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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얼라잎 Oct 22. 2024

11. 아이에게는 뒷머리가 없다

자녀의 결정적 순간의 미인식과 부모의 자책 간의 상관관계에 관한 상념

남편은 아침에 출근을 위해 집을 나선 후 곧 지하철을 탔을법한 시간에 나에게 거의 매일 아이의 예전 사진 콜라주 이미지를 보내주곤 한다. 물론 나도 거의 다 가지고 있는 사진들이지만, 아침마다 아이의 지금보다 더 어릴 적 모습을 모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불과 일년 또는 길어야 2-3년 안팎의 사진들이지만 정말이지 아이의 귀엽고 깜찍한 자태에 보는 내내 입꼬리가 내려오지를 않는다. 그리고 그 흐뭇한 미소 타임의 말미에는 뭐랄까, 반쯤 희석된 아쉬움과 그리움, 서운함과 헛헛함까지 느껴지기도 한다. 아이의 그 '귀염뽀짝한' 순간을 다시는 실제로 볼 수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아이가 신생아이던 순간부터 50일, 100일, 돌을 지나 바로 만 5세 하고도 한 달 남짓 지난 어제의 순간까지도 아이는 매일 자라고 매일 변화하며, 지난 날의 아이의 모습은 이제 사진으로 밖에 만날 수 없다. 나는 아침마다 사진 속 아이의 예전 모습을 보며 그리운 아이의 모습에 대한 향수와 제법 아이 티를 벗고 잘 자란 아이에 대한 뿌듯함의 중간 지점 즈음에서 머물다 결국은 회한에 잠기는 것으로 마무리하곤 한다.


"아, 이렇게 어린 아기였는데, 

애가 뭘 안다고 그렇게까지 심하게 혼을 냈을까.

왜 더 많이 놀아주지 않았을까.

왜 더 많이 귀여워해주고 어린 마음을 알아주지 않았을까."


아이의 치명적으로 귀여운 모습에 치솟은 입꼬리가 꼭 마지막에 찾아오는 이런 종류의 후회들로 슬며시 내려가 제자리를 찾는다.


아이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하루도 빠짐없이 내 옆에 있어왔다.

내일도 그럴 것이고, 앞으로 한참 동안이나 그럴 것이다.

하지만 내일도 내 옆에 있을 그 아이가, 어제와, 오늘과 같은 아이는 아니다.

5년 1개월 17일차인 오늘의 이 아이에게는 오늘만의 특성이 있다.

아이는 내일 키가 조금 더 자랄 것이고, 얼굴도 오늘의 앳된 얼굴을 아주 조금은 벗을 것이고, 생각도 한 뼘쯤 자라나고 오늘까지는 몰랐던 새로운 어휘를 사용할 것이다.

이렇게 오늘의 아이는 내일의 아이와 같지 않다.


아이가 

“엄마 나랑 같이 놀래?”

라고 눈을 반짝이며 물어올 때, 나는 대부분 집안일 또는 다른 나의 일로 바쁜 나머지 

“지금 말고, 이따가.”

라고 일단 미뤄둘 때가 많다. 나로서는 기약없이 미뤄둔 일이지만 아이는 ‘이따가’가 언제가 될지 내내 기다리며 종종 나에게 달려와 묻곤 한다. 

“엄마, 이제 놀 수 있어?”

라고.

나는 대체로 

“아니”

라고 짤막하게 대답한다. 아이는 또 기다린다. 그러다 결국 잘 시간이 될때까지 혼자 놀던 아이에게 

“이제 놀이 그만, 정리하자.”

라고 하면 갑자기 아이가 날벼락을 맞은 표정으로 펄쩍 뛰며 소리를 지른다. 

“아니 엄마! 나랑 놀기로 했잖아! 이따 논다고 했잖아!! 근데 왜 자자그래?!!!”

나는 미안한 기색도 없이 딱 잘라 얘기한다. 

“오늘은 너무 늦었어. 내일 놀자.”

내일. 내일. 언제나 내일이다. 이따금 '주말'도 등장한다. 어쨌든 오늘이 아니라 내일 또는 다른 날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내일 놀기로 한 내 아이는 지금 나를 향해 울부짖고 있는 이 아이와는 다른 아이라는 것을 나는 자꾸만 잊는다. 그래서, 이런 나라서 나는 매번 아이의 예전 사진을 보면서 온전히 즐거워하기만 하는 특권을 누릴 수가 없는 듯하다.


