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 화) 미완성 인생

by 사고 뭉치

여름휴가를 떠났던 직원들이 전부 돌아왔다. 그들에겐 고작 며칠이었겠지만, 나에게는 길게만 느껴졌다. 우리 휴가도 다른 회사들처럼 7월말과 8월초쯤으로 선택한다. 평일 3일을 주말과 합쳐서 5일간 휴가를 가는데, 내겐 그때가 일 년 중 제일 신경 쓰이는 기간이다. 업무에 문제가 없도록 두 팀으로 나눠서 가도 말이다. 대부분 회사들도 휴가를 떠나는 기간이라 주문도 그리 많지 않고 큰 이슈도 별로 없지만, 그렇다고 아무 일도 없는 것은 아니기에 그렇다. 나는 아내와 같이 다시 돌아올 직원들을 생각하며 회사를 지킨다.


지금을 학교로 치자면 방학을 마친 2학기의 시작으로 느껴진다. 귀뚜라미의 울음이 그런 상념을 더욱 부추긴다. 올해도 우리 부부에겐 여름 방학은 없을 것 같다. 주말동안 느슨해진 템포로 마음을 잠시 내려놓는 것만으로 휴가의 기분을 낸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학교의 방학 얘기가 나와서 말이지만, 사회생활은 학교와는 달라도 무척 달랐다. 정해진 길과 정답을 그저 쫒아만 가는 수업 방식이 나는 싫었다. 졸업만이 나를 구원해줄 것 같았다. 칼로 두부를 자르듯이 아주 정확하고 획일화된 구조는 천성적으로 내 성격과 절대 맞지 않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문교부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입시 정책을 누더기로 만드는 바람에 쫓아가기에도 버거웠다. 그래서 반골 기질이 강한 나 같은 학생에게는 공부와 담을 쌓기에 아주 좋은 핑계거리였다.


난 제도권 교육에 싫증을 느끼고, 반 등수와 초라한 성적표로 내 의지를 과감하게 드러냈다. 그러다보니 출세의 지름길을 일찌감치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간판이랄 것도 없는 그저 그런 서울 소재 4년제 대학에 간신히 들어갔다. 나는 우스개로 다니던 학교의 실제 이니셜을 따서 S 대학교 출신이라고 했다. 잘난 남동생을 둔 덕에 내 학력은 조심스레 세탁이 되었다. 누가 내 동생이 어딜 다니느냐고 물어보면 내 어깨는 자동으로 올라가면서 ‘연세대 신촌캠퍼스 법학과’를 다닌다며 구체적인 대답을 하였다. 그러면 대부분 사람들이 서울대학교를 S 대학교라 말하기도 했으니, 나도 그쯤에서 교통정리가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공부는 그저 그랬지만 반골로 다져진 내 눈빛만큼은 살아있었기 때문이었다.


과학은 지루했지만 멀쩡한 라디오의 내부가 궁금해서 뜯어보는 것이 좋았다. 잘 분해된 채로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흐뭇해서 다시 보려고 고무줄로 묶어 두었다. 소리만 나면 돼서 굳이 다시 잘 조립해 놓지는 않았다. 국어와 음악은 싫었지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내 사연과 신청곡에 매료되었다. 난 그때부터 나를 인정해주는 EBS 교육방송 클래식 프로그램의 애청자가 되었다. 미술 시간은 그저 그랬지만 마을 골목 벽 낙서는 내가 팔을 걷어 부치고 담당했다. 교생 선생님이 너무 예뻐서 데생은 손이 까지도록 했다. 체육 실기 점수는 바닥을 기었지만 이웃집 창문을 깨고 냅다 달리거나 다방구를 할 때의 기민함을 보먼서 나도 뜀박질에는 일가견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정확히 20년간의 직장 생활은 내가 그리 좋지 않은 학벌에 명석하지 않은 머리로도 먹고 살 수 있겠구나 하는 작은 불씨를 남겨주었다. 하지만 나의 옹색한 스펙을 채우고 있는 학벌과 둔재라는 현실로는 그리 오래 갈 수 없겠구나 하는 눈치 정도는 있었다. 그 느낌은 오래가지 않아 5년 만에 IMF가 나를 칼로 싹둑 잘라내고 말았다. 그들의 사지선다형 정답에 나는 없었다. 그리고 다음엔 15년간 다녔던 회사가 나를 배반하기 전에 내가 회사를 박차고 나왔다. 그땐 그렇게 통쾌할 수가 없었다. 그때 내 인생의 정답지에는 비록 불확실하지만 주관식 답안지를 내가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진 창업은 나 같은 사람에게는 도전해 볼 법한 시공간이었다, 정해진 답이 없기 때문에 매력적이었다. 나 같은 사람도 그저 그렇게 먹고 살 수 있는 기회를 열어 두고 있었다. 그런데 남들도 입버릇처럼 얘기하듯이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는 말은 진리였다. 하지만 지금까지 겪어왔던 모든 사고방식이나 행동양식이 몸에 배어 있어서 다행이었다. 어쩌면 몸으로 때운다는 게 나로서는 편한 선택이기도 했다. 돌다리도 두드린다는 심정만 있다면 내 한 몸 희생해서 먹고 살 길을 마련하는 것이야 말로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래서 그 무수히 많은 날들을 새벽 2~3시에 회사로 나가서 몸으로 부딪히며 일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때 들었던 귀뚜라미 소리, 그때 보았던 달빛, 그때 들이마신 새벽녘 습습한 공기는 감성에 젖어들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사업은 내가 문제를 내고 선택할 답안지도 만드는 출제자의 입장이 되곤 한다. 사지 선다형 답안지로는 절대 설명이 불가하다. 경우의 수가 너무 많아서 그렇다. 연륜과 경험이 없다고 문제지를 만들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복수 정답이 무수히 많은 것이 인생이고 또 사업이다. 그래서 마음에 쏙 든다. 정말 숨 막히는, 오직 정답 1개라는 시험문제는 그야말로 인정머리가 없다. 오늘 썼다가도 내일이면 지울 수 있는 그런 용기와 실천의지만 있다면 언제든지 앞으로 달려 나갈 수 있다.


올해 남은 2학기, 그리고 내년 학기를 향해 더욱 달리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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