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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엘라 Jul 07. 2020

자살하고 싶을 때 생각 바꾸기

니체의 철학을 [허무한 삶]에 적용하는 해설서_[우울한 날엔 니체] 서평

  

“나를 죽이지 못한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


  저 문장을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더 내 마음속에 깊은 울림으로 남는다. 사실 저 문장이 니체가 남긴 말이라는 것을 최근에서야 알게 되었다. 짧은 문장이 나에게 주는 강력한 메시지 덕분에 철학에 대해 ‘1’도 모르는 내가 니체에 관련된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넷 서점에 들어갔다. 여러 가지 [E-book] 중에 어떤 책을 읽어볼까 고민을 하다가 프랑스 작가의 책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는 『우울한 날엔 니체_S’affirmer avec Nicheitez 』를 발견하게 되었다.


  프랑스어 [사피흐메 s’affirmer]라는 동사는 “(의지·현상 따위가) 명확히 드러나다, 확실해지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직역하면 [니체와 함께 명확히 알아보기]라는 제목과 [우울한 날엔 니체]라는 한국어 제목을 동시에 본 순간, 왠지 이 책을 읽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나를 둘러싸고 있는 우울, 허무, 상실감에 대해서 정확히 깊게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의 제목이었다. 나는 참고로 2017년, 2020년에 부모님이 차례로 돌아가시는 경험을 했다. 그래서 사별에 대한 깊은 슬픔과 함께 외국생활을 하며 애도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최근 내 인생의 4년여간의 시간은 ‘고통과의 동행’이었고 나라는 인간의 바닥, 추함, 자기 연민, 자기혐오 등등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부정 속에서 살았던 것 같다. 사는 것이 지옥 같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겠고, 죽는 것 밖에 답이 없는 것 같은 그런 기분에 휩싸인 어느 날 『우울한 날엔 니체를 읽었다.  


좌절 속에서 모든 것은 헛되고 고통스럽게 보인다. 우리 자신을 의기소침하게 만드는 사건을 겪고 나면 우리는 이 모든 감정을 다 알게 된다. 우리는 더 이상 아침에 일어나지 않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의 여정에서 고통을 감수하고 따를 만한 가치가 있는 어떤 목적지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더 이상 다가온 모든 것에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다. 좋건 싫건 사물은 그 가치와 향취를 잃고 말았다.
 
 니체의 주장에 입각해 문화적 허무주의에 대해 분석하는 것은 우리 내면의 허무주의와 우울증에도 적용된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신을 당했을 때, 정치적 이상이나 직업 때문에 실망했을 때 우리는 비탄에 빠지는 것이 이상을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비탄이 더욱 오래된 것임을, 그리고 우리가 이상을 그토록 필요로 하게 된 것은 이 비참함 때문임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허무주의를 직시해야 하고 삶에 의미가 없는 것을 그럭저럭 견뎌내야만 한다.


  허무주의는 ‘존재는 무의미하고 삶은 힘들게 살 가치가 없으며, 모든 것은 서로 차이가 없다고 느끼는 감정’이다. 이 감정은 사람을 정말 미칠듯한 무기력에 빠지게 만들고 자살이 삶의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생각을 들게 만든다. 부모님의 인생의 끝을 본 경험을 하고 난 이후로, 시간이 지날수록 인생이 너무나 허무하고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허무주의에 빠져서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어떤 누구보다 더 의욕적으로 해야 할 외국생활을 가장 스스로가 비참하고 외롭게 만드는 생각을 가지고 하루하루 버티면서 사는 내 인생이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마음이 아주 조금 편해졌다. 지금 내가 느끼는 삶에 대해 깊은 공허와 허무한 감정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깨달음과 안도감마저 느꼈다. 허무주의는 인간이 앓고 있는 본원적인 질병이라는 사실이고, 내가 뒤틀리고 잘못되고 유별난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허무감과 괴로움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자각이었다. 이렇게 내 마음에 변화가 일어난 것을 보면, 저자가 의도했던 삶의 개선과 변화라는 목적에 아주 걸맞은 작은 변화이다.
 
