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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니 Apr 10. 2021

조화와 균형을 찾기 위한 몸부림

지지와 책임 사이의 균형을 찾고 싶다.


나 스스로도 무엇을 바라볼 때 내 관점이 무엇이었나를 깨알같이 들여다보는 시간은 꼭 필요하다.

머리속으로 스쳐 지나가는 일들을 기억해 내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 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스스로 알아가는 과정을 통해

도대체 나란 사람이 어떻게 사고하고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바라보는 것은 꼭 필요하다.

알렉산더 테크닉은 책 속의 지식을 배우는 것도 아니고, 몸감각만 좋다고 해서 잘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몸감각이 좋다는 것을 자기 몸 구석구석을 잘 인지한다고 생각하는 것에서 출발한다면

알렉은 거기에 협응과 조화가 더해지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

그 조화와 균형에는 자신의 생각과 몸을 의식적으로 볼 수 있는지의 객관화가 필요하고 세상과 자신과의 조화와 균형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스스로를 관찰하고 맞춰가는 과정의 반복일지도 모른다.

처음 이 길에 들어섰을 때, 내가 정말 지난하고 먼 길에 들어섰다 생각했다.

"내가 내 발등을 찍었구나" 싶을만큼 깨지고 무너지고 힘든 시간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어쩌면 나는 내 생각의 틀안에서 나라는 사람을 만들어왔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생각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잘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생각이 자신이라고 여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엄청 자동반사적이고 습관적이어서 너무 당연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그 자체를 자신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수도 있다.


그래서 가끔, 자기가 짐을 지고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곁에 있으면 여간 골치가 아픈게 아니다. 그 사람은 자신의 짐을 보기 못하기 때문에 모든 원인을 밖에서만 찾으려고 한다. 그렇다고 자기 안을 못본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자기 안에서는 정말 엄청난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데 객관화가 되지 못하고 세상과의 조화가 이루어지는 과정으로 가는 걸 어려워하기 때문에 그 모든 원인은 외부에 있고 그 원인을 차단하려고만 생각하기 때문에 그 중간에 있는 사람들이 그 짐을 떠 맡는 격이 된다. 제대로 들여다 보지 못하고 그 외부 원인으로 자기가 힘들다고 생각하고 또 그 불만을 들어주는 것은 주변인들인 것이다.

이 얼마나 에너지 낭비인가.

과거의 나도 그랬다. 내가 가지고 있던 상처가 무엇이었는지조차 몰랐던 시절, 안에서 일어나는 분노와 짜증의 대상은 내 자신이 아니라 외부로만 향해있었다. 그때에는 아주 사소한 일에도 의미를 부여하게 되고, 내 안에서 싸우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반응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렇게 성격의 화가 많이 지고 쉽게 달아오르는 다혈질인 사람이 나처럼 느껴지고 그게 나라고 여기고 그렇게 살아왔었다.



그러다 어느 날, 그 모든 것들이 객관적으로 보이기 시작하더니 나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보호하지 않은 사람은 바로 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많은 분노와 짜증은 나 스스로 나에게 친절하지 못하고 나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채 무시하고 아닌 척 넘어가는데서 왔던것이다. 그래서 나를 보호하기 위한 방편으로 화를 표출하고 그 화 뒤로 내가 숨어 버리는 과정의 연속이었는지도 모른다. 안에서 불이 타고 있지만 그 불은 여전히 끄려고 하지 않은 채 겉으로 그 화력을 내뿜는 화산처럼 내내 그렇게 불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특히나 요즘 그런 과정들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나를 좀더 보호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나의 속도대로 알아가보자는 생각으로 새로운 탐색을 해볼 용기가 생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그 사람을 만나면 나는 예전의 나처럼 반응한다. 내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함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함께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의미를 느끼지 못한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지만 내색하지 않으려는 마음에서 나오는 반증일지도 모른다.


"너 왜 알면서, 아직도 그러고 있니? 니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가 아니야. 니 소중한 시간이 아깝지 않니?" 속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겉으로는 그 말이 아직 나오지 않는다.


"내가 지금 뭐하고 있지?" 이 생각이 문뜩문뜩 들때면, 스스로에게 정말 창피하기까지 하다.

도대체, 왜 말을 못하는가?




언젠가는 소리내어 말할 수 있는 날이 오겠지. 이제 내가 그 짐을 떠 맡아줄 이유도 없고, 내 에너지를 보태어 줄 의무가 내 자신에게 없다는 것을 알고는 있다. 하지만, 그런 날이 와도 그 말을 할 필요가 있을까는 생각해 보게된다. 하던대로 있는 듯 없는 듯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딱 끊어버리면 그만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제는 그 어떤 것보다 내가 편안하고 안전한 방식을 택하고 싶다. 내가 그것까지 떠맡을 필요가 있을까? 그 사람의 속도를 내가 등떠밀어가며 밟아줄 책임이 나에게 있는 것일까?

각자의 속도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데 내가 지금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오는 짜증은 그 속도를 높여주고 싶은 욕심에서 출발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내가 그것까지 책임져야 할까?


아마 이렇게 생각하는 건, 내가 그렇게 진흙탕에서 허우적거릴 때 내가 지지 받지 못한다고 느껴서 그런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때는 주말에 일본으로 가기도 하고 술을 마시기도 하고 이렇게 무작정 글을 써내기도 하고, 이메일을 보내기도 하고 했었다.

