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16 삼쇠섬 7일차(덴마크10일차)
농사일은 수 없는 반복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반복 속에서 마치 처음처럼 내 몸을 만나게 된다.
이른 아침 밭은 깨끗하다는 말로는 모자랄 정도의 청명함을 갖고 있다. 깨끗하게 세탁한 수건, 막 따온 풋사과, 새벽 두 시의 공기에서 맡을 수 있는 냄새가 밀려온다. 밭 한가운데로 들어가 몸을 웅크리고 앉으면 포슬하게 익힌 감자를 씹으면 은은하게 배어있는 향이 흙에서 느껴진다. 그 냄새들을 한껏 빨아들이면 아직 서려 있는 잠기운이 금세 가신다.
양파를 심은 지 겨우 30분 만에 온몸이 욱신거렸다. 무릎을 꿇고 등과 배 힘으로 지탱하며 양손으로 양파를 심다 보면 여태껏 느껴보지 못했던 온몸의 미세한 근육들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게 느껴진다. 일상 속에서는 존재감조차 없던 몸의 작은 마디들이 제 존재를 마구 드러내며 아우성친다. 시원한 공기를 마시며 그림 같은 풍경 속에서 일하면서 스스로 농사 체질인 것 같다며 속으로 히죽거렸는데 겨우 3일 만에 몸살이 났다. 밭일은 크게 몸을 쓰지 않는 듯하면서도 몸의 작은 부분들에 모두 자극이 갔다. 웅크린 자세로 몇 시간이고 버텨야 했고 같은 모양으로 괭이질을 수십 번씩, 뿌리가 단단한 잡초를 만나면 엉덩이에 힘을 잔뜩 주고서 뿌리채 뽑아내야 했다. 그러다 보면 어깨 허리 무릎은 말할 것도 없고 손가락 마디마디, 날갯죽지부터 무릎을 꿇고 있는 동안 발뒤꿈치로 짓누른 엉덩이 밑부분까지도 멍든 것처럼 아린다. 농사일은 수 없는 반복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반복 속에서 마치 처음처럼 내 몸을 만나게 된다. 잠시 일어나 스트레칭하면 팔뚝과 바깥 허벅지가, 날개뼈 사이의 등 한가운데가 막 쥐어짠 수건처럼 찌릿찌릿했다. 그 통증은 어떤 새로운 사실처럼 내 몸을 인지하게 했다. 그러니까 지금 이 몸은 살아있는 몸이라는 것을. 통증이 이는 몸의 이 부분부분들이 살아 움직이는 나의 일부라는 사실을 나는 새삼스럽게 알게 된다. 통증 속에서 오히려 나는 내 몸을 오롯이 만나는 되는 것이다.
며칠 음악을 들으며 일하다가 오늘은 다운로드 해 온 ‘안데르센 동화집’ 오디오북을 들었다. 몇 년 전 라섹수술을 하고 눈을 제대로 뜰 수 없는 채로 꼬박 일주일을 보내면서 팟캐스트로 소설 낭독을 닥치는 대로 듣다가 ‘듣는 이야기’의 묘미를 깨달았는데, 작품 전문을 낭독해주는 오디오북을 어디서든지 들을 수 있다니, 스마트한 이 시대가 고마운 순간 중 하나였다.
안데르센의 나라에서 그가 지은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묘한 기분이었다. 특히 ‘엄지 아가씨’ 이야기를 들으며 작은 새들이 머리 위를 빙빙 돌며 노래하는 모습과 잡초를 뽑아낸 자리에 난 구멍 속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금방이라도 조그마한 엄지 아가씨가 얼굴을 내밀 것만 같았다. 어쩌면 안데르센은 어느 날엔가 밭에서 일을 하다가 잡초를 뽑아낸 구덩이 속에서 정말로 조그만 여자애를 만났는지도 모른다. 나는 풀잎 사이로 기고 날아다니는 작은 벌레들을 보면서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동화 속 세상이 바로 지금 여기에 있었다.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스티니가 알려준 선셋 명소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마을에서 걸어서 20여 분 정도 가면 ‘Ballebjerg’라는 언덕이 나온다. Nordby 마을의 서쪽 끝 절벽이다. 오늘 일몰 시간은 9시 30분. 시간이 다가오자 마을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차를 몰고 도착했다. 편한 차림에 트럭을 몰고 한 손에는 맥주를 들고서 각자 자리를 잡았다. 수평선 너머로 천천히 해가 기울었다. 물빛에 번져오는 은은한 노을을 보며 뻣뻣하게 굳었던 어깨를 느슨하게 풀었다. 가득 찬 하루가 천천히 비워지고 있었다.
*Ballebjerg(선셋명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