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십, 백, 천, 만......”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헤아려봤다. 마침내 계약금이 법인 통장에 찍혔다. 하지만 이기고도 진 기분이었다. 불룩해지도록 가두었던 입 속 공기가 “후하”소리를 내며 삐져나왔다. 그 내뱉은 알싸한 공기의 질적 성분은 안도감 30%에 허탈감 70%였을 게다.
나는 마지막 피치를 있는 힘껏 끌어 올리고 있었다. 불과 30분 전까지만 해도 바짝 일어선 고양이 등짝의 털처럼 내 몸은 조바심에 휩싸여 있었다. 오전 내내 업체 A와 긴장감 넘치는 통화가 이어졌다. 입금액을 확인하자 늙은 고양이의 쭈뼛 솟구쳤던 털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아니다. 누그러졌다 라기 보다는 비에 젖어 축 처진 고양이 몰골이 그 때의 나였다. 어쨌든 누그러졌거나 축 처졌거나 결과적으로 털의 숨은 잠잠해졌다.
그 과정을 끝까지 안심할 수는 없었다. 계약금을 보낸다던 업체 A의 직원은 고양이로 빙의한 나의 털을 점점 세우고만 있었다. 컵라면이 익을 3분도 아니고, 30초면 손가락 몇 번의 터치로 가뿐하게 송금 처리할 일을 30분이나 내 애간장을 끓게 만들었다. 나는 마치 3시간쯤 흐른 듯한 아득함 덕분에 다리를 떨고 있었다.
“아니, 그쪽 사장 결재까지 이미 났다면서 송금이 이렇게 오래 걸릴 일인가.” 나 혼자 궁시렁댔다. 이렇게라도 지껄여야 숨통이 트일 것 같았기에.
견적을 처음으로 제출했던 보름 전부터 내 신경은 온통 거기에 집중되었다. 이번 달 매출에 적잖이 영향을 줄만한 금액이었다. 기존 거래처였는데, 이번엔 주문량을 많이 늘렸다. 양도 제법 늘렸으니 가격을 감안해 달라고 했다. 고민 끝에 일부 가격을 조정한 견적서를 전자메일로 제시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 연락이 없어 혹시 전자메일을 받았는지 담당자에게 전화를 했다. 바쁘다고만 하고 이내 전화를 끊었다. 그는 그리곤 잠수를 탔다. 느낌이 싸했다. 총금액이 크기도 했지만, 대표이사 체면에 그런 거래를 보란 듯이 성사시키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평소 업체 A의 담당자와는 큰 무리 없이 거래가 진행되곤 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견적서가 누더기가 될 정도로 담당자는 나를 이리 저리 흔들어댔다. 바람이 불어대는 방향으로 몸을 흐느적거리고 손짓하는 길거리 커다란 홍보인형이 갑자기 생각났다. 그게 바로 나였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다시 한 번 가격 조정을 요구했다. 오랜 기간 영업을 하면서도 이런 일은 무척 이례적인 것이었다. 우리와 거래하면서 이미 알고 있던 결제 조건도 업체 A 기준으로 갑자기 맞춰 달라고 했다. 또한 업체도 이미 인지하고 있는 납기도 문제였다. 발주가 늦어져서 무척 급하다고만 했다. 그야말로 산 넘어 산이었다.
주고받은 전자메일을 확인할 일이 있어서 한참이나 스크롤 바를 내리다가 손에서 마우스를 “탁”소리 나게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국회 의사봉처럼 내 최종 결심을 마쳤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러면서 사무실이라 차마 입 밖으로 뱉어 내지 못한 속마음은 다름 아닌 ‘젠장’이었다. 오늘까지 나는 견디기 힘들 만큼 시달렸고 그걸 또 굽이굽이 고개 넘듯이 충분히 참아냈다. 흔들릴지언정 뽑히지 않는 뿌리 깊은 나무처럼 말이다. 지난 15일간의 순례길에 종지부를 찍었다.
누가 모르는가. ‘세상에는 쉬운 노릇이란 없다.’라는 말을. 영업은 어려운 일도 쉽게 풀 수 있는 묘안을 가지고 전문가답게 대응해야 한다. 교과서적인 말에 동감한다. 영업은 대응 속도가 생명이고 정성스러움이 필수인데다가 때에 따라 온갖 기 싸움이 동원되며 말로 다하지 못할 어떤 것들이 칡넝쿨처럼 얽혀있다. 그러기에 나는 영업이야말로 종합 예술이라 여긴다.
영업이란 낚싯대를 드리우고 기다리는 과정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럴 때면 낚시꾼이 아닌 강태공의 여유만이라도 가져보려 한다. 그러나 업체와 상담을 거치고 제안서를 제출할 때, 상대방이 심리전의 고수라면 나는 초조하게 마음을 졸이는 낚시꾼이 되고 만다. 오늘 낚은 몇 마리라도 들고 집으로 돌아가야 가족들의 주린 배를 해결하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현실이다. 나도 그런 현실에 충실하고 싶은 사람일 뿐이다.
예전과 눈에 띄게 달라진 점이라면, 가격이나 거래 조건에 민감해진 업체가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먹고 살기 힘든 세월이 우리 모두를 그렇게 만들어 가고 있다. 모든 순간이 의사 결정의 집합체다. 강태공 만이 누리던 세월을 낚는 낭만이 자꾸만 내 곁을 떠나간다. 이번 주 동안은 이기고도 진 느낌의 납품 준비로 무척 정신이 없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