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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단하는 킴제이 Jun 13. 2023

뇌출혈 사고 이후 배운 3가지

퇴원하고 재활훈련과 주기적으로 뇌검사를 받았다. 엄마가 한약도 한국에서 보내주셔서 잘 먹었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때 나는 많이 무서웠지만 강한 정신력과 마음을 기르게 된 계기가 되었다. 시간이 오래 걸려 느렸지만 그만큼 차곡차곡 촘촘히 해졌다. 흥청망청 이런 게 좋은 건가 어떻게 하는 거지 하고 살았다가 브레이크가 타인에 의해서 멈춰 고장 날 수 있다는 걸 배웠다. 더 설명할 것도 없이 내 인생인데 다쳐도 넘어져도 웃어도 행복해도 나 때문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사고로 다친 사람들에 대해서도 더 많이 이해할 수 있었다. 병원에서는 환자도 힘들지만 보호자도 힘들다는 것도 알았고 침대에 오래 있을수록 정신이 나약 진다는 것도 배울 수 있었다. 그 덕에 18년도에 제리가 태국에서 사고가 났을 때 내 여행을 다 취소하고 걸을 수 있을 때까지 옆에서 도와줄 수 있었다. 엄마도 미국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으니 친구가 걸을 때까지 도와주는 게 어떻겠냐고 하셨었다. 사랑을 받았기에 사랑을 줄 수도 있었다.

미국에서 다쳤을 때는 몸도 마음도 정신이 없었다. 병원비는 보험사에서 처리가 되었고 응급차는 비보험이라 별도 지불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누가 계산한 건지 학교에서 처리한 건지 내게 영수증이 오지 않았다. 지금 글로 그때는 바라보면 나는 정말 운이 좋았다. 우연히 만난 존재들까지 다를 도와주었다. 


사고 이후로 삶을 바라보는 시선의 축이 각을 조금 바꿨다. 천천히 느리게 선이 뻗어나갔으며 그 작은 1도 덕분에 그때와는 많이 다른 시간을 살고 있다.


계단 3개를 오르기 힘들었던 재활훈련, 지금은 히말라야 ABC를 다녀온 사람이 되었다.


01. 아픈 사람에게 감정적인 말은 참는다

사고 이후 다시 기숙사로 돌아와 친구에게 사고 소식을 전했다. 간호일을 하는 친구라서 앞으로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물어보고 싶기도 했고 어릴 때부터 친했던 친구다. 사고정황과 지금 상태를 이것저것 말하니 친구가 많이 걱정해줬다. 생각해 주는 마음도 고마웠고 빨리 회복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다음날인가 두 번째 통화에서 나보다 친구가 먼저 울었다. 

"회복이 다 되어도 장애가 남을 텐데, 앞으로 장애를 가지고 살 너를 생각하면 너무 슬퍼"

하고 엉엉 울었다. 나는 괜찮다고 하며 전화를 끊고 온갖 상상의 나래에 펼쳐는 겁을 다 주어다 먹었다. 장애라니 생각해 보지도 못했다. 뇌출혈은 다시 흡수된다고 하지만 뇌에 멍이 오래가면 문제가 되려나, 평행기간이 흔들렸으니까 지금처럼 걷다가 픽 하고 넘어지려나, 모르고 살다가 10년 뒤에 후유증이 나오면 어쩌지 무서워서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나는 어려서 그다음부턴 친구의 전화를 받지 못했다. 무섭기도 했고 본인의 감정을 내게 다 던져버린 게 이기적이라고 해석했다. 그 뒤로도 화가 나서 친구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결국 멀어졌다. 그리고 내 주변에 마음이나 몸이 아픈 친구에게 미래의 불안 따위를 먼저 말하지 않고 지금의 마음 소리를 들어주려고 노력했다. 몸이 아프면 정신도 나약해진다. 그러니 좀 더 섬세하게 마음을 만져줘야지 그러지 못할 바엔 아무 소리 말아야지 싶었다. 그리고 이제야 10년이 넘은 시간이 되어서 다시 그 친구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다. 본인도 무서워서 그랬겠지. 차마 듣는 이 신경 쓸 겨를 없이 겁이 나서 그랬겠지. 2-3년 주기로 연락이 오는데 다음에 연락이 오면 그때의 마음도 편하게 말하면서 나를 달래줘야지



02. 싫은 건 싫다고 말해도 된다.

