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얼라잎 Oct 23. 2024

12. 잊혀지는 아이

자녀의 존재에 대한 망각과 부존재의 기억 간의 모순에 관한 고찰

6살 나의 딸은 아침  8시 반에 나와 함께 집을 나서 유치원 셔틀 버스를 타고 등원했다가 오후 4시에 같은 버스를 타고 하원을 한다. 나는 요즘은 집에서 일을 하지만, 아이가 돌이 지난 직후 회사에 복직하여 한동안 아이를 두고 회사로 출퇴근하는 기간이 있었다. 아이를 키우는 모든 부모가 비슷할테지만, 아이를(특히나 돌쟁이 어린 아기를) 놓고 나오는 발걸음은 늪에 빠진 것마냥 무거운 반면(물론 마음이 더 무겁다), 아이가 아프거나 어떤 특별한 일이 있지 않은 이상 회사에 출근을 하고나면 마음이 어느 한 편 홀가분해지며 일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물론 바쁠 때는 아이의 존재 자체를 잊을 때도, 내가 아이를 키우는 엄마라는 것조차 잊을 때도 있다. 이러한 아이에 대한 망각이 공간의 변화(집에서 사무실로)에 기인한다는 생각이 완전히 나의 착각이었다는 것을 내가 집에서 일을 하게 되면서 알게되었다.


나는 아이가 없는 동안 집에서 일도 하고 마음대로 쉬기도 하고 가끔 요리도 하는데, 아이가 없을 때는 아이의 존재감이 가득한 집에서 조차 좀처럼 아이의 존재를 느끼지 못할 때가 많다. 심지어 아이가 아침 등원 전에 가지고 놀던 장난감이 거실에 나뒹구는 모습을 보면서도 딱히 아이를 기억하거나 떠올리지는 않는다. 내 나름대로 분주한 일상을 보내다 아이가 하원해서 집에 올 시간이 되어 기계적으로 아이를 맞이하러 집을 나설때면, 나는 거의 매일 쏜살같이 지나가버린 시간에 한탄을 하곤 한다. 나는 아이의 존재를 자주 잊고, 아이가 유치원에서 너무 빨리 돌아온다며 불평을 일삼는 엄마다.


얼마전까지만해도 이런 나의 모습을 직면할 때면 나는 늘 자책하고 괴로워했다. ‘아니, 그렇게나 사랑한다며? 이 아이때문에 산다며 입버릇처럼 말하지 않았니? 너란 인간은 대체…’라며 이따금은 나 자신을 경멸하기도 했다. 자기 혐오와 자책으로 인한 심리적 부하가 점차 가중되어가던 어느 날, 나는 내가 아이가 없을 때 그녀의 존재를 자꾸 잊는 것에 대한 죄책감을 일부나마 떨쳐버리려, 또는 그 현상에 대한 어떤 이론적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관련된 연구를 찾아보았다. 그런데 나의 탐구 결과 부모가 아이의 존재를 잠시나마 잊는 것은 학문적으로 다양한 이론으로 뒷받침되는 자연스러운 현상임에 틀림 없어 보인다. 나의 경우와 유사하게 잠시 아이를 기억에서 지우는 현상은 크게 세 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

첫 번째, 인지 과부하(Cognitive Overload) 이론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사람의 주의력은 한정되어 있어 동시에 여러 가지 복잡한 일을 처리해야 할 때 주의 자원이 부족해지며, 이로 인해 중요한 정보(여기서는 자녀의 존재)를 일시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거나 잊을 수 있다. 즉 부모가 업무나 개인적인 스트레스 등으로 인지적 과부하 상태에 있을 때, 자녀에 대한 주의가 순간적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 작업 기억(Working Memory)의 한계(Limitation)와 간섭(Interference)이다. 인간의 작업 기억은 제한된 용량을 가진 단기 기억 체계로, 순차적으로 많은 정보나 자극을 동시에 처리해야 할 때 ‘간섭’을 겪으며 특정 정보를 일시적으로 잊을 수 있다. 부모가 바쁘고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다면 일시적으로 자녀와 관련한 중요한 정보를 작업 기억에서 잊어버리는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세 번째, 마음의 부재(Absent-Mindedness)이다. 마음의 부재는 주의가 다른 곳에 집중되어 있을 때 일어나는 일시적인 기억 상실을 설명한다. 부모가 특정 문제에 깊이 몰두하거나 감정적으로 압박을 받을 때, 자녀와 같은 중요한 환경적 요소에 대한 인식이 일시적으로 약화될 수 있다. 이는 자녀의 존재를 일시적으로 잊어버리는 주요 원인이 될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과중한 업무 강도 속에 살아간다거나, 극심한 스트레스 환경에 놓여있는 것은 전혀 아니긴 하지만, 지하철 안에서 딴생각에 깊이 빠져 목적지를 지나치거나 심지어는 ‘내가 지금 어딜 가던 중이었지?’ 하며 잠시 당황하는 것을 허다하게 경험해온 나에게는 별로 놀랄 것도 없는 일인 것이다.




그렇게 얼마간의 자책감을 떨쳐가던 어느 날 우연히 미국 이민 1세 한국인 여성 부동산 투자가의 자서전을 읽을 기회가 생겼다. 작가의 성취와 업적은 놀라우리만치 대단한 것이었고 그녀의 성공 신화를 읽고 나서 나는 그녀를 몇 안되는 ‘내가 존경하는 인물’ 순위에 넣을 만큼 존경하게 되었다. 자서전인 만큼 작가는 그녀의 성공 스토리 뿐 아니라 삶의 역경과 아픔까지도 허심탄회하게 공유하였는데, 거기에는 뼈아픈 가족사도 있었다.


