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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얼라잎 Nov 19. 2024

당신은 삶을 얼마나 신뢰합니까?

일상공감 01.

나는 나의 삶을 신뢰하며, 그렇다고 믿으며 살고 있다.

내 작은 머리통으로 세상의 이치를 알 수는 없어도, 우주 또는 소위 '신'이라고 불리는 조물주가 이 세상과 인간을 만들고, 살아가게 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으며, 그 이유라는 것이 결코 '죽도록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왜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났는가?'라는 인간의 근원적 질문에 대해 장님 코끼리 더듬는 것에 비할바도 없이 맹꽁이스러운 답이라도 내놓을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부터이다.

내가 이 아이를 낳은 이유가 무엇일까. 적어도 나는 이 아이를 위대한 인물로 길러내 세계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세우도록 하거나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의도로 아이를 낳지 않았다. 그럼 나의 행복을 위해서? 그렇다고 할 수만은 없다. 아무리 곰곰히 생각해도 나는 아이와 함께 행복하려고 아이를 이 세상에 내놓았다. 아니, 내가 한 일은 몸을 빌려준 것 밖에 없으니, '내놓고자 했다'라는 표현이 맞겠다. 이 아이에게 행복을 주고, 나도 이 아이와 더불어 행복하려고 나는 아이를 낳고자 했다.

나는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아이를 탄생시킨 나의 의도와 조물주의 그것이 그리 크게 다르지는 않으리라 믿게 되었다. 성경에서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했다고 하질 않았나. 그 형상이라는 의미가 결코 겉모습이나 육체는 아니리라. 본질을 의미하는 것일테다. 그래서 나는 나를 비롯한 모든 인간들이 이 세상을 살며 행복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방식으로든. 비록 인간들이 행복하게 살고 있건 그렇지 않건 간에.


이렇듯 삶을 신뢰하는, 적어도 신뢰한다고 믿는 나는 내 삶의 결정적인 순간에, 예를 들면 너무도 간절히 원하는 일자리의 최종 면접과 같이 "제발 내 뜻대로 되었으면 좋겠다"라는 바람의 끝에 항상 이렇게 덧붙이곤 한다. "혹시 뜻대로 되지 않더라도, 나는 내 삶을 신뢰해. 분명 더 좋은 길로 이끌어줄거야." 이러한 신념은 나를 시련 앞에서 강하게 할 뿐 아니라 시련을 시련으로 받아들이지 않도록 해준다. 그야말로 뜻대로 되지 않아도, 온 우주에 감사하게 된다. 그리고 기대하게 된다. 다른 어떤 길이 펼쳐질까, 하고.




나의 남편에게는 꽤나 많은 사촌 형제들이 있다. 그들 중에서 소위 '가장 성공한 인물'을 꼽으라면 옛 트위터에 입사하여 바이스 프레지던트를 지내다 몇 년 전 스타트업을 창업해 큰 규모의 투자를 받아 사업을 이끌고 있는 사촌 동생이다. 그는 현재 뉴욕 맨하튼의 아름다운 집에서 19개월짜리 아들과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살고 있다. 한국인 아빠와 백인 엄마에게서 태어난 그 아이는 정말이지 깜찍하게 생긴 외모로 보는것만으로도 사랑이 샘솟게 하는 매력을 지녔다. 며칠 전 그 아이의 할아버지, 그러니까 나의 남편의 이모부로부터 그 아이의 소식을 들었다. 아이가 이름 모를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고열에 시달리던 중 경기를 일으키다 못해 숨이 멎었다고 한다. 아이의 부모는 인공호흡으로 응급처치를 했고 911에서 출동하여 아이를 응급실로 옮겼다. 병원에서는 아이가 위험한 상태라고 했고, 긴 시간 처치실에 있었다. 그 아이의 아버지, 그러니까 남편의 사촌동생은 아이가 처치실에 들어가 격리된 동안 그가 믿는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이 아이를 저에게 주시고, 19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함께 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두개골에서 영혼이 얼마간 비쭉 퉁겨나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아이가 생사의 문턱을 넘나드는 순간에 부모된 자로서 자신이 믿는 신에게 올리는 기도가 "제발 살려주세요"가 아니라 "지금까지 이 아이와 함께 할 수 있어 감사합니다."라니 말이다. 그는 무슨 알려지지 않은 위대한 성인이라도 되는 것일까.