 이 책에서 맘에 들었던 점은 아무도 나에게 묻지 않는 나에 대한 문제와 감정들을 집요하게 질문하고 대답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 나는 더 복잡해지길 원하는가? 더 단순해지길 원하는가?
 - 나는 더 행복해지길 원하는가? 아니면 행복과 불행에 대해 더 무관심해지길 원하는가?
 - 나에 대해 더 만족하길 원하는가? 아니면 더 많이 요구하고 완강해지길 원하는가?
 
  기타 등등 이와 같은 무수히 많은 질문들을 통해 스스로를 알아가고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질문 하나하나에 다 대답을 하고 싶지만, 그럼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릴 것 같아서 정말로 와 닿는 몇 가지 질문에 대해서는 앞으로 몇 달이 걸리든, 일 년이 넘게 걸리든,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질문해 대답할 것이다.


-고통과 삶의 태도에 대한 책의 문장들

철학을 구체적 삶에 적용하려면 먼저 ‘자신의 문제를 식별’ 해야 한다. 그래야만 새로운 이론의 도움을 받아 그러한 문제를 해석할 수 있고 궁극적으로 구체적 행동을 통해 우리 내면의 문제를 치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통에 직면하기]와 더불어 니체는 [우리 존재의 의미를 예술가처럼 스스로 창출하기]를 제안한다. 그러한 상실을 허무주의라는 위기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기회로 삼고, 의미 결핍의 고통을 다양한 의미를 즐기고 우리 자신의 고유한 건강을 개발하기 위한 변형의 기회로 삼아 보라는 것이 니체의 제안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삶을 긍정하지 못하는 것은 약함 때문이다. 사람들의 유기적 신체가 지치고 그들의 정신적, 신체적 요소가 너무 허약해지면 충동적 힘과 방어력이 부족해지며 실존의 무게를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하게 된다 우리는 약함의 특징을 파악하고 약함으로 허비하게 될 힘을 비축해 올바른 긍정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이를 위해 니체는 천천히 결정하고 우리가 결정한 것을 고집스럽게 지키는 방법을 제시한다.

결국 사람들은 이처럼 자신들이 증오하는 것에 몰두하면서 자신의 가치를 자신이 혐오하는 것의 수준으로 떨어뜨린다. 텔레비전이 점점 바보상자가 되는 것에 대해 불평하는 사람은 TV 화면에 사로잡혀 있고 ‘광고 비판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슬로건을 읽어대고 있다. 기품 있는 귀족의 태도는 텔레비전을 보지 않는 것만이 아니다. 아예 그것에 관해 말하지 않는 것, 광고 문안보다는 오히려 시를 읽는 것이다. 우리를 불쾌하게 만드는 것을 부정하느라고 꾸물거리는 것보다는 우리를 기쁘게 해주는 것을 추구하고 찬미하는 편이 더 낫다


  책에서는 고통 앞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올바른 태도를 제시한다.

1. 자신의 문제를 식별하고 고통에 직면하기.

2. 실존에 무게를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할 때, 즉 나약함에 빠져 허무주의라는 위기에 봉착했을 때, 상실, 결핍, 고통에 대처하기 위한 기회라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

3. 약함의 특징을 파악하고 개선해 나가는 삶, 부정적인 것을 멀리하고 기쁘게 해주는 것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기.


  죽음은 우리 삶의 디폴트이기 때문에, 삶의 가치와 존재에 대해 의문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누구도 자신의 삶을 선택해서 시작한 사람은 없다. 어쩌다가 태어나고 자라나서, 어느 순간부터 삶에 대한 자각, 삶의 아이러니함을 깨달은 순간부터 어쩔 수 없는 깊은 상실감이 내면에서 일어난다. 특히 삶의 부정적인 측면과 마주한 상황 속에서는 그 허무주의가 꽃을 피운다.  니체가 의미하는 긍정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부정적인 것을 멀리하고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을 능동적으로 추구하고 찬미하는 것이 니체가 말하는 긍정이다. 이러한 의미의 긍정은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서 납득할 만한 행위인 것 같다.

