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딴에는 영업과 마케팅을 한답시고 지난 34년을 무척 분주하게 보냈다. 그건 지금도 진행형이다. 초기 20년은 누가 보더라도 내 인생 절정의 시기였고 동시에 패기로 넘칠 때였다. 이젠 찰나처럼 느껴지는 그 때의 20년이란, 월급쟁이 세일즈맨으로서 더 이상 여한이 없던 시절로 남아있다. 두 곳의 직장을 거치는 동안 어설펐으나 나름의 열정을 아낌없이 불살랐다. 포장재 사업을 하는 지금은 그때와는 다른 관점과 입장에서 매사 임하고 있다. 세상에는 수많은 무림의 고수가 세일즈 쪽에 존재하지만, 나 역시 녹록치 않았던 경험담이 여러 보따리에 쌓여 있다.
내가 걸어온 영업에 대해 감히 말하자면, 나 자신을 최대한 감추고, 표정도 관리하며, 철저히 상대만을 위해 ‘연기(演技)’하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어느 정도 정해진 패턴의 각본이 있었다. 각본뿐만 아니라 연출, 연기, 편집까지도 내가 해야 하는 종합 예술이었다. 내가 만나는 상대방들은 비교적 균질한 패턴을 가지고 있었고, 그런 부류의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지고 또 만나고...... 어떤 때는 그런 인연이 오래 이어지는 일도 있었다. “액션”, “컷”을 외칠 일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내가 생명을 유지하는 한 쉽사리 벗어날 수 없는 ‘Maybe Never Ending Story’였다.
온 몸이 아파도, 집에 우환이 닥쳐도, 나는 철저히 모든 것을 숨기고 차를 몰고 가서 누군가를 만나야 했다. 그들과의 약속을 어길 수가 없었다.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실망시킨다는 것은 생각 조차할 수 없었다. 내가 잠시 한눈팔면 경쟁자는 바로 치고 들어왔기에 그랬다. 특히 대량의 포장재를 소비하는 거래처라면 더욱 팽팽한 긴장이 감돌았다.
그 날은 토요일이었다. 며칠간의 장거리 운전과 마라톤 회의로 무리했는지 몸은 그대로 드러냈다. 이틀 전부터 갑자기 심한 몸살로 소주를 연달아 5병쯤이나 들이켰을 법하게 육신을 가누기 힘든 상태였다. 충남 천안까지 비몽사몽 내려갔다. 신의 굽어 살핌이 있었기에 가까스로 도착할 수 있었다. 미국 본사에서도 나의 영업 진행 과정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주말 오전에 만나려던 분은 천안에 있는 어느 대학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나를 자꾸만 피하는 그 분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두 번 다시없을 찬스였다. 혹여 퇴원이라도 하면 친분을 쌓을 절호의 기회는 없어지는 것이었다.
병원 매점에서 선물용 음료수 하나를 샀다. 잠시 후 결전을 치를 내가 보기엔 왠지 손부끄러웠다. 제일 비싼 과일 바구니를 사비로 하나 더 구입했다. 양 손에 들고서 내가 반드시 챙겨야 하는 그 분을 찾아갔다. 나에게는 그 분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하느님의 음성보다 상단부에 있었다. 얼마 남지 않은지도 모를 내 직장 생활이 생지옥이 될지도 모를 바로 문턱이라 그랬다. 경쟁 포장 업체도 그 분의 간택만을 애절하게 기다리는 중이었다. 하지만 무게 추는 경쟁사로 이미 기운 것을 난 알고 있었다. 바로 돌려야만 한다는 임무를 지니고 온 것이다.
각 회사는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자동차 부품 업체’를 공략하기 위한 영업이 지난 몇 년간 처절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병원에 누워있던 그는 그 의사결정의 핵심 인원 중에 한 사람이었기에 공을 들일 수밖에 없었다. 문병을 가서 건넸던 과일 바구니를 옆으로 치우며 평소 나를 대하듯이 뜨뜻미지근했던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겉으로 나는 미소를 띠고 태연한 척했지만 속으론 외쳤다.
‘평생 그 자리에 있을 거 같지! 얼마나 더 세도하는지 두고 보자!’
그 다음날인 일요일 새벽, 그 전날 일로 잠도 오지 않고 개운치 않은 마음에 야산에 올라 애꿏은 나무를 발로 차면서 허공에 소리 쳤다. “참 잘났다. 이 자식아!”
우리의 경쟁 업체는 전방위 공세를 펼쳤다. 여러 실무자에게 향응 제공과 뒷돈을 건넸다. 나중에 담당자를 통해 진술을 확보했다. 김 아무개 대리는 본인의 월급보다 업체가 찔러주는 돈이 더 많다고도 했다. 두 자녀의 가장으로서 이래야만 생활이 된다고 이실직고 했다. 반면에 우리는 미국 본사에서 돈이 오가는 불법적인 행위에 대해서는 분명히 금지하는 입장이었다. 가급적이면 실력으로만 승부를 겨루라는 지시였다. 그런 접대를 못해서 아쉽다는 마음 보다는 그런 접대를 해야만 인간 세계가 돌아간다는 현실이 무척이나 서글펐다. 차라리 동물 세계가 펼치는 적자생존이 이성적으로 순수하고 공정해 보이기까지 했다.
