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14 삼쇠섬 5일차(덴마크8일차)
메마른 땅속에서도 안간힘을 내 물기를 빨아들이고 줄기를 뻗고 세찬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잎을 펼치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온다.
삼쇠는 풍력으로 에너지를 생산하는 섬답게 바람이 세차다. 이른 아침의 밭에 가만히 웅크리고 일을 하다 보면 바람이 꼭 몸을 관통하는 것처럼 서늘하다. 5월 중순인데도 발열내의에 패딩을 껴입어도 삼십 분쯤 지나면 얇은 티셔츠 한 장을 입은 것처럼 살갗이 시리다. 물론 볕이 좋은 날이면 이른 봄처럼 쌀쌀하지만 조금은 포근하다.
그래도 확실히 아직 이곳 날씨에 적응하긴 힘들었다. 코펜하겐에서부터 콧물을 조금씩 훌쩍이기 시작했는데 삼쇠에 짐을 풀고 나자 긴장이 풀렸는지 아침저녁으로 감기 기운이 올라왔다. 특히나 따로 냉난방 시설이 없는 하우스는 온종일 서늘했다. 방마다 라디에이터가 한쪽 벽면에 붙어 있긴 하지만 어느 방도 제대로 작동하지는 않았다. 보통 봄-여름에 주로 우퍼들을 받고 겨울이면 비어있는 집이라 오랫동안 관리되지 않은 흔적이 역력했다. 밤이면 한국에서 챙겨 온 테라플루를 뜨거운 물에 타 마시고 발열내의에 타이즈, 긴 원피스와 패딩조끼에 겨울용 수면 양말까지 덧입고 잠을 청했다. 그렇게 입고도 이불 속에 막 들어가면 한기가 한동안 감돌았다. 체온으로 데워지는 데는 생각보다 꽤 시간이 걸렸다.
이불 속 찬기를 잠시간 온몸으로 느끼며 한국에 있는 내 방을 떠올렸다. 외풍이 심한 방이었지만 한겨울에도 금방 뜨거워지는 전기장판 위에서 나는 얇은 잠옷 한 장만 걸치고 언제든 따뜻하게 잘 수 있었다. 그때의 기분을 떠올리다 보면 어느새 이불 속이 따뜻해졌다. 그러고는 잠결에 벗어던진 수면 양말을 찾아내며 그동안 얼마나 조그맣고 안전한 세계 속에서 살아왔는지 체감했다. 누군가는 옷을 몇 겹이고 껴 입고도 한기에 맞서 애써 잠을 청하고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넘치는 전력으로 방을 데우고 이불 속을 손쉽게 데우며 가볍고 따뜻하게 잠들고 있을 밤을 떠올리며 처음으로 에너지에 대해 생각했다. 실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에너지가 아니라 적당한 에너지를 골고루 갖는 것과 적당히 견디는 삶의 방식을 터득하는 것이라는 걸. 잠깐의 한기만 견뎌내면 우리가 가진 체온은 스스로를 데우기에는 충분하다는 걸 삼쇠에서의 밤들을 지내며 나는 알 수 있었다.
오전 일과를 마치고 스티니네 식당으로 가서 점심을 먹었다. 스티니의 음식은 건강하고 또 맛있었다. 감자와 딸기가 유명한 삼쇠섬의 농가답게 스티니네 감자는 일품이었다. 원래 감자를 별로 즐기지 않았는데 그저 물에 삶기만 했는데도 스티니네 감자는 달작지근하고 구수했다. 감자는 덴마크의 주식(主食)이라 거의 매끼 감자를 먹는데 이런 맛이라면 얼마든지 괜찮을 것 같았다. 한 접시 가득 음식을 해치우고 나면 몸을 쓰는 노동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 노동의 귀천 따위 없지만 몸으로 하는 노동 후에 먹는 음식이 훨씬 맛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가 없었다. 밥 먹을 시간이 되어 밥을 먹는 게 아니라 에너지가 온몸 구석구석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점심시간이 지나면 킴은 보통 다른 곳으로 일을 하러 간다. 킴은 새벽 6시부터 밭에 나가 점심까지 일하고 이후에는 하우스나 식당 옆에 있는 창고에서 다양한 일을 했다. 킴이 손을 흔들며 가고 나면 넓은 밭에는 나 혼자 덩그러니 남았다. 그러면 휴대폰으로 쿨의 ‘애상’이나 에프엑스의 ‘Chu’, 김창완 밴드의 ‘중2’ 같은 음악을 틀어놓고 자루가 긴 넓적 괭이로 딸기밭 잡초를 제거했다. 그러면 저절로 몸이 들썩이고 드넓은 밭이 나만의 무대가 됐다.
신나게 음악에 몸을 맡기고 괭이질을 하다 보면 어느새 한쪽 고랑에 뽑은 잡초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작은 싹들까지 뽑아내고 나면 잡초들과 섞여 보이지 않던 딸기나무들이 매끈하게 모습을 드러낸 채 흔들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 저절로 딸기나무와 대화를 하게 된다. 양파를 콕콕 심을 때처럼 괜히 흐뭇해지고 잘 자라길 빌게 된다. 그러면 어쩐지 뿌리 내린 모든 것들이 소리를 내는 게 들리는 것 같다. 메마른 땅속에서도 안간힘을 내 물기를 빨아들이고 줄기를 뻗고 세찬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잎을 펼치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온다. 그 소리에 귀 기울이다 보면 허리며 팔이며 쑤시는 것도 잊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괭이를 제자리에 갖다 두고 자전거에 올라 밭을 떠나면서 나는 ‘내일 또 만나자’하고 마음속으로 인사했다. 이제 킴의 왕국은 내게 조용하고 한적한 곳이 아니었다. 낮은 곳에서 생명이 숨 쉬는 소리가 가득한, 평화로운 소란으로 가득 찬 세계였다. 이곳에서 생명은 힘차게 흔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