오늘은 내가 너무 피곤하거나 할 일이 많아서, 

오늘은 아이가 유독 짜증을 부리거나 말을 잘 하지 않아서,

이런저런 이유로 오늘의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을 미루거나, 함께하는 시간 조차 허투루 보내면서도 우리는 내일도 역시 이 아이와 함께할 것이니 괜찮다고 생각하곤 한다.

오늘 진심을 다해 함께하지 못했던 오늘의 아이는 내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아이의 예전 사진을 들여다본다면 정말이지 이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대 그리스 철학에는 시간에 대한 두 가지 주요 개념이 있다. 하나는 크로노스(Chronos)이고, 다른 하나는 카이로스(Kairos)이다. 크로노스는 연속적인 시간, 즉 "양적인 시간"을 의미한다. 크로노스는 시계로 측정할 수 있는 시간으로,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시간의 흐름을 나타낸다. 반면 카이로스는 "질적인 시간"을 의미한다. 이는 특정 순간의 결정적이고 중요한 기회를 의미하며, 상황에 맞는 행동이 필요할 때를 나타낸다. 카이로스는 모든 것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결정적인 순간으로, 그 순간에 적절한 행동을 취할 때 그 의미가 최대화 된다.


뮤지션이 이별의 처절한 순간에 떠오르는 악상과 가사를 즉시 써서 히트곡을 만들고,

작가가 잠결에 또는 꿈속에서 마주한 영감을 잊어버리기 전에 즉시 메모한 것을 토대로 베스트셀러 책을 탄생시킨 일화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아르키메데스는 목욕을 하던 ‘순간’ 부력의 원리를 발견했고,

뉴턴은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본 ‘순간’ 중력의 법칙을 깨달았고,

케쿨레는 뱀이 뱀 자신의 꼬리를 무는 꿈을 꾼 ‘순간’ 벤젠의 고리 구조를 떠올렸으며,

해밀턴은 다리를 건너던 중 '갑자기' 쿼터니언 수 체계의 개념이 떠올라 즉시 다리 기둥에 공식을 새겨 넣었다.

이는 모두 카이로스의 사례들로, 중요한 전환점이나 결정적인 기회와 같은 인생의 중요한 순간을 직시하고, 그 순간에 올바른 행동을 취하는 능력과 관련이 있다. 즉, ‘올바른 순간을 감지하고 대응하는 통찰력’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카이로스의 개념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고대 그리스나 르네상스 시대의 조각과 회화에서 카이로스는 종종 날개와 앞머리를 가진, 그러나 뒷머리가 없는 젊은 남성으로 그려지곤 했다. 여기서 날개는 ‘빠르게 지나가는 기회’를, 그리고 ‘붙잡지 않으면 사라진다’는 것을 상징한다. 앞머리가 무성하지만 뒷머리가 없는 모습은 기회가 다가왔을 때는 잡을 수 있지만, 지나간 뒤에는 되돌릴 수 없음(더이상 잡을 수 없음)을 뜻한다. 결국 카이로스는 영원히 지속되는 시간이 아니라 ‘한정된 순간의 기회’를 의미한다.


이렇게 보면 아이와 함께하는 매 순간이 카이로스의 시간이다.

다시는 오지 않을, 한 순간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결정적인 시간.

내가 매일 아이의 예전 사진을 보며 온전히 행복함과 뿌듯함만으로 가득찬 미소를 지을 수 없는 이유는 아이에게 매 순간 최선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그 이유는 아마도 오늘과 같은 아이가 내일에도, 모레에도, 언제까지나 내 곁에 있을 것이라는 착각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아이의 오늘은 지나가면 돌아오지 않는다.

아이에게는 뒷머리가 없다.


카이로스적 순간을 놓치지 않고 위대한 업적을 이룬 선인들처럼, 아이와 함께하는 그 매일 매일의 ‘결정적인 순간’을 준비된 마음으로 포착한다면 ‘후회없이 아이를 키워낸’ 위대한 부모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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