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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제니 Aug 22. 2023

비 오는 날의 심부름



이렇게 비 오는 여름날이면 어릴 때 엄마가 해 주시던 으스스한 이야기가 생각난다.


엄마 고향은 시골이다. 외할아버지께서 교장선생님으로 근무하시던 학교 사택에서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보내셨다. 학교운동장을 마당 삼아 하도 뛰어다니며 놀아서 '사슴'이란 별명을 갖고 있었다. 그 별명에 걸맞게 학교에서 항상 달리기는 1등이었다. 막내딸인 엄마를 외할아버지께서는 몹시 귀애하셔서 우물가에도 랑에도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하셨다. 읍내에서 사다 준 레이스가 달린 고운 원피스를 버릴까 봐서였다. 엄마는 원피스 치마를 끌어올려 커다란 옷핀으로 한 옆으로 여미고 사슴처럼 껑충껑충 뒷산으로, 강 가로 뛰어놀았다.


원래 엄마가 갈 심부름이 아니었다. 학교에서 마을회관까지는 비 오는 날 어린아이가 우산을 쓰고 시루떡 한 소쿠리를 들고 걸어갈 만한 거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날은 모두가 바쁜 마을 잔칫날이었다. 교장선생님으로서 한 말씀하시려 외할아버지께서는 진작에 마을회관으로 가셨고 중학생이었던 외삼촌은 아직 읍내에서 돌아오지 않았었다. 이모는 부엌에서 손을 보태고 있었다. "저어기 길모퉁이만 돌면 이장님께서 자전거 끌고 오시는 게 보일 거야. 마을회관까지 이장님께서 자전거 태워주실 거야. 비만 안 오면 거기 평상에 앉아있음 될 텐데……. 평상 앞에서 기다려. 이장님 금방 오실 거야." 외할머니께서 말씀하셨다. 엄만 분홍빛 고운 원피스를 입고 머리에 새로 사 온 리본을 묶고 흰 운동화를 신고 노란 우산을 들고 출발했다. 한 손에는 제법 묵직한 떡 소쿠리를 들고.


출발할 때 보슬보슬 내리던 비가 길모퉁이를 돌자 거세어졌다. 평상에 도착했지만 이장님도 자전거도 보이지 않았다. 엄마는 떡 소쿠리를 단단히 고쳐 잡고 눈이 빠지게 이장님이 오시나 바라봤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갑자기 등 뒤가 서늘해졌다. 평상 옆에는 늙은 수양버들이 서있었다. 어른들이 하는 얘기로는 오래전 보쌈을 당했던 과부가 목을 맨 나무였다. 비가 갑자기 심해져 앞을 볼 수가 없을 지경인데 수양버들이, 과부가 죽어버린 나무가, 거세진 바람에 긴 머리카락 같은 줄기를 휘 휘둘러 댔다. 분명 대낮인데 비 때문인지 너무 어두웠다. 지나가는 개미새끼 한 마리 없었다. 고양이도 새들도 울지 않고 오직 수양버들만 휘 소리를 내었다.


엄마는 결단을 내렸다. ‘집으로 돌아가리라. 심부름을 못했다고 혼이야 나겠지만 그깟 혼나는 게 이렇게 온 천지에 혼자인 것 같은 두려움보다 더 하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엄만 소쿠리와 우산을 꼭 잡고 길모퉁이를 돌았다. 대문이 보이지 않았다. ‘비 때문이겠지.’ 하지만 아무리 걸어도 대문은 나오지 않고 길이 끝없이 이어졌다. ‘이상하다. 분명 모퉁이만 돌면 집까진 금방인데. 어? 저기 길모퉁이네. 저건 수양버들이랑 평상이야!’ 방금 떠나온 평상이 거기 있었다. 엄만 덜컥 겁이 났다. ‘뭔가 잘못 생각했겠지. ’ 엄만 다시금 맘을 단단히 먹고 길모퉁이를 돌았다. 한참 걸어도 집이 보이지 않았다. 서늘한 기운에 뒤를 돌아보니 분명 길모퉁이를 두 번이나 꺾어 돌아서 보이지 않아야 할 수양버들이 보였다. 아니, 보이는 정도가 아니었다. 수양버들은 뿌리를 뽑아 올려 그 뿌리로 성큼성큼 걷고 있었다. 머리채를 휘 휘 휘두르며 엄마를 향하여, 엄마를 잡으러. 그 모습을 본 엄마는 떡이건 소쿠리 건 우산이건 다 내팽개치고 혼신의 힘으로 달렸다. 사슴처럼 날래게 뛰어도 수양버들에게 잡힐 듯 잡힐 듯했다. 얼마나 많은 길모퉁이를 돌았는지 모른다. 걱정이 되어 엄마를 찾으러 나오신 외할머니를 만났을 때까지. 이장님이 엄마와 길이 어긋났나 보다고 집에 오셔서 걱정이 된 외할머니께서 찾으러 나오신 거였다. 엄마는 다리가 풀려 비 오는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 일이 있은 후 엄마는 며칠을 앓았다. 읍내 병원에선 비를 맞고 생긴 여름 감기라고 했다. 외할아버지께서는 외할머니와 한 달 넘게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당신의 막내딸을 아프게 한 자에게 내리는 벌이었을 것이다. 그날 입었던 원피스며 리본이며 흰 운동화는 태워버리셨다. 당신이 자리를 비우신 탓이라고 생각하셔서 그 일이 있은 후부턴 어디를 가시던 엄마를 데리고 다니셨다. 또 밤마다 악몽을 꾸고 울며 잠을 깨던 막내딸을 당신이 데리고 주무셨다. 엄마를 그렇게 만든 수양버들을 귀신 들린 수양버들이라고 마을 회의에 건의해서 뽑아버리고 그 자리에 느티나무를 심으셨다. 애를 너무 받아준다고 어르신들이 한 소리씩 해도 아랑곳하지 않으셨다. 외할아버지의 사랑에 무서움은 이내 잊혔다. 어릴 때 내가 무서운 얘기 해 달라고 조르면 엄마는 이 이야기를 옛이야기처럼 들려주셨다.


“엄마, 엄만 진짜 수양버들이 뿌리로 걸을 수 있다 생각해?” “모르지, 엄만 분명히 수양버들이 쫓아오는 걸 봤지만 그 수양버들은 뽑아버렸잖아? 다른 수양버들들은 걷는 법을 모를 거야.” “응, 그랬으면 좋겠다,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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