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이른 시간부터 분주했다. 나는 밤새 뒤척이느라 잠을 떨쳐버리지 못한 눈을 게슴츠레 떴다. 동시에 고소한 냄새에 이끌려 부엌으로 향했다. 김밥 양끝으로 고개를 빼꼼 내민 핑크색 소시지를 보자 눈이 커졌다. 별로 환영받지 못하는 단무지와 시금치는 사뭇 다른 위세로 뻗쳐 나와 있었다.
나의 극대화된 설렘이 이쯤에서 그대로 연장되었더라면 좋았으련만, 점점 우중충해지는 하늘이 자꾸만 신경 쓰였다. 얄궂게도 덕수궁으로 가는 도중에 빗줄기는 내 뺨을 적시기 시작했다.
"우산 챙겨."
집을 나서기 전에 엄마의 목소리가 귓가에 메아리치듯 맴돌았다. 왠지 한쪽으로 찌그러진 우산에는 손이 가지 않았다. 그 말을 귓등으로 흘린 나는 그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비를 피해 빠르게 걷던 발걸음은 등에 겨우 매달린 가방을 점점 들썩이게 만들었다. 가방 깊숙이 넣어둔 종이로 만든 도시락을 열자, 형체는 온데간데없는 묘한 비빔밥 직전이 되고 말았다. 친구들이 볼까봐 민망했다. 멀찌감치 앉아 빗소리를 들으며 먹으니 그래도 꿀맛이었다. 내 인생 첫 번째 소풍은 이렇게 각인되고 말았다. 병원 신세를 지느라 초등학교 3학년이나 돼서야 비로소 맛본 나들이였건만.
당시만 해도 흔히 먹지 못하는 김밥이었다. 적어도 우리 집은 그랬다. 그것도 소시지가 든 호사스러운 김밥 하나로 설레었지만, 하필 심술궂던 비를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운치라는 단어조차 몰랐을 그 시절을 한참 지난 이 나이가 돼서야 그것도 운치였고 추억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비에 젖어 풀내음 가득한 고궁에서 고소한 참기름 향까지 더해진 기억의 편린이 지금도 코끝을 스친다.
그 이후 소풍 얘기만 나오면 마음은 이미 고궁에 가 있었다. 하지만 각지고 꽉 막힌 틀속에 갖혀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터지고 찌그러졌던 못난이 김밥은 어린 나이에 보기에도 부모님의 삶과 무척 닮아 있었다. 그래서 김밥만 보면 거기엔 설렘과 동시에 고단함도 담겨 있었다. 그 이후 소풍은 김밥 마는 수고 대신 차라리 밥에 반찬을 가져가는 편을 택했다. 엄마는 내게 왜 그러는지를 물어 보았지만 지금까지 이유를 알지 못하신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나는 분식집의 김밥만 보면 못 본 척 지나치곤 한다.
그리고 며칠 후, 등교를 하려는 데 오늘도 엄마는 개시도 하기 전부터 물건 값을 깎아달라는 동네 아주머니에게 시달리고 계셨다. 이젠 그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위세 당당함에도 익숙해 질 법 한데 어린 마음에도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렇게 흥정에 응해 주었건만 결국엔 외상이었다. 여러 외상이 남긴 후유증은 한참이나 받지 못하는 일들이 다반사였고 또 그렇게 생긴 깊은 시름은 껍데기만 남은 나무처럼 곯아 있었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와도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엄마가 한참 늦은 점심을 드시다 말고 신문지를 덮어두고 손님을 응대하는 모양이었다. 손님을 겨우 보내고 다시 한 술 뜨려는데 누군가 가게로 들어왔다. 이미 식을 대로 식어버린 국에 말아 놓은 밥, 그 옆에 두 개의 찬은 오늘 중에 엄마의 허기를 과연 달래줄지 애잔하기만 했다. 부모님, 특히 엄마는 불규칙한 식사에 고객들이 얹어놓은 마음의 짐들까지 더해져 깊은 트림을 자주 하곤 했다. 약도 듣지 않는 만성 위장병은 어머니를 괴롭히는 오래된 숙주 괴물 같았다. 그러다 보니 내가 진상으로 간주한 고객 몇 분을 흘겨보곤 했었다.
어린 내가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하루의 일과를 늦게 마친 두 분은 코를 무척 고셨다. 종일 고단했을 육신이 편히 누울 잠자리를 펴드리기로 했다. 무거운 솜이불을 고사리 손으로 펼쳐 놓기엔 생각보다 버거웠다. 엄마는 내가 그랬던 첫날 놀라는 것도 잠시, 나를 품에 껴안고는 눈물을 글썽이셨다. 기뻐하시는 부모님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나에게는 묘한 설렘이었다. 부모님을 위해 내 마음 안에 있는 설렘을 유발할 가지들이 조금씩 뻗어나갔다. 몇 푼 모아 둔 용돈으로 검정 비닐봉지에 떡을 담아 어버이날에 드린 것을 내 나이 오십이 넘은 지금까지 잊지 못할 기억이라고 말씀하시곤 한다.
설렘은 왠지 모를 기대감에 기뻐서 나는 웃음이나 또는 감격스런 눈물의 결합체로 상승하기도 한다. 그 속에 고마움이 피어나기 때문에 일상의 묘약이나 다름없다. 나에게는 엄마가 싸준 첫 소풍 때의 김밥이 그랬다. 소시지 하나만으로도 잠시나마 가난을 잊을 수 있었다. 언제 또 다시 올지 모를 김밥이었고, 또 다가올 소풍을 강한 설렘으로 기다릴 수 있었다.
이젠 설렘을 맞이하는 기대감이 예전만 못하다. 매월 잡지사 투고용 원고를 준비하면서 그런 설렘을 조금이라도 느끼려 하고 있다. 설렘이 때로는 아쉬움으로 그칠 때도 있지만 반드시 그렇게만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비오는 날 소풍이 그랬고, 소시지 없던 일반 반찬에서도 그러했지만 그래도 잊혀지지 않고, 또 잊으려 하지 않고 기억에 두고 있는 걸 보면 단단한 설렘으로 가득했던 나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