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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제니 Sep 12. 2023

강남역 사거리에서

이렇게까지 많은 사람들이라니! 오랜만에 나간 주말의 강남역 일대는 예쁜 사람들로 가득했다. 이들은 하나같이 아름다운 얼굴에 깨끗한 옷으로 무장을 하고 오늘 밤을 멋지게 보내려는 투지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가게마다 각자 가장 빛나는 메뉴와 조명들로 사람들을 유혹해 댔다. 나는 여기에 온 본래의 목적을 잊고 이 골목 저 골목을 기웃거렸다. 그렇게 기웃대다 약속시간이 되어 강남 교보문고 쪽으로 걸어가려 강남역 사거리로 걸어 나왔을 때였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날카롭게 밤하늘을 가르는 여자의 목소리에 저절로 고개가 돌아갔다. 사람이 바글바글하고 조명이 휘황찬란한 강남역 대로 한복판에 한 남자가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다. 무슨 잘못을 그리도 크게 했는지 고개도 들지 못하고 있었다. 여자는 “헤어져! 지긋지긋하다고!”라고 소리 지르며 허리에 두 손을 얹고 버티고 서서 남자를 노려봤다. 나는 고개를 급히 다른 쪽으로 돌리고 귀만 크게 부풀려 집중 듣기 모드를 켠 뒤 여자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또는 꿀 먹은 벙어리 같은 남자의 대답을 기다렸던지. 어쨌건 누구의 말이든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다음 전개가 어떻게 될지 만을 모든 감각기관을 세워 기다리고 있었다. 시각만 빼고. 대놓고 쳐다보면 무례한 것이니까. 아무래도 그날 그곳에 있었던 다른 모든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여자의 헤어지자는 말이 나온 다음에는 혼란스럽게 떠들썩하던 강남역 일대가 순간 정적으로 뒤덮여버렸으니까.


재미없게도 여자는 홱 돌아서서 가버렸다. 난 끝내 남자의 대답도 듣지 못했다. “뭘 봐!” 꿇어앉아있던 그 남자는 여자의 뒷모습이 인파 사이로 사라지자마자 신경질적으로 일어서서 사람들에게 고함을 질렀다. “다 끝났어! 나도 갈 거야! 구경 다 했냐? 씨 X!” 하이톤의 목소리로 소리 지르고는 가방을 고쳐 매고 인파 속으로 이미 사라진 여자의 뒤를 쫓았다. 난 ‘구경’ 하지는 않았지만 ‘흥미'를 가지고 ‘관찰'했으므로 약간의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그녀의 대담함에 약간의 감탄도 했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남자친구를 강남역 사거리 대로상에 무릎을 꿇릴 수 있었을까? 그는 무슨 잘못을 한 것일까? 그는 그녀를 쫓아가서 화해했을까?


약속 장소에 도착한 나는 선배에게 방금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아하, 그거? 광고 퍼포먼스였을 걸? 요즘엔 그런 퍼포먼스로 신작 드라마나 영화 광고 많이 해. [오징어 게임]도 그랬잖아! 전 세계 이곳저곳에 게임 부스 만들어놓고 실제 게임 체험할 수 있도록 해서 광고했었잖아.” 난 혼란에 휩싸였다. 내가 방금 본 사건 중에 어떤 것이 사실이고 어떤 것이 퍼포먼스인지 구분할 수 없다면 도대체 나란 사람의 판단력은 정상인가? 나비꿈을 꾸고 난 장자는 깨달음이라도 얻었다는데…….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 낚인 거지. 그게 광고의 목적이잖아? 진짜 광고였다면 SNS에는 미리 예고가 떴을걸? 광고라면 흥미를 끌었으므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거고, 실제 상황이라면 누구라도 궁금해할 테니 인간의 본성이 그런 거니까 넌 본성대로 행동한 거고.” 선배가 말했지만 그날 사건으로 내가 느낀 것은 남의 사생활을 궁금해하는 한 조각 나의 경박함뿐이었다.  [열하일기]에“물속 깊은 속내를 지녀 경박함을 끊어라.”라 하는데 난 아직도 멀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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