대학을 2년 쉬었다. 3학년 1학기를 다니다가 그만했다. 고등학생 때 그림으로 유명한 친구들이 다 와서인지 우리 과에는 독특한 스타일의 친구들이 많았다. 그림만 보면 아 이건 누구 색이다. 저 친구의 작품이 기대된다 명확한 색을 가진 친구들이 많았다. 잘 모르다가 2학년이 되고 3학년이 되면 그럼 나는 어떤 스타일인가? 나는 어떤 사람인가? 생각이 내 머리를 계속 쳐 내렸다. 3학년 1학기 최고의 성적이 나왔지만 나는 더 좌절했다.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숫자는 높게 나오니 더 방향을 찾기가 어려웠다. 처음으로 아빠 앞에서 울기도 했다. 그렇게 나만의 시간이 필요해서 여행을 가고 마케팅 동아리에서 공부도 해봤다. 나는 성격이 좋고 웃긴 친구였지만 다 남들의 시선에서 묘사된 말이지. 내가 나를 표현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1학년 이대일 교수님 첫 수업에서 '너는 누구냐'라는 질문에 답하지 못한 것이 꽤 오래 나를 붙잡았다. 대학 2학년 때는 고등학교 친구가 연락 와서 포스터 그리는 거 도와달라고 해서 밤새 전공과제 하는 틈에 꾸역꾸역 하다가 쓰러져 응급실에 가기도 했다.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을 보낸 적 없이 친구들이랑 있는 시간이 좋다고 생각했고 거절을 해본 적이 없이 최선을 다했다. 남을 위해서.

혼자 떠난 유럽여행에서 많은 친구들의 생각을 듣고 같이 빚어보다가 사고 이후에는 더 명확해졌다. 싫은 건 싫고 다 같이 시간을 보내다가도 나만의 시간이 필요하면 말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기회라고 착각되는 제안들도 지금 아니다 싶으면 안 하고 싶다고 말했다. NO라고 말할 줄 아는 게 신기했는데 더 놀라운 건 사람들의 아무렇지 않은 반응이었다. 알겠다고 바로 이해하거나 좀 더 좋은 조건을 다시 가져오기도 했다. 헷갈릴 때마다 내가 원하는 게 뭐지? 생각했다. 답은 바로 오지 않을 때가 많았으나 연습을 하니 조금씩 나아졌다. 그때 1도 각도의 변화 덕분에 지금 삶의 선은 이전의 삶과는 정말 멀고 다르며 멋지고 맘에 든다.



03. 하고 싶은 건 하면 된다.

사고 후 회복하고 학교도 복학했다. 전공시간이 끝나면 한두 시간 과제를 하고 그다음 두 시간은 마케팅 공모전을 준비했다. 졸업전시로 방학 때도 수업에 나와서 작품을 만들었어야 했는데 나는 터키를 갔다. 터키에서 일도 해보면서 학교 과제를 했고 돌아오니 갑자기 전시위원장이 되어 있었다. 하고 싶은 걸 한다고 이기적으로 살아보는데 기회들이 오는 게 신기했다. 그때는 진짜 몰랐는데 글을 쓰면서 돌이켜보니 내 삶의 시간이 모두 기회였다. 천천히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삶이라서 몰랐었던 거지 그 덕에 길가에 꽃을 한참구경하듯 일을 살펴보며 보듬어 볼 수 있었다. 엘지전자를 그만두고 터키로 간다고 했을 때도 다 방법이 찾아졌다. 집도 구해지고 테러로 도망쳐야 했을 때도 영국에 친구가 나와 제리를 거두어줬다. 21년 6월 우리 둘이 벼랑 끝에 서서 결국 한국을 떠나야 했을 때도 무릎 꿇고 쳐 박혀 우는 내게 기회들이 찾아왔다. 포트폴리오 돌리면서 이거하고 싶다 저거 하고 싶다 친구들한테도 보냈더니 미국에서도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여행하면서 일한다는 철없는 소리를 지금까지 하냐고 했지만 지금은 여행하면서 돈을 벌 수 있다며 회사들이 먼저 연락이 오곤 한다.

그니까 내가 남의 말에 원망하고 왜 내게 안되냐는 소리 하냐고 피할 때도 결국 스스로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부장님이 그랬다 이사님이 제게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냐. 30대 청춘에게 왜 결혼하고 아이부터 낳으라고 하느냐 불만이었는데,  목소리의 무게감이 없으니 남의 소리에 휘둘렸던 거다. 그래, 지금까지 살아온 내 삶이 말해준다 하고 싶은 걸 해야 한다고. 삶이 내게 들려주는 소리가 있으니 그 목소리를 따라가며 신명 나게 살면 된다고 알려준다.

죽기 전에 하고 싶었던 거 못했다고 남 탓 부모탓 하기엔 내 인생이 고귀하고 소중하다.




요즘 글을 쓰면 마음 다잡으려고 희망을 붙잡고 싶어서 글에 꾹꾹 눌러 담는다. 

정신없던 시간들이 글 한 줄로 정리되며 마음에 착착 들러붙는다. 그래 이러려고 내게 이런 일이 있었구나.

죽음 앞에서 앞으로 어떻게 살까 고민을 많이 했는데, 일단 이것저것 해 보다 보니 내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씩 배워간다. 앞으로 내 인생에서 무슨 일이 펼쳐 질지는 모른다. 목표를 세우고 싶지 않다. 지금의 지혜와 앎 수준에서는 목표자체가 한계다. 다만 열린 마음으로 세상이 내게 던져주는 이 선물들을 기꺼이 웃으면서 열어보고 싶다. 쓸데없는 짓 하다가 바쁘다고 그 선물을 따르는 게 사치라고 모른 채 하지 않고 그저 해맑게 웃으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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