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왔다는 증거

by 김자혜


허리가 꼬부라진 윗집 할머니가 두 팔을 흔들며 걸어간다. 기세는 엄청나게 맹렬한데 속도는 또 놀랍도록 느리다.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 네이녀언! 당장 누구 머리채라도 잡을 기세로 걸어야 그나마 저 느린 속도로 걸어갈 수 있는 나이. 시골 노인들 특유의 어깃장을 마주할 때면 도시 노인들의 무기력을 볼 때와는 또 다른 슬픔을 느낀다.


그런데 씩씩하게 걸어가던 할머니가 갑자기 주저앉아 그 자리에 뭉그러진다. 아. 올 것이 왔구나.

어딜 가나 할머니들이 쭈그려 앉아 땅을 파고 있다면, 그곳이 자기 밭이 아니라 길가나 빈 땅이라면 여지없다. 그것은 이 동네에 봄이 오셨다는 증거다.


쑥과 머위, 냉이와 달래를, 그리고 내 눈에는 잡초밖에 아닌 것들을 맨 손으로 쥐어뜯는 할머니들이 봄이 왔음을 확실하게 알린다.


봄은 왔는데 공기는 질이 나빠 눈앞이 부옇다. 엊그제 만개한 매화를 보며 나는 무안한 기분을 느낀다. 있는 힘을 다해 꽃을 피웠는데 이게 웬 봉변인가. 꽃은 폐가 없으니 괜찮으려나. 그렇다면 폐를 가진 동물들은 어쩌나. 산새들은. 길고양이들은. 막 태어난 어린 아이들은. 한참 뛰어 놀아야 할 소년들은 또 어쩌나. 나는 미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