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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니 Sep 29. 2020

눈에 담긴 교실의 공포

보는 것만으로도 몸과 마음에 남는 상처들

여전히 온탕과 냉탕을 오가며

긴장과 이완 사이를 반복하고 있는 왼쪽 턱과 눈의 바깥쪽 그리고 측두근..

요즘은 마스크를 쓰고 지낸 시간이 많아서 인지

귀에 걸리는 마스크의 고무줄이 여간 성가신 게 아니다.

덕분에 내 귀는 점점 더 존재감을 갖게 되었고

긴장과 이완의 상태의 변곡점을 찾아갈 수 있는 수준이 된 것 같다.

그래 어쩌면 이런 자극이 없었다면,

그저 얼어있었던 상태가 지극히 정상이라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약간 우둔하고 멍청한 느낌의 왼쪽 눈과 턱 안쪽의 느낌이

단지 치과 치료의 결과로 아직까지 마취가 덜 풀린 느낌이라고

오해하며 살아왔으니 말이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이렇게 얼음이 얼어있는 상태에서 떠오르는 기억들은

지극히 이성적이며 스토리가 있다.

그리고 어쩌면 그 스토리에 내가 살을 붙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래 맞아. 그때 그랬지? 그래서 아마 지금 이런 걸 거야.."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시간이 지나면서 드러나게 되는 사실들은

그것이 진실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 새로운 아니.. 

기억 속에 묻혀서 나의 기억에 그런 일이 있었나 싶은 일..

아니면 그저 별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지금 나의 상태와 맞물려 떠오르는 순간들은 정말 신비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새롭게 연결된 과거의 일이 꼭 정답은 아니다.

왜냐하면 시간이 지나 그 얼음이 점점 더 녹아 형체를 잃어갈 때쯤엔

또 새로운 일들과 링크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번에 새롭게 떠오른 사건은 국민학교 6학년 교실,

매일 아침 일기장을 펼쳐 뒤집어 교단 위에 올려놓았던 그 시절.

일기를 쓰기 싫어 아침에 등교하자마자 몇 줄 적어냈던 기억들..

그림일기가 아니라서 다행이라며 수다 떨기 바빴던 그 순간에

교실 전체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단 한 사람, 담임선생님.


지금 생각해보면, 그깟 일기가 뭐 대수라고! 

하지만, 그때 일기를 써서 낸다는 것이 선생님에겐 

아이들의 복종을 의미했던 것 같다.

일기를 쓰지 않으면 교단 앞에서 따귀를 맞아야 했기 때문이다.

키가 크고 덩치가 커서 맨 뒤에 앉았던 남자아이들도 

몇 발자국 물러서게 할 위력이 있는 파워의 따귀였다.


어떨 때에는 양손으로 때리기도 했다.

손이 할 수 있는 수많은 일들 중에 제일 나쁜 것을 나에게 남겨준 시간들..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라 그 공포는 1년 동안 계속되었다.

(성과주의 사회.. 학년 1등 반의 담임 선생님은 능력 있는 사람으로 간주되곤 했던 시절)

덩치가 작은 남자아이는 그대로 날아가 쓰러지기도 했다. 

여자 아이들을 때리는 경우는 거의 없었는데, 가만히 앉아서 온 몸을 움츠리며 

그 광경을 보고만 있던 나도 맞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았는 걸 이제야 내 몸이 증명해주고 있다.




왜 유독 왼쪽 뺨이 멍멍한 느낌이 들고 

그래서 눈도 불편하고 측두근까지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고민은

치과의 기억에서 끝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얼마 전 나도 모르는 어느 순간에 지금 이 기억들이 파도처럼 밀려오면서

내가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신기하게 풀려나가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기존의 방식처럼 내가 애써 의식하여 긴장을 놓지 않아도 

그때 그 순간들이 이해되고 받아들여지기 시작하니까 좀 더 깊은 이완의 질을 맛보게 되었다고 할까?






하지만, 사실 그 어린 시절에 그 선생님은 나에겐 좋은 선생님이었다.

우리 집에도 가끔 오셨었고, 부모님과도 잘 지내셨던 좀 무섭지만 나에겐 친절한 선생님이었다.

나는 그렇게 기억하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십여 년 전 토플학원에서 국민학교 동창 P를 만났고, 

P는 여전히 선생님과 왕래를 하고 있다고 하며 뵈러 갈 일도 있다고 하며,

그 선생님이 폐암으로 요양을 하고 계신다고 했을 때에도 나는 측은지심이 들지 않았고

뒷걸음질 치는 반응을 보였는데, 그런 나 자신이 그때도 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때 나의 이성적인 기억에는 여전히 좋은 선생님이었으니까 말이다.

(P는 그 선생님과 같은 교회를 다녔었다. P에게는 아직도 좋은 선생님일지 모른다.)


그리고 이제야 그 베일이 벗겨진 것이다.

그 선생님이 나에게 직접 가해를 한 것은 아니지만, 

나의 무의식에서 그 선생님은 그저 폭력 선생님이었는지도 모른다. 

정말 그 커다란 손으로 아이들에게 따귀를 날리던 순간을 떠올리면 

아직도 내 어깨가 들썩들썩하며 움츠려 드니까 말이다.


폭행을 당한 당사자가 아니라고 해서,

그 폭행을 보고만 있었다고 해서 상처를 받지 않은 것이 아니다.



친구 J도 그런 말을 적이 있었다.

J의 언니가 엄마에게 몽둥이가 부러져라 많이 맞았는데 J의 언니는 엄마와 잘 지내지만, 

정작 맞는 걸 보기만 한 자신은 엄마와 그렇게 지낼 수가 없다고 했다.

그게 상처가 되어 J는 엄마를 보는 게 쉽지 않다고도 했다.

그때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왜냐하면 나도 줄곤 엄마한테 매 맞는 J의 언니의 역할이었으니까..


그런데, 이제야 그 말이 이해가 되었다.

눈으로도 매 맞을 수 있고 소리로도 상처 받을 수 있구나.

촘촘하게 살아있는 내 몸의 피부 하나하나가 눈으로 귀로 들어오는 모든 것들을 

고스란히 몸에 담아내고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 것 같다.






그땐 왜 그렇게 때리는 선생님 많았을까.

내 엉덩이가 남아나지 않았던 날..

이제 그 날의 기억도 나에게 왔다.

무의식적으로 움츠려 드는 엉덩이..


친구야 자수해줬으면 얼마나 좋아.

너만 빼고 다 넌 줄 알았는데..

아직도 너는 다들 모르는 줄 아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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