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죽음의 수용소, 애도일기, 12가지 인생의 법칙을 읽고나서 느낀점
부모님의 죽음을 계기로 삶에서 ‘죽음’은 피할 수 없는 비극적인 요소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죽음은 늘 주위에 존재하고 우리의 주변을 어슬렁거리다가, 지나가는 동물의 다리를 낚아채는 덫처럼 순식간에 일어나는 사건이었다. ‘숨을 쉬던 사람이 더 이상 숨을 내뱉지 않는 상태’ 그것이 삶의 끝이었다.
그 이후 나는 ‘허무주의’의 늪에 빠져버려서 늘 나의 내면에는 불안과 절망이 가득했다. 친구들을 만나는 것이 더 이상 기쁘지 않았고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도 더 이상 재미있지 않았다. 뭘 해도 시큰둥해지고 비관적으로 바라보았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도 다 의미 없다고 느껴졌다. 사람들 앞에서 억지로 웃는 것이 고통으로 다가왔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나는 혼자 있는 것을 선택했다. “허무”라는 감정은 내 생각 전부를 지배하는 암울한 공간으로 나를 끌어 내렸다.
삶을 시계에 비유한다면 어린아이의 탄생의 순간은 아침 6시와 같고, 누군가의 죽음은 깜깜한 새벽 4시 같은 막연함과 같았다. 어두운 밤하늘 같은 엄마의 죽음을 마주한 이후로, 나는 그때부터 끝나지 않는 새벽 4시의 시간 속에 갇혀버린 것 같았다.
인간이면 누구나 그런 시기를 지날 때가 있다고 한다.
모든 것이 허물어지고 주위에 아무도 남아 있지 않고, 절망과 체념에 사로잡힌 상태 말이다. 러시아와 서양문학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대문호 ‘톨스토이’조차도 이런 비관적 생각에서 벗어나려 엄청나게 노력했다.
비관적인 생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가 찾은 네 가지 방법 중,
첫 번째는 그런 문제를 아예 생각하지 않던 어린 시절의 무지함으로 회귀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골치 아프게 생각할 것 없이 무작정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세 번째는 삶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이미 알고 있기에 무의미한 삶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었다. 네 번째 방법은 삶이 사악하고 무의미한 것이라고 깨닫는 순간 삶을 파괴하는 것이다. 산 사람보다 죽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축복이 더 크다는 것, 차라리 존재하지 않는 편이 낫다는 이런 생각을 톨스토이는 숨김없이 드러냈다. 그가 제시한 방법 중에는 희망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기 어렵다.
반면에 모든 죽음이 반드시 허무주의를 낳는 것은 아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롤랑 바르트는 어머니를 잃고 몇 년간 애도의 마음을 글로 기록했다.
그의 책 『애도일기』에서는 “비타노바”라는 개념을 소개한다. 이 말은 소중한 사람을 잃고 애도를 하며 발견한 새로운 삶의 의미를 뜻한다. 10대시절의 나는 “엄마는 왜 나를 이 고통뿐인 세상에 낳았을까?”라는 질문으로 우울한 삶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20대중반에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 “이 세상 모든 고통을 감수하고도 나에게 이 삶을 선물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긍적적인 목소리가 내 안에서 들렸다. 엄마가 돌아가신 2017년 겨울, 그때 그런 갑작스런 세상에대한 감사의 마음이 나에게는 ‘비타노바’ 의 순간이었다.
그리고 1년, 2년, 3년의 시간이 흐르고 아빠마저도 간암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지금 2021년. 그 동안 수없이 무기력과 허무가 나에게 찾아왔고 좌절했고 간신히 나는 숨을 쉬고 살았다.
마치 톨스토이의 3번째 방식처럼,
무의미하다고 느끼는 그 허무에 찌든 삶을 그냥 이어가던
어느날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을 읽었다.
그 책은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박사가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3년간 겪은 경험의 기록과 자신의 정신분석 방법을 소개한 책이었다. 지옥과도 같은 죽음의 수용소에서 그가 찾은 삶의 의미가 나에게 깊이 와 닿았다. 강제노동을 하는 고통스런 순간에 [프랭클]박사는 아내를 생각하며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아직 아내가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모르는 순간이지만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육신을 초월해서 더 먼 곳까지 간다는 것”과 “사랑은 영적인 존재, [내적인 자아 안에서 더욱 깊은 의미]를 갖게 된다는 것”이었다. 육신을 초월하는 “그 사람”의 존재가 삶을 지속시킬 수 있는 힘이 된 것이다. 삶의 의미란 끊임없이 변하지만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라고 그는 말했다. 삶의 의미의 근본에는 나를 사랑해준 사람의 사랑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의식을 가진 유일한 존재이다.
자의식 덕분에 인간은 스스로 나약하고 무능력한 존재라는 것, 그리고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인지 할 수 있다. 이런 자의식은 필연적으로 고통을 야기한다. 전 하버드대 심리학 교수 조던피터슨의 말에 따르면, “지금 우리가 고통받고 있다면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죽음과 고통 앞에서 인간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고, 삶은 그 자체로 비극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고통이 더는 감당하기 어렵다고 느껴진다면, 그래서 그 때문에 비뚤어지고 있다면 진지하게 자신의 삶을 점검해야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기보다는,
정신을 차리고 불행이 어디에서 시작됐는지 생각해야한다. 불행에 대한 책임이 나에게 있음을 인정하고, 불행을 조금이라도 다스려 보겠다고 마음먹는다면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게될것이다. 그리고 더 좋은 것을 꿈 꿀 수 있다. 옹졸한 생각을 버리고, 마음의 문을 연다. 세상이 어둡다고 짜증 내는 대신 작은 빛이 있음을 감사히 여긴다. 더 높은 자리가 아니라 더 나은 삶을 목표로 삼기로 결정 할 수 있다.
“내 삶이 조금이라도 나아지려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야 할까?”
이 질문으로 오늘 하루를 보내면 천천히 삶의 형태는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 할 것이다.
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하는 마음을 먹는 것, 운명을 탓하지 않고 삶의 방식을 바꾸기로 결심하는 것이 더 나은 삶을 위한 첫 걸음이다. 여기까지가 내가 죽음과 삶의 의미에 대해 여러 책에서 발견한 깨달음이다.
우리의 삶이 계속되는한 각자의 삶이 끝 날 때까지 우리는 삶이 불러일으키는 쓸쓸한 허무와 계속해서 마주 할 것이다. 그때마다 우리는 사랑하는 상대의 죽음이라는 그 현실, 사실보다 그들이 남겨준 깊은 사랑을 기억 해야한다. 그리고 그 대체할 수 없는 깊은 사랑에 감사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 살아가다보면 언젠가 죽음이 자신을 찾아왔을 때 후회없이 만족스럽게 그 죽음을 맞이 할 수 있을 것이다.
◇ 인스타 @miella_page
◇ 유튜브 : 미엘라
그래서 나는 내 삶의 불행이 어디에서 시작 된 것인가 고통스러운 탐색의 시간을 갖기로 했다.
중학교 때 학교폭력으로 인해 상처받고 치유되지 못한 마음에 대해 이야기 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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