작가의 큰 딸이 결혼하여 첫 딸을 낳았고, 작가에게는 첫 손주였다. 얼마나 사랑스럽고 의미있는 존재였을까. 그런데 그 손녀딸은 생후 몇 개월이 되지 않아 뇌에 심각한 문제가 있어 얼마 더 살지 못한다는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 그것도 뇌 전문의인 그녀의 엄마 아빠로부터 말이다. 부동산 투자자로 몇 십년 간 하루도 쉬지않고 쉴새없이 달려온 작가는 그 길로 모든 일을 정리하고 딸의 집으로 들어가 살며 아픈 손녀와 최대한 많은 시간을 보내려 했지만, 그녀의 당시 유일했던 첫 손녀는 그렇게 태어난지 1년도 채우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가버렸다. 첫 딸을 하늘로 먼저 보낸 작가의 딸은 다행히 그 이후로 딸과 아들 남매를 낳고 의사로서 바쁜 삶을 살아가고 있는데, 어느 날 작가의 딸-첫 딸을 하늘로 먼저 보낸-이 작가에게 전화를 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엄마, 나는 일이 바쁘면 살아있는 내 아이들은 가끔 잊어버려.
그런데 하늘에 간 딸은 일분 일초도 잊을 수가 없어.

두 아이의 엄마로서, 또 의사로서의 삶이 얼마나 눈코뜰새 없이 바쁘겠는가. 그런 그녀가 하늘로 먼저 보낸 딸은 단 한순간도 잊을 수가 없다고 한 말이 내 마음을 너무도 고통스럽게 후벼팠다. 나는 그 부분을 읽으며 울고 또 울었더랬다.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다시 눈물이 흐른다.


‘단 한 순간도 잊을 수 없는 존재’

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런 기억이, 존재가 과연 있기나 할까? 그게 정말 가능한 현상일까?

심리학적으로 보면 이는 ‘트라우마 기억’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극단적으로 부정적인 경험은 트라우마 기억을 형성하며, 이는 종종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와 관련된다. 트라우마 기억은 일상적인 기억보다 더 자주 회상되며, 감정적으로 매우 생생한 형태로 남아있다.

뇌 신경학적 관점에서는 이를 강렬한 감정에 의한 ‘기억의 강화 메커니즘’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뇌의 편도체는 감정적 반응을 처리하고, 해마는 기억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감정적으로 강렬한 경험은 이 두 뇌 영역 사이의 상호작용을 강화하여 더 오래 기억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 순간도 잊혀지지 않는다는 것’은 이런 이론들로는 도저히 설명될 수 없는 현상이다. 나는 일분 일초도 쉬지 않는 기억에 대한 그 어떤 연구도 찾을 수 없었다. 일상적인 기억보다 더 자주 회상되며 감정적으로 매우 생생한 형태인 트라우마 기억도, 매우 강렬한 감정적 각인으로 인해 특정 사건을 마치 사진처럼 생생하게 기억하는 플래시벌브 기억(Flashbulb Memory)도 ‘단 한 순간도 잊을 수 없는 존재의 기억’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심지어 나는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공간에서 그 아이의 물건을 보면서도 아이의 존재를 잊곤 하는데 말이다.

그건 아마도, 

이 생을 사는 아이들은 눈에 보이지 않으면 잊혀질 수 있지만, 

먼저 하늘로 간 아이들은 이 생을 사는게 아니라 부모의 영혼에 살기에 잠시도 잊혀질 수 없는 것이리라.




오늘도 어김없이 오후 4시가 되니 유치원 버스에서 짠 하고 나타난 내 딸을 보며 일순간(정말이지 일순간일 뿐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행복감에 휩싸인 나는 버스에서 채 내리기도 전부터 시작한 이야기를 집까지 오는 동안 쉴새없이 종알종알 늘어놓는 딸을 감격스레 바라보며 묻는다.

“아유 이뻐라, 00이를 보니까 엄마가 또 너무 행복하네! 엄마 행복하게 해주려고 이렇게 재깍 달려왔어??”

내가 이 말을 하는 동안에도 멈춤없이 재잘대던 아이는 잠시 말을 멈추고는 살짝은 어이 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대답한다.

“아니? 나는 그냥 유치원 끝나서 온 것 뿐이거든?”

그 귀여우면서도 새초롬한 정답에 나는 한바탕 크게 깔깔 웃으며 아이의 손을 꼭 잡는다.

“집에 가서 포도 먹자!”

“샤인머스캣이야? 까만 포도야? 그냥 포도는 안먹어! 셔!! 시다고!!!!”

“하…”

조금 전 내가 느낀 그 감정이 그야말로 ‘찰나의 행복’이었음을 다시금 깨닫게 해주는 나의 아이이다.




나는 이제 더이상 내 아이의 존재를 자꾸 잊는다는 것에 자책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아이를 가끔, 더러는 자주, 이따금은 까맣게 잊을 수 있음에 감사한다.

그리고 내가 아이의 존재를 얼마나 많이 또 오래 잊었건, 오후 4시면 어김없이 짠 하고 나타나 “엄마!”라고 표효하며 다시 한 번 내가 누구인지를 일깨워줌에 감사한다.


마지막으로 나는 정말이지 조심스레, 결코 한 순간도 잊을 수 없는, 부모의 영혼에 살아가는 자녀를 둔 이 세상의 모든 부모들에게 나의 시답잖지만 진심 어린 사랑과 위로의 마음을 간절히 전하고 싶다.

이전 12화 11. 아이에게는 뒷머리가 없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