일 년에 한 두 번씩 한국으로 다니러 올 때면 많은 사촌들 무리들을 불러모아 치킨을 사주며 어눌한 한국말로 어색한 농담이나 하던 그가 보여준 삶에 대한 태도에 나는 존경심을 넘어 경외심까지 들었다.

만약 그에게 일어났던 그 일이 나에게 벌어졌다면 어땠을까. 나는 신 앞에 내가 가진 미천하기 짝이없는 소유물들을 하나씩 꼽으며 그것들을 다 포기할테니 이 아이만은 살려달라 흥정을 했을 것이다.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그보다는 먼저 악다구니를 썼을 것 같다. 당신, 지금 이게 나한테 뭐하는 짓이냐고. 당신이 뭔데 나의 목숨같은 아이를 줬다 마음대로 빼앗아가느냐고. 왜 나한테 이러느냐고. 당신은 신이 아니라 악마라고.


상상만으로도 피를 토할 것 같은 이런 생각의 소용돌이 틈에 내 안의 무언가가 나에게 물었다.

왜 그러면 안되는데?
왜 너한테는 이런 일이 일어나면 안되는데?


전 세계의 하루 평균 사망자 수는 약 15만 명에 달한다. 그런데 그것이 왜 나의 아이일 수 없는가. 무엇이 그토록 당연한가.

내가 가진 모든 것들, 부모, 가족, 아이, 건강한 몸... 이 모든 것들이 왜 나에게 당연한가?

전 세계적으로 양쪽 부모를 모두 잃은 완전 고아는 약 1,780만 명으로 추산된다. 또 전 세계 인구의 약 15%인 10억명이 장애인이다. 뿐만 아니라 전 세계 성인 인구의 약 17.5%가 생애 한 번은 불임을 경험한다. 불임은 특정 지역이나 소득 수준과 무관하게 나타난다. 

부모가 없는 사람도, 가족이 없는 사람도, 아이를 갖지 못하는 사람도, 건겅하지 못한 사람도 이 세상엔 널리고 널렸다. 그런데 왜 내가 그것들을 갖는 것이 당연한가? 그 중 하나도 아니고 전부를? 내가 무엇이길래?

당연한 것은 없다. 이 모든 것들이 내게 당연한 것이 아님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내가 가진 모든 것에 감사할 수 밖에 없다. 도저히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이렇게 내가 가진 것에 감사한다.


그렇다면 나의 감사와 위에서 언급한 사촌동생의 감사는 과연 같은 것일까?

질문을 바꿔보자.

아이가 죽어가는 순간에 신에게 감사 기도를 올렸던 그와 나는 무엇이 다른가?

무엇이 그와 나를 구분짓는가? 신의 관점에서, 우주적 관점에서 그와 나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나는 그 답을 '삶에 대한 태도'에서 찾았다.

그는 그의 삶을 완벽히 신뢰하고, 나는 그렇지 않다. 끊임없이 의심하고 그렇기에 불평한다. 자신의 삶을 온전히 신뢰하는 자는 어떤 결핍도, 시련도, 뭇 사람들의 눈에는 불행으로 보이는 것들도 모두 '나의 삶에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여기지만, 자신의 삶과 인생에 밑도 끝도 없는 회의를 품는 자에게는 삶의 모든 순간이 불확실성으로 다가오고, 따라서 숨쉬는 모든 순간이 불안하고 불행하다. 들숨에 의심하고 날숨에 불평한다.

'나의 삶은 시작되는 순간부터 끝을 맺는 순간까지, 어떤 일이 일어나든 결국 매일 매 순간 완벽한 그림을 그리는 중이다.'라는, '결국은 모든 것들이, 모든 일들이 나의 삶에 꼭 필요하며, 반드시 좋은 것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순도 100%의 믿음을 갖는 자와, 나와 같이 삶을 신뢰한다고 스스로 믿으면서도 위기의 순간에는 삶을 의심하며 원망하는 자의 차이는 결국 삶에 대한 태도에 있다.


그와 나는 두 살 차이가 난다. 나도 그와 마찬가지로 같은 IT 업계에서 일하다 스타트업을 창업하고자 했다. 나는 기껏 국내에서나 유명한 회사의 수많은 직원 중 한 명일 뿐이었고, 

그는 세계적 기업의 바이스 프레지던트를 지냈다.

나는 창업을 누구보다 열심히 준비했지만, 결국 투자를 받지 못했고 개인 자금도 없었기에 포기했다.

그는 얼핏 듣기에는 별것도 아닌 것 같은 사업을 시작한다고 했고, 당연히 훌륭한 멤버들과 함께 했으며, 미국의 몇 대 자산가의 아들과 결혼한 그의 여동생으로부터 엄청나게 큰 규모의 투자를 받았다.

나는 그와 나의 이러한 현격한 차이를 두고 마음 속 깊이 시샘하는 한 편 이렇게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그는 부모님이 어릴 때 미국으로 유학을 갔기에 미국에서 학교를 다녔고, 그래서 아이비리그 대학에도 진학할 수 있었어. 아이비리그를 나왔으니 트위터에 들어가서 부회장까지 했겠지. 나도 그와 같은 환경이었다면 당연히 할 수 있었어. 그리고 투자를 받은 것도 봐봐. 전문 VC가 아니라 결국 가족한테 투자를 받은거잖아. 그 돈으로 뉴욕 맨하튼에 멋들어진 집을 짓고 살 수도 있는거고. 돈이 넘쳐나는 미국의 재벌가를 사돈으로 두었으니, 삶이 얼마나 편안할까. 결국 내가 그에 미치지 못하는 건 그의 환경탓이야. 능력이 아니라고.'

나는 그를 알게 된 그 날부터 지금까지 몇 년에 걸쳐 줄곧 이렇게 생각해왔고, 그 생각은 믿음이 되었다. 결국 나의 재능과 능력도 그에 못지 않으나, 그는 환경이 뒷받침이 되어 그 모든 것들을 누리는 것이고, 나는 반대라고. 그렇게 믿으며 초라한 내 자신을 다독여왔다.

하지만 그렇게 몇 년이 지난 지금, 그가 가진 삶에 대한 태도를 목도하고 나니 나의 논리와 셈법에 완전히 오류가 있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삶이 그에게 주는 것들을 충분히 담기에 합당한 그릇을 지녔고, 그의 삶의 모든 좋은 것들을 누릴 자격이 있다.

나도 딱 나의 그릇만큼 삶이 주는 것을 담을 수 있었고, 지금 나의 삶의 모습은 내가 만든 것이다.

아이비리그, 전성기 시절의 트위터, 트위터 부회장 승진, 적절한 시기의 창업, 정확한 타이밍에 넉넉한 금액의 투자금, 지성과 인성과 미모를 겸비한 아내, 너무도 사랑스러운 아들, 뉴욕 한 복판에 지은 집... 그야말로 삶을 온전히 신뢰하는 자가 누리기에 합당한 삶의 모습이다. 그가 이런 삶을 살기에 삶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아이가 죽는 순간에는 삶을 원망했어야 옳다. 순서가 틀렸다. 그 자신이 삶을 온전히 신뢰하기에, 신뢰할 만한 삶이 그에게 주어진 것이었다.


삶은 진정 그것을 대하는 자의 태도에 걸맞게 그를 대우한다.

삶에 무조건적인 신뢰를 보인 자에게 삶은 무조건적으로 신뢰할 수 밖에 없을만한 세상을 안겨주었다.

삶을 의심하고 인생에 회의적인 자에게 삶은 딱 그 사람의 태도와 동일한 삶을 선사하리라.


당신은 당신의 삶을 얼마나 신뢰하는가?

어떠한 일이 생겨도, 그것이 종국에는 나라는 사람의 인생 그림을 완벽하게 완성하는 데 꼭 필요한 한 획이 되는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가?


인생은 내가 한 치 앞도 보지 못하기에 불확실성 투성이로 보일 뿐, 매 순간이 가장 완벽한 작품을 만들기 위한 정확한 획의 방향으로 흘러간다. 당신이 길을 잃었다 느끼는 그 순간에도 그 작품은 완벽히 그려지고 있다는 것을 온전히 신뢰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나도, 당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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