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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제니 Aug 29. 2023

맛있는 별

  “엄마, 혀에서 별이 폭발했어요, 그런데 맛있는 별이에요.” 5살 때쯤 갓 담근 고추장을 처음 맛본 아이가 얼굴이 발갛게 되어 말했다. 그때부터인가? 아이는 지금도 고추장과 참기름을 넣고 비빈 계란밥을 좋아한다.


  해마다 고추장과 된장을 담는 것은 아이를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엄마의 손맛이 그리워서이기도 하다. 고추장 담그기는 까다롭다. 마른 고추를 사서 햇빛에 며칠간 바싹 말렸다가 깨끗이 행주로 닦아 방앗간에서 고추장용으로 곱게 빻아온다. 엿기름가루를 물에 불렸다가 맑게 걸러내어 엿기름물을 낸다. 찹쌀가루를 익반죽하여 동글납작하게 전병을 빚어 뜨거운 물에 삶아낸다. 삶아낸 뜨끈한 찹쌀 전병을 엿기름물에 넣는다. 모두 다 커다란 솥에 부어 약한 불에 올려 따뜻한 상태를 유지하며 나무 주걱으로 오래 저으면 전병이 삭아 그 형체가 없어진다. 엿기름물을 불에서 내리고 나무 주걱으로 계속 저어주며 천일염, 메줏가루, 매실청의 순으로 넣는다. 혼합물이 식어서 미지근해지면 고춧가루를 넣고 매끈하게 윤이 날 때까지 젓는다. 된장은 고추장에 비하면 과정은 간단하다. 소금물에 메주를 넣어주면 되니까. 그 대신 된장은 기다려야 한다.  90일이 지나야 비로소 된장과 간장을 가를 수 있고 그 후에도 오랫동안 햇볕을 보여주며 익혀야 한다. 


  어렸을 때 우리 집 베란다에는 옹기종기 항아리 삼총사가 있었다. 간장, 고추장, 된장 항아리. 이 항아리 속에서 진정한 엄마의 맛이 태어났다. 상추만 있어도 밥 한 그릇 뚝딱이라는 엄마표 쌈장도 나왔고 고추장 양념 돼지불고기도 나왔다. 엄마가 담그는 된장으로 끓인 찌개는 별것 들어있지 않아도 감칠맛이 났다. 엄마는 엄마의 장독대를 매일 행주로 닦고 햇볕이 좋으면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애지중지 돌보셨다. 


  중학교 때 갑자기 엄마가 돌아가시고 장례를 치른 지 며칠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동안 북적대던 친척들이 돌아가고 나니 집이 썰렁했다. 아버지는 회사에서 아직 돌아오시지 않았고 나는 배가 고팠다. 엄마의 된장찌개가 먹고 싶었다. 멸치 똥을 따고 두부와 버섯을 썰어 냄비에 넣고 물을 받아 불에 올렸다. 된장을 뜨러 숟가락과 대접을 들고 베란다로 나가 된장독을 열었다. 그런데 어머니의 된장독이 비어 있었다. 내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숟가락을 항아리 깊숙이 넣어 보았지만 바닥을 긁는 소리만 들렸다. ‘이 항아리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며 간장, 고추장이 들어있던 항아리까지 모조리 다 열어보았다. 모든 항아리가 깨끗이 비워져 있었다. ‘모두 다 사라졌어! 이제 난 엄마 된장찌개도 먹을 수 없겠구나. 영원히.’ 비로소 엄마의 부재가 실감 났다. 베란다 구석 바닥에 풀썩 주저앉아 빈 장독대를 부여잡고 분노하며 한참을 울었다. 


  아이가 태어나자 난 어렸을 때 엄마가 담그시던 방식을 기억 속에서 끄집어내어 해마다 장을 담갔다. 세상의 거친 음식을 아이에게 먹이고 싶지 않았다. 아이에게 좋은 것만 주고 싶었다. 우리 엄마도 이런 맘이셨겠지. 아이는 날 닮아서 그런지 집에서 담근 된장으로 끓인 된장찌개를 좋아한다. 우리 아이가 좋아하는 엄마표 된장찌개, 오래오래 먹여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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