충남 천안 소재의 병원에 입원해 있던 그 분,
읍소하며 미팅을 간곡히 요청해도 철저히 거절만 했던 경북 경산의 또 다른 업체 분,
하루가 멀다 하고 방문했던 울산 공장과 서울 본사에 있던 여러 담당자 분들까지.
소위 우리나라를 이끄는 업체 임직원들은 적어도 포장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는 나의 제안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때론 권의적이거나 고압적이기 까지 했으며 끝내 나를 내쳤다. 국내 자동차 메이커 네 곳이 비슷한 스탠스를 취했다. 어떠한 기회 조차 주려하지 않았다. 나는 그들의 저의를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수년간 공들인 포장 장비들은 업체에서 하나씩 철수하기 시작했다. 이런 게 도저히 바꿀 수 없는 세상의 이치라면 나는 담담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정한 약육강식의 현장. 적어도 내가 했던 세일즈에서는 이런 변칙적이고 온당하지 못한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이런 모습들이 더는 일어나지 않기를 20년간 수도 없이 묵도했다.
나는 그렇게 펑크난 대규모 매출액을 메꿔 넣을 제3의 업체를 찾아내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예상대로 시간만 흐르고 결코 쉽지 않았다. 퇴근 길은 머리가 복잡하고 몸은 파김치가 되기 일쑤였다. 주말도 홍보 자료를 들고 전국을 누볐다. 당장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였기에 대안이 없었다. 더 큰 이유는 내 자존심이었다.
그 부족한 매출을 채우려고 나서는 새벽 출근길은 자주 악몽을 꾸고 가위에 눌린 덕에 여름 공기조차 유난히 서늘하게 느껴졌다. 파란 하늘이 상쾌하다거나 감상적으로 다가오지 않고 서슬퍼런 색감으로만 밀려 들어왔다. 영업 팀장인 나는 고개 들기가 힘들었다. 내 남은 직장인으로서의 생명은 환멸이 더해지고 심해져 점점 끝나가고 있음을 느꼈다. 그래도 남은 시간까지 현실에 굴하기 보다는 헤쳐 나가는 방법을 택했다. 매일 매일을 내 세일즈의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임했다. 목숨까지 거는 영업, 내 개인 사업이라는 자세로 정진했다.
그렇게라도 하고 나니, 내가 몸담고 있던 한국 지사를 아시아 지역에서 일등의 반열에 올려놓았고 그 최고의 순간에 도달했을 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와서 내 스타일의 사업을 시작했다. 밑바닥부터 저 높은 곳까지 수많은 실무 경험들이 내 심장과 각 내장 기관의 핏줄을 여태껏 뜨겁게 돌아다니고 있다. 나는 누군가가 내 영업이 무엇이었는지를 물어 본다면 최소한 3일을 내리 쉬지 않고 떠들 수 있다. 절대 잊을 수 없도록 내 뼛속까지 깊숙이 간직해온 영업이기 때문이다.
이젠 그때만큼 배우처럼 연기하지 않는다. 할 수 있을 만큼만 한다. 직원들에게도 악착같이 영업하지 말라고 한다. 내가 경험했던 비참함을 우리 직원들까지 감수하게 하고 싶진 않다. 정말 미안한 얘기지만 지금도 자동차 메이커에서 연락이 오면 그 생리를 잘 알기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는다. 비정함으로 길고 길었던 15년간의 홍역은 한 번으로도 족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생각보다 은근히 넓다. 비굴하게 영업해야 하는 곳도 여전히 상존한다. 이해가지 않는 파트너들도 많다. 꼭 내가 아는 길만이 해답은 아니라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이젠 잊혀질 법도 한데, 나는 지금도 거리를 달리는 국산 차량들만 보면 그때의 생각이 문득문득 날 때가 있다. 그들에 대한 뿌리 깊은 적개심으로 한 동안 수입차를 탔다. 나 같이 바른 길만을 걷고자 했던 세일즈맨들의 눈물겨움과 호형호재하면서 비리로 오고간 돈다발이 그 국산차들의 차 값에 얼마나 녹아들어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그런 시련으로 점철된 가운데에서도 두 번째 직장의 15년 근무 중, 거의 매년, 매 분기별로 아시아 태평양 지역 최우수 세일즈 상을 수차례 수상했고 덕분에 가족 동반 해외여행도 다닐 수 있었다. 재직 시 ‘Sales Machine (세일즈 머신), Sales Legend (세일즈 레전드)’라는 별명도 얻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버틸 수 있었다. 본사 사장으로부터는 나의 세일즈 실적에 대해 놀랍다는 친서를 받아 회사 보드판에 게시된 적도 있었다. 나는 이런 보람으로 여태 살아왔다. 한 편의 영화와도 같았던 세일즈맨으로서의 삶, 연기자로 치면 오스카상 후보 쯤 될까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