 

- 방황하는 것에 대해 심리적으로 안심을 주었던 책의 문장들
 
 자신을 발견하려면 자신을 잃어야 한다. 방황의 시간은 삶의 진정한 기획이 성숙하는 과정에 반드시 필요하다. 유일한 치유책은 느림이다. 강해지려면 속도를 늦추는 법을 배워야 한다. 방황하는 가운데 자신의 길을 찾아라

무분별, 머뭇거리면서 내일로 연기하는 것은 자기를 구축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단계다. 따라서 산만하고 변덕스러운 방식으로 직업, 학업 과정, 감정을 나누는 상대를 바꾸는 것이 때때로 필요하다.

니체는 긍정의 길을 되찾기 위해 삶을 찬미하고, 우리의 운명을 사랑하고 비난을 거부하는 대신 거리 두기의 태도를 취하길 권유한다.

혹은 새로운 탄생에 이르기, 어떤 것을 품고 있기는 우리보다 더 강하고 더 위대한 어떤 것을 낳는 것임을 아는 것이다. 임신을 거치는 것은 우리의 의지는 물론 심지어 노력에도 달려 있지 않은 힘에 의해 동요될 수 있음을 배우는 것이다. 임신부와 마찬가지로 작품을 구상 중인 예술가는 자신의 창조력이 단순히 자신의 의지적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우리 내면은 잠자고 있는 폭발을 기다리는 강력한 휴화산이다. 우리는 모두 우리 내면에 숨겨진 정원과 농장을 가지고 있다. 다른 이미지를 사용해본다면 우리는 모두 분출되는 시간을 알고 있는 형성 중인 화산이다


   나는 20대의 시간을 보내면서 한없이 머뭇거리고, 확신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시도하고 무너지기를 반복했다.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분출하기 전의 화산처럼 내 안에 내재적 에너지를 쌓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20대의 시간은 언젠간의 폭발을 위해 휴화산을 계속해서 끓게 만드는 시간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 같다. 계속해서 나 자신을 잃고 끓이고 싶다. 그것이 나를 알아갈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이었다.


-행복과 고통의 관계에 대해서 공감이 되었던 책의 문장들
 
 우리는 고통을 삶에서 필수적인, 심지어 본질적이기도 한 구성요소로서 받아들여야 한다

실존의 어두운 측면과 직면하고 죽음, 고통, 어리석음, 악독함을 대면하고 우리 자신의 약함과 나태함과 싸우면서 우리는 가장 깊은 내면에 있는 자신의 모습에서 최선의 것을 끌어낼 수 있다.

행복은 그 자체로는 지속성이 없는 공허한 상태에 불과하다. 행복에서 목표, 내용, 목적을 박탈한다면 행복은 단지 그것이 아닌 것에 의해서만 정의되는 무에 불과할 뿐이다. 행복은 고통, 욕망, 흥분, 위험의 부재이지만, 그 자체로는 긍정적인 것은 아무것도 표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의 어떤 양상만 좋아한다는 핑계를 대고 우리가 믿는 대로 삶의 대부분을 거부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사랑만을 찬미하면서 고독을 거부할 수는 없다. 고독은 사랑의 필수조건인 동시에 종종 사랑이 낳는 불가피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사랑을 원한다는 것은 고독을 똑같이 원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고통 없는 쾌락만을 혹은 불행 없는 행복만을 원할 수 없다.

자유로운 전문직 종사자들이 세금 공제를 받는 공무원들에 대해 갖는 원한, 공무원들이 자신들보다 더 많이 돈을 버는 자영업자에 대해 갖는 원한, 자신들의 모든 열악한 삶에 책임이 있는 부모에 대해 아이들이 갖는 원한, 자신들의 청춘을 앗아가 버린 아이들에 대해 부모가 갖는 원한. 고전적인 원한이 가난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비참함에 책임이 있다고 믿는 부자들에게 갖는 원한이라면 오늘날은 그 반대, 즉 가장 혜택을 받는 사람들이 혜택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갖는 비정상적인 원한도 발견된다. 예를 들어 ‘북부동맹’이라는 이탈리아 정당은 가장 가난한 남부 지방이 부유한 북부 지방의 부를 탈취한다고 비난한다. 결국 가장 큰 특혜를 받는 사람들조차도 삶의 고통에서 해방될 수 없다. 우리가 처한 나쁜 상황에 대해 아무에게라도 책임을 전가하고 그 책임을 모면하고 싶은 것이 우리의 자연스러운 성향이기 때문이다.

