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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제리 Nov 04. 2021

퇴사 사유를 솔직하게 적어낸다면

NGO 입사부터 퇴사까지 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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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번의 겨울과 두 번의 여름을 지금 직장에서 보냈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 순이익 200만 원과 잔병, 인간 불신만이 남았다. 회사원이 2년 동안 200만 원을  모았다는 건 둘 중 하나다. 정말 못 벌거나 막쓰거나.  이 극단점 사이에 가랑이가 찢어진다. 이전 직장에서는 세전 205만 원을 받다가 연봉이 반토막 나는 곳으로 지원했다. 마라샹궈를 즐기고 혼자서도 뿌링클을 사 먹고... 툭하면 스스로에게 선물을 해주는 내가 이곳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이었냐 하면.... 말하기 부끄럽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뽕이었다. 동시에 현실감각 없는 캥거루족의 선택이었지 싶다. 지금도 눈앞에 아른거린다. 규모와 월급이 동시에 줄어드는 직장으로 취업한다는 말을 듣던 아빠의 눈망울, 소처럼 그 큰 눈에 어렸던 슬픔과 실망감을.


 친구들에게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월급을 받아 좋다고 말했다. 그때 내 목소리는 평소보다 높은 '솔'이었다. 그때는 그랬다. 시작이 거창했다. 끝은 초라하고. 2번의 겨울을 지나고 퇴사를 결정하게 된 이유는 소소했다. 늘 그렇듯 삶을 뒤흔드는 건 사소한 일들이 아니겠는가. 아름아름 임계를 넘으면 그 뒤로는 내리막길이다. 틈만 나면 다른 사람 욕을 하는 직속 상사. 회식 때 겉 옷을 받아주겠다며 연거푸 거절하는 내 말을 무시하고 양 어깨를 주름진 손으로 감쌌던 나이 든 이사. 50,60대 중년 남성이 가득한 회의실에서 노래를 한곡 뽑아보라던 부장. 무엇보다 임계를 넘긴 건 그 순간 화를 내지도 못하고 애써 웃었던 나 자신의 비굴함이었다. 젝



 항상 막돼먹은 사람들이 아니었는데, 평소 행동과 일치가 안 되는 기억에 혼란스러웠다.  그들은 분명 시기적절한 조언과 따듯한 친절을 건네기도 했다. 그래서 더 혼란스럽고 불쾌했다. 왜 이 사람들은 100% 나쁜 놈들이 아닌 걸까? 어깨를 만지고 노래를 부르라고 하는 건  가볍게 넘겨야 하는 걸까? 왜 나는 계속 불쾌할까... 의문이 들었다. 고민을 거듭하던 중 한국여성인권진흥원에 전화를 걸었다.



 "선생님. 어떤 날은 남자만 가득한 회의실에서 저에게 물으셨어요. 본인은 창녀가 상품이라고 생각한다고. 제리 씨는 어떻게 생각하냐고요."


".... 창녀요? 요새는 잘 쓰지도 않는 말인데..."


"저는 남자만 가득한 회의실에서 혼자 여자였어요. 불쾌했지만 아무 말도 못 했고요... 제가 과민한 걸까요? "


" 지금 들은 말로는 저도 여성을 무시한다고 느껴지네요. 혹시 회사에 인사팀이 있나요? "



침묵. 인사팀도 없고 녹음기도 없었다. 어딘가에 기록할 정신은 더더욱 없었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나처럼 어떤 지점에 불쾌함을 느꼈다면 꼭 녹음하고, 일기에라도 날짜에 맞춰 쓰길 바란다. 내 경우에는 불쾌함을 말한다고 상황이 쉽게 바뀔 것 같지 않았다. 전체 회의 때 누군가 어떤 생선이 정력에 좋더라~ 이야기를 해도 얼굴 하나 붉히는 사람이 없었으니 말이다.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는 제목을 가진 일본 드라마가 있다. 이 문장을 그대로를 실천했다.  



  퇴사를 결정할 때 의외로 돈에 대한 걱정만큼 막연한 두려움이 컸다. 간절히 원했던 직장을 그만두면 다음 직장도 똑같지 않을까? 나 자신이 문제인 게 아닐까? 쭈굴 해진다. 마치 첫사랑인 남자 친구와 헤어지면 이 사람만큼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는 만나지 못할 이상한 신화에 빠지는 것처럼.  회사랑 연애는 어찌 보면 닮았다. 사랑해서 헤어지고 떠나기 아쉽지만 퇴사하는 머저리는 없다. 그럼에도 누군가를 다시 사랑하고 입사를 하게 된다. 실연도 퇴사도 마음을 가꾸다 보면 사라졌던 용기가 부활한다. 역경은 거름만큼 악취가 나지만, 그만큼 나에게 생명력을 준다. *같았던 시간을 겪은 나는 이전보다 상했지만, 나아지면 이전보다 강해진다. 아무튼, 아담 아래 모진 생명력을 이어받은 이 지구인은 쉬다 보면 나아지고, 나아지면 나아갈 거라 믿고, 퇴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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