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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대문 김사장 Sep 04. 2022

떡볶이가 가르쳐 준 것.

아내와 신당동에 들렸다. 오랜만에 떡볶이가 먹고싶어졌다. 마복림 할머니집에 갔다. 오후 4시인데도 생각보다 손님이 많다. 


80년대 후반, 아버지 산업재해로 장애인이 되고, 어머님이 사업을 시작하셨는데 그 첫번째가 신당동 떡볶이였다. 당시에는 DJ박스가 있어서, 떡볶이를 먹으며 신청곡을 신청할수 있었다. DJ는 기분이 좋으면 '00테이블에 라면사리 서비스 드릴께요.' '00의 원피스 학생 너무 이뻐요. 국물 튀지 않게, 앞치마 가져다 주세요. ' 같은 멘트를 날렸다. 원조 귀가르즘이었고, 이렇게 오감을 만족시키는 매체는 그 당시 없었다.


월세를 아끼기 위해서 DJ박스 위에 다락방을 만들어놓고, 우리 가족은 그곳에서 숙식했다. 


평상시 오는 DJ형이 있었는데, 목소리가 매우 좋았다. 나긋나긋하고, 눈빛도 우수에 젖어있는 멋쟁이 형이었다. 그 형이 제일 어려워하는 것이 DJ 박스에 들어가기다. 개구멍처럼 생긴 문을 기어가다 시피 통과해야하는데, 여간 쪽팔린 일이 아니다.


손님들 눈치를 보다가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으면, 얼른 들어가서 예의 그 우수에 찬 눈빛으로 사연을 읽어주었다. 


근데, 너무 급하게 들어가는 바람에 윗부분에 머리가 찍혔다.  옆에서 보고있기에도 매우 아파보였다. 고통에 얼굴이 시뻘게 졌는데, 차마 아픈 내색은 하지 못했다. 나는 어린 나이임에도 저것이 프로정신이구나 느꼈다. 떡볶이집 DJ가 뭐라고 저렇게까지 했을까? 몇년 후 텔레비젼에서 그 형을 보았고, 탤런트 이창훈이 되어있었다. 


즉석 떡볶이는 수익율이 좋아서 어머니는 승승장구하셨고, 자산을 모을 수 있었다. 아버지는 한석봉 이야기를 들려주며 엄마는 열심히 떡을 파니, 너는 열심히 공부하라며 응원해주셨다. 덕분에 나는 분발해서 외고에 진학했고, 서울에 있는 대학을 나올수 있었다. 판검사까지 되어야 이야기가 멋있는데, 내 머리가 그 정도는 아니었다. 그냥 글쓰는 자영업자가 되었다. 


떡볶이는 누군가에게는 간식거리지만, 누군가에게는 삶의 동아줄 같은 음식이다. 


어머니의 성공을 보고 먼 친척분들이 노하우를 원하셨고, 어머니는 그들에게 기꺼이 가게를 양도했고, 몇몇분을 구원했다. 그 중에는 신용불량에 이혼전까지 갔다가 마지막이다라는 심정으로 달려드신 분도 계시다. 그 분도 몇년사이에 자산가가 되었다. 


요즘 부의 추월 차선이라는둥, 인플레이션으로 재테크해야 한다는 둥 이야기 많이 듣는다. 어딘가에 종속되지 말고 결국 자기 사업하라는 이야기다. 내 밥, 내 손으로 먹으라는 것. 


그날 떡볶이 집에는 중년의 손님들이 많았다. 떡볶이가 끓기 시작하자, 밀가루 냄새가 확 올라왔다. 식성이 좋은 편인데, 냄새가 역해서 많이 먹지는 못했다. 쿨피스에 밥까지 볶아먹는 아내를 보며, 떡볶이 좋아하는 여고생처럼 보였다. 모두 나와 같은 추억을 가진 사람들이 올 것이다. 마복림 떡볶이는 코카콜라처럼 브랜드가 되었다. 


*마복림 할머니는 2011년에 91세로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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