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유 Ayu Nov 30. 2023

잘 넘어지는 법

요가자세에서 배운 삶의 자세

겨울이면 트는 가습기, 평소 자기 전 물도 채우고 작동시키고 자면 밤새 기관지가 건조하지 않아 다음날 아침에 감기 예방에 좋아 나에겐 겨울철 필수품이다.


가습기 파워를 강으로 설정하면 물을 뿜은 궤적을 따라 바닥에 물이 고이기 때문에 세기를 약하게 설정한다. 약하게 설정한 가습기는 언뜻 보면 수증기가 안 나오는 것 같지만 방에 습기가 골고루 퍼졌음을 확인하는 방법이 있다. 밤새 가습기 작동이 골고루 잘되면 아침에 일어났을 때 블라인드 너머 창문이 뽀얗게 습기가 찬다. 눈 뜨자마자 창문을 바라보면 마치 눈 내린 고요한 겨울, 화이트크리스마스를 연상케 해서 한달까.


어젯밤에는 너무 피곤한 바람에 정신없이 가습기에 물을 채우고 잠들었는데… 세기를 강으로 설정해 둔 바람에 가습기 앞에 바닥에 물이 잔뜩 고여있던 것이다! 그걸 몰랐던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슬리퍼를 신고 비몽사몽 걷다가 물에 미끄러져 철퍼덕! 대차게 넘어졌다.


앞으로도 뒤로도 아닌 옆으로 넘어져 오른쪽 팔부터 골반, 무릎까지 골고루 충격이 흡수되었다. 지금 집의 바닥은 넘어지면 대리석이라 자칫 넘어지면 위험할 수 있었기에 넘어지자마자 문득 들었던 생각은 ‘와, 나 운좋았다.’였다. 분명 일어나면서 더 자고 싶었는데… 넘어진 순간 잠이 확 달아난 것 말고 통증은 전혀 없었다. 발이 미끄러져 중심을 잃자마자 마치 연체동물이 된 것 마냥 긴장을 쭉 뺀 덕분이다.



5년 전 요가에 열정이 가득하던 시기에 나의 로망의 요가자세였던 시르시아사나, 머리서기자세. 이 자세를 만드는 과정은 매트에 팔꿈치, 손목, 정수리로 지면을 단단히 받친 뒤, 다리 뒤쪽의 유연성을 이용해 상체를 지면과 수직으로 만들고, 상체와 일직선으로 만들기 위해 그 다리를 들어 올리면 된다.


하지만 실제로 이 자세를 확고하고 편안하게 만들기 위해 가장 중요했던 과정은 수십 번, 수백 번의 넘어지는 순간들이었다. 머리로 나의 온몸을 지탱한 상태로 뒤로 넘어진다는 생각을 하면, ‘내 목이 꺾이면 어떡하지? 내 허리가 다치면 어떡하지?…’ 여러 걱정의 생각들이 올라오는데, 그 생각들에 사로잡히면 절대 다리를 들어 올리지 못한다. 다리를 들어 올리지 못하고 끙끙 거리는 나를 볼 때 선생님의 조언은 중심을 잃은 순간 온몸에 힘을 빼고 구르라는 것이었다. 넘어질 때 몸에 힘을 빼면 자연스레 부드럽게 몸이 땅에 떨어졌고 내 의지로 저항하거나 긴장하지 않을 때 전혀 다치지 않는다는 걸 깨우쳤다. 비로소 잘 넘어지는 법을 터득한 후에야, 걱정으로 사로잡혔던 정신이 몸의 감각으로 옮겨갔고 머리서기 자세를 성공할 수 있었다.




멋있어 보이는 요가자세를 선보이기 위해 연습하던 지난날의 과정들이 오늘 아침 이렇게 쓰일 줄이야…! 요가매트 위에서 넘어져도 별거 아니라는 믿음은 요가매트 밖, 무려 대리석 바닥에서도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승부욕 길들이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