일부를 사랑하는 것은 전부를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가 삶의 일정 양상을 거부하게 되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삶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에게 결함을 수정하고 약함을 교정하라고 하지 말고 오히려 자신의 결함을 수정하고 약함을 교정하려고 해 보라. 세상을 비난하고 삶을 저주하는 대신에 오히려 자신을 개선해보라. 마찬가지로 풍요로운 삶은 흠집 없는 안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비극적 불행을 직면하는 방식에 있다.


동전의 양면 같은 행복과 고통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고통]의 반대말은 [행복]이 아니라 [고통을 극복하며 더욱 성장]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의 불행이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행복을 좇기보다는, 나의 고통을 인식하고 그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개선해나가는 삶에 집중하며 살아야겠다. 그리고 양면의 동전 같은 삶의 구성요소들에 거리를 두며 평점심을 유지하는 태도 또한 중요하다.


-[영원회귀]에 대한 책의 문장들

증오는 자기에게 되돌아오는 폭력이다.

삶의 매 순간을 무한히 살아야 한다는 생각은 우리를 절망으로 내몰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다시 삶을 살 수 있는지 묻기 위해서는 삶을 통째로 포착하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영원히 다시 산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모든 종류의 근심, 사고, 비극, 질병, 불행, 슬픔의 순간까지도. 영원회귀는 우리를 두렵게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고통스러운 것의 회귀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자살을 원하기도 한다. 단순히 자살에 대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삶의 압박감이 경감될 수 있다. 하지만 영원회귀설은 우리에게 이 출구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우리는 패배감, 무기력, 포기의 감정을 가지고 자살을 무한히 반복할 것이다.

영원회귀의 관념은 절단기, 메스, 채찍의 기능을 한다. 절단기 기능을 하는 이유는 불행하고 무기력한 삶의 가능성을 자동적으로 제거하기 때문이다. 아무도 이러한 삶을 끝없이 반복하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인생이 반복하길 원하지 않는다. 어떻게 나는 삶을 견뎠는가? 창조함으로써. 내가 삶의 양상을 견디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삶을 긍정하는 초인을 봄으로써. 나는 스스로 삶을 긍정하려고 애썼다. 예술에서건 학문에서건 운동에서건 모든 형태의 탁월함에는 다른 모든 관심을 일시적으로 차단하는 것과 자신을 엄격하고 자의적인 규칙에 예속시키고 동일한 과정을 바보처럼 끈기 있게 반복하는 것이 함축되어 있다.


삶이 영원히 반복된다고 생각하면 내가 지나치게 슬픔에 빠져있거나, 자해를 하고, 폭식을 하거나 자살을 하는 등의 나를 파괴시키는 행위는 끝없이 반복되는 것을 상상을 하게 된다. 이 고통이 끝없이 반복된다는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래서 우리는 이 [영원회귀]라는 가정을 통해서 '내가 생각하는 안 좋은 습관과 부정적인 행위를 보다 나은 방향으로 개선해서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된다'라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우리 삶이 갖는 부정할 수 없는 비극적 양상은 우리가 삶을 놀이로 여길 때 비로소 감당할 수 있는 것이 된다. 여기에 반복의 형식은 삶의 긍정을 증대시키고 심화해준다. 반복 자체가 고도화된 긍정의 형식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기독교에서 추구하는 내세의 영원한 삶이 아닌 현세의 삶에서 누리는 영원성을 위한 반복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는 기독교의 도덕과 허무주의에서 벗어나게 된다.

정원 가꾸기, 식물의 삶, 식물 재배는 니체가 개인의 발전, 자기 만들기에 대해 말하기 위해 즐겨 사용하는 은유 중 하나다.

맹목적인 반복이 여전히 이 삶을 더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석 세공인처럼 우리 존재를 다듬고 수천 번 재가공하고 완벽하게 만들고 아름답게 장식하고 더 강렬하고 도취감을 느끼게 하는 방식으로, 즉 예술가처럼 삶을 살아야 한다.


   반복은 자신의 완전한 성숙에 도달하기 위해 자신을 자제할 수 있는 위대한 열정을 기를 수 있게 한다. [영원회귀]을 바탕으로 무언가를 꾸준히 열심히 반복하는 것에 대한 동기부여 또한 얻을 수 있다. 오늘 같이 흐지부지하게 보낸 하루가 영원이 계속해서 반복된다고 생각하면 그것만큼 지루하고 끔찍한 일이 어디 있을까.
 
   물론 나는 너무나 게으르고 나약한 인간이라서 이렇게 책을 읽고 각성을 한다고 해도, 몇 번이고 또다시 무너지고 우울해할 것이 뻔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내가 느낀 감정들을 서평으로 남기고 인상적인 책의 문장들을 적어 놓는 것만으로도 내 인생에 작은 긍정적인 변화이다. 시간이 지나고 허무한 감정이 올라올 때마다 나에게 도움될 만한 자료로 남을 것 같다.  
 

- 삶과 예술과 관련해서 도움이 되었던 책의 문장들
 
 멜로디에 관한 베토벤의 상상력은 그 다지 발달하지 않았다. 그는 그런데도 5번 교향곡의 도입부 네 소절처럼 때때로 거친 주제를 가지고 매혹적인 곡을 만들었다. 이처럼 예술가는 자기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예술가는 자신의 삶 자체에 의해서뿐 아니라 날것의 재료를 조직해 각 부분을 초월하는 작품을 만듦으로써 삶의 주인이 된다.

때로는 단조로운 활동과 단조로운 관계의 안전성에 자신을 가두고 기계적인 작업의 반복으로 녹초가 되는 것도 필요하다. 우리는 매번 아직 알지 못하는 미래의 과제를 준비하고 그 과제의 여러 양상을 실험하고 이미 갖고 있는 재능으로 그 일에 공을 들인다.

우리는 인간이 고통 그 자체를 느낄 때보다는 고통을 설명할 길이 없을 때 더 절망한다.

예술은 현실을 강화하고 미화하는, 비록 허구적이기는 하지만, 그런 반복의 형태를 통해 경험을 심화하기 때문이다. 예술은 현실을 부정하는 대신에 우리에게 현실보다 더 강렬하고 더 농축된, 그러므로 더 생생하고 더 실제적인 집중된 현실을 제공한다.

예술가들은 어떤 비평이 나오고 어떤 식으로 사회에 참여하게 되든, 그리고 자신의 활동으로 현실을 변화시키고 싶은 욕망에 상관없이 삶을 무척 사랑하기 때문에 단순히 살아가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작품을 통해 삶을 두 번 시험해보고자 한다

예술가는 자신의 삶과 역사 중 가장 나빴던 사건도 예술에서 다시 경험할 용의가 있고 창조를 통해 영원하게 만들 용의가 있다.

삶을 어린이의 놀이처럼 인식하라. 아름다움과 예술이 우리를 추한 진리에서 해방시켜주는 것과 동일하게 바로 삶을 놀이로 인식함으로써 우리는 비극적인 삶의 양상을 견딜 수 있다.


   먹고사니즘의 관점에서 보면 창작자가 되려 하는 것은 지금 당장 돈이 안되고 쓸데없는 짓으로 여길수 밖에 없다. 그래서 외롭게 창작하며 지금처럼 가난하게 사는 삶이 무슨 의미가 있나 의문이 들 때가 정말 많았다. 철학 연구자 '발타자르 토마스'가 재조명한  [니체의 허무주의]를 읽으며, 제발 이 고통의 삶이 끝나길 기도했던 내 마음을 조금 다스릴 수 있었고 나 혼자만 이렇게 고통 속에서 사는 것은 아니라는 위안을 얻었다.

   

   슈퍼히어로, 의사나, 소방관 말고도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직업은 예술가라는 생각이 든다. 삶에 대해 공감해주고 영감을 주는 좋은 작품은 나약한 인간의 깊은 내면에서 일어나는 감정들을 건드려 주고, 때로는 그 감정을 활활 불태워 주고 꼭 껴안아 주는 것 같다. 너무나 지쳤던 나에게는 숨통을 트이게 해주는 그런 책이었다. 이 책이 나에게 준 긍적적인 영향처럼 나의 창작작업이 누군가의 생각에 변화를 줄 수 있다면, 그건 정말 누군가의 인생을 구하는 것만큼 소중한 일이 될 것이다. 죽을때까지 어떻게든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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