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때 영어과외를 받았다. 외대 영문과에 다니는 누나였다. 우리집 근처에 살고 있어서 알음알음으로 소개받았다. 지금이야 스물둘이라고 하면 애기같지만, 중학생인 나에게 그 누나는 어른같아보였다. 갑자기 '악'소리를 내면서 씩씩거리고는 했는데, 한 공부 잘하는 남자아이가 데모하다가 끌려갔는데 어떻게 '억'하고 죽느냐는 이야기였다. 너무 불쌍하다고 눈물을 흘렸다.그때는 눈물을 많이 흘리는 시대였다. 최루탄과 억울함에.
난 공부머리가 아니었는지 영어가 어려웠고, 재미도 없고 노력도 하지 않았다. 과외 누나는 돈 받고 가르치는 이상 책임감이 있었기에 한땀 한땀 모발이식하듯이 영어 지식을 넣어주었고, 그 과정은 고통스러다. 공부하라고 협박을 하기도 했고, 회유했다. 나는 서러워서 닭똥같은 눈물이 흘렀다. 영어를 무한반복 낭독시켰고, 유격훈련 받을 때처럼 악을 썼다.
고생해서 공부한 결과, 고등학교때 제일 잘하는 과목이 영어가 되었다. 난 전형적인 문과생으로 언어를 공부하는 것이 좋고, 단어 하나 알아가는 것이 재미있다.
나이 50 되어서도 영어 학원에 가서 공부한다. 영어 단어장이 있고, 문장을 외우며 선생님이 내준 숙제를 해간다. 넷플릭스로 트루먼쇼, 쇼생크 탈출, 굿플레이스 같은 영화를 자막으로 보고, 자막 없이 보고, 반복해서 본다.
지금 다니는 학원은 1년 다 되어가는데, 시스템이 독특하다. 50분 수업을 1,2부로 나누어서 원어민 두명이 담당한다. 한 선생님하고만 수업하면 지루할 수 있고, 선생님도 매너리즘에 빠질 수 있는데, 그런 단점이 없다. 그리고 원장님이 상주해 있다. 나도 장사하는 입장이라 사장이 있는 매장과 없는 매장은 확연히 차이가 나는 것이다. 직원들은 사장님 눈치를 봐서 피곤하겠지만, 회사가 중심이 잡힌다.
선생님 한분은 메릴랜드, 다른 한 분은 루이지애나 출신이다. 모두 30대 초반의 여성이다. 여전히 영어는 어렵다. 못알아 듣겠고, 잘 표현하지도 못한다. 수험생처럼 눈에 불을 켜고 공부하는 것도 아니어서 발전도 더디다.
일본어는 내 전공으로서 일본인과 대화가 가능하다. 일본에서 일하며, 고생하면서 익힌 언어라 문법 구조가 머리에 잡혔다. 하지만 나이 들어서 시작한 영어는 물과 기름같아서 좀처럼 아기 옹알이를 벗어나지 못한다.
언어가 안되니까, 부수적인 표현수단이 발달하는데 바로 감탄사다. 오, 리얼리, 어메이징, 엑셀런트, 이그재틀리...그리고 신기하게도 이런 감탄사는 얼굴표정을 만든다.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어메이징이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런 습관은 평상시에도 이어져서 누군가 칭찬할 일이 있으면 반사적으로 나오고, 관계에 윤활유가 된다. 난 원래 칭찬하지 않는 무뚝뚝한 아저씨인데, 영어 덕분에 소프트해졌다.
필요도 없고, 소득도 크지 않은 영어를 앞으로도 공부할 것인가? 그렇다. 반평생을 살아보니까 포기하지 않는 게 남는 장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