내가 지지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그 마음을 언제쯤 그냥 온전히 바라볼 수 있을지.. 지금은 그 생각을 하면 분노가 먼저 나온다. 적은 시간과 적은 비용을 들인 것이 아닌데, 그 안에서 그것을 얻지 못한 것인지 내가 그안에서 찾지 못한건인지 아직 그 분간을 찾진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내가 그것을 바라보고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게 된 것은 다행이다. 언젠간 한 발 나아갈 수 있을테니..




같은 말을 듣더라도, 전달될 때에는 자신의 해석이 덧붙여질 수밖에 없다.

쉐어링 중에도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어요."라고 누군가 말했다고 해서

정말 그 사람이 할말이 없어서 그랬다는 것인지,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 많아 말로 표현하지 못한 것인지는 당사자에게 묻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누군가는 그것을 자신의 입장을 더하여 저사람도 나랑 비슷하구나라고 해석할 수도 있고, 또 누군가는 그냥 그 사실만을 그렇게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옳고 그른게 없다. 자신이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이상 그것은 필요없는 일이다. 다른 사람들의 반응에 자신이 부흥하려고 애쓸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 못하다. 누군가 미사여구가 화려한 쉐어링을 하면 나도 그에 부흥해야만 할 것 같고 왜 나는 그만큼 느끼지 못할까에 대해 스스로를 다시 바라볼 수도 있다. 내 차례가 오기 전에 머릿소에서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걸 알아차리는 순간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게되는 걸지도 모른다.

사실, 그날 할말을 못 찾으셨던 그 분은 그 순간 감정이 복받쳐, 눈물도 흘리셨다고 하셨는데.. 같은 것을 보더라도 우리는 모두 다 다르기 때문에 다르게 해석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각자의 속도가 다 다른데, 그 속도에 내가 맞춰가야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지금은 든다.. 그 분은 또 그 순간 많은 것들을 이뤄가고 계셨던 것이다. 자신만 알게 되는 그것을.. 그것을 우리는 부러워해야하는 걸까? 아니면 그 속도를 따라가려해야하는 걸까?

그럼, 그게 정말 잘하고 있는 걸까? 잘한다는게 무엇일까? 꼭 그래야만 하는 건 없지 않을까?

그 날, 그 순간, 그 분에게 꼭 필요했던 것이 같은 과정 속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 그저 다르게 일어난 것 뿐이다.




내가 남과 다르다고 내가 틀린 것은 아니다. 그저 내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누군가는 스스로가 다르다는 것을 틀린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다른 사람의 속도에 맞춰 달리고 싶은지도 모른다. 머리로는 그렇게 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이 과정은 전혀 그렇게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각자의 다름을 인정하고 그 속도가 달라도 함께 갈 수 있고 그 안에서 또 배움들이 일어나는 것이다. 지식으로 꽉꽉채워 이 과정을 졸업할 수는 없다. 그런다고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니까.


나는 전남편을 백혈병으로 보내고나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척, 10여년을 살았다. 내안에서 사랑을 듬뿍줬으니 그런대로 잘했다 위안하면서 상처 받지 않은 척, 꿋꿋한 척, 괜찮은 척하며 그렇게 살았는데 나는 전혀 괜찮지 않았던 것이다. 겉으로 웃으며 안에 숨어있는 나 자신을 보기까지 꼬박 10년이 넘게 걸렸다. 그저 일상을 살고 내가 그것을 보려고 들지 않았다면 어쩌면 죽을 때까지 몰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발등을 찍고 다른 선택을 했던 나는 그 과정은 학교를 다니는 중에도 겪었고 교사 활동을 하고 있는 지금도 내안에서 계속 경험하고 있다. 난 정말 많은 지지가 필요한 사람이었다.




예전의 나는 모래 사장에 꽂힌 나무젓가락 위에서 허욱적리는 불안하고 흔들리는 존재였었다. 게다가 온 힘을 다해 넘어지지 않으려고만 애쓰면서 10여년을 살았다. 그러다 알렉을 만나면서 정말 내가 뭘 하고 있었는지 아주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 것 같다. 매일매일 깨지고 그런 나를 부정하기도 하고 그러다 다시 마음을 고쳐잡고 움켜쥔 채 놓지 않기를 반복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도 내가 행복할 수 있다는 걸, 그냥 몸으로, 마음으로 마스터 선생님들께서 알게해 주셨다. 브루스, 미도리, 사키코, 마샤, 밥, 타미, 아비, 로빈 아발론, 로빈 시몬, 캐시, 수잔, 말콤 선생님들의 수업과 핸즈온을 통해서 나는 지지를 받아 성장할 수 있었다. 불안하고 헤메일때마다 나를 잡아주신 선생님들이 계시지 않았다면 지금 내가 여기 있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나는 아직 그렇게 할 힘이 없다고 나에게 계속 체면을 거는 것 같다. 그래서 자꾸 그걸 부정하려는 방법만 찾고 있다. 내가 책임질 필요가 없다는 말로, 나는 그걸 거부하고 있다. 그냥 지지해주면 될 텐데 온갖 이유를 들어서 그걸 하지 않으려는 방법을 찾으려는지도 모른다.


지지하는 것이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닌데, 어쩌면 나는 그 차이를 애매하게 오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에 대해 말하는 것, 그것은 어쩌면 자신을 향해 말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저, 지금은 책임질 필요는 없어. 그런데 지지를 보내 줄 순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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