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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대문 김사장 Sep 07. 2022

아름다운 복수.

아버지의 오른팔.

내가 9살 때, 아버지는 장애인이 되었다. 어느 회사의 전기 기술자로 재직중이었다.  며칠동안 어머니와 싸웠다. 아마 집 문제 때문인 것 같았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현장 기술자가 안전 사고를 당하는 대부분의 경우가 출근 전 부부싸움이다.


그날 오후에 아버지 사고 났다는 전화가 왔고, 전화를 받고 데굴데굴 구르던 어머니 모습은 지금도 선명하다.


산업재해라는 개념이 없던 시절이라 풍지박산이 났다. 집은 날아갔고, 나와 동생은 친척집을 전전했고, 어머니는 아버지 간호와 법정 싸움을 했다.


오른 팔 절단 수술을 받고 6개월 뒤에 퇴원했다. 창신동 산꼭대기에 쪽방에서 네식구가 살았고, 쌀 살 돈이 없어서 동사무소에서 라면 배식을 받아왔다. 그 동네가 얼마나 높았냐면, 굉장히 긴 계단이 있었는데 한 어린아이가 근처에서 바퀴달린 말을 타고 놀다가 계단으로 한참을 굴러떨어지는 모습을 내눈으로 본 적도 있다.


당시 아버지 나이는 36이었다. 사람을 만나면 악수를 못해서 뻘줌했고, 고깃집에서 쌈을 싸먹지 못했다. 아버지는 절단된 팔이 다시 자라는 꿈을 자주 꾸었고, 스타워즈의 제다이가 로봇팔을 쓰는 것을 보고 직접 의수를 만들기도 했다.


뒤돌아보니 가장의 오른팔은 집의 기둥이다. 아무리 제대로 앉으려해도 마음이 편해지지 않은 의자처럼, 이유를 알수 없는 불균형과 불안과 낙담이 집을 지배했다.  그 기둥이 무너지자 어머니가 안간힘으로 받쳤다. 장사를 시작했고(신당동 떡볶이), 돌아오면 집안일을 했으며, 나와 동생을 돌보았다. 가끔 어머니는 그때 일을 떠올리며, 당신이 도망가지 않고 나와 동생을 지킨 것이 너희들에게는 얼마나 다행이었냐고 했고, 나는 엄마가 자식에게 할 이야기인가 싶다가도 더 나이를 드니까,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일이다.


당시 아버지의 친척과 친구들은 90%가 등을 돌렸다. 그 중에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빌려준 돈을 떼일까봐 돈 받으러 온 사람도 있었다. 신기한 것은 수십년 뒤에 그 사람들이 다시 오랜 친구같은 얼굴로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내 결혼식때는 참 많은 하객이 오셨다. 인생의 복수는 말빨이 쎄서 상대를 굴복시키거나, 드라마에서처럼 시원하게 사이다를 내뿜는 것이 아니다. 그냥 잘 사는 거다.


날 차버린 여자, 날 짜른 회사, 꼴배기 싫은 선배, 나를 깍아내린 무리들, 우리 엄마 놀린 철이...어떻게 엿먹일까 고민하지 말자. 그냥 잘 살면 된다. 시간으로 만들어진 복수는 명료하다.


세브란스 병원 홍종원 교수가 뇌사자의 팔을 이식하는데 성공했다는 뉴스를 보았다.  17시간의 수술과 억대의 수술비가 든다. 동사무소에서 라면 배식 받았던 기억이 생생한데, 이제 이 정도는 능력이 된다. 내 맘대로 진료예약을 하고, 아버지에게 전화했다.


'쇼생크 탈출'의 레드처럼 아버지는 팔 하나 없는 삶을 만족해 하셨다. 팔 하나 없는 수인囚人 생활이 편하다고, 그래서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사실 고령에다가 당뇨에 저런 큰 수술은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齒가 없으면 잇몸으로 살면 되고, 하드웨어가 없으면, 소프트웨어로 살면 된다.


오른팔 하나를 코딩하는데 수십년이 걸렸다. 그 오른팔은 우리 가족이 함께 만들었다. 이제는 진짜 팔 보다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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