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13 삼쇠섬 4일차(덴마크7일차)
하늘과 바람과 흙이 위로가 되는 곳에서 나는 세상에 처음 나온 아이처럼 이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될 것 같았다.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됐다. 이번 주는 나는 밭에서, 쇠얀은 식당에서 일을 돕는다. 식당은 스티니가 주인이지만 밭에서는 킴이 대장이다. 킴은 말수가 적은 할아버지지만 유쾌하고 농담하는 걸 좋아한다. 언젠가 스티니가 말하길 킴은 ‘privacy’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했다. 그만큼 킴은 혼자 일하는 걸 좋아하고 사람들 속에 섞여 있는 걸 즐기지 않는다. 밭은 그런 그의 아주 좋은 안식처이자 그의 왕국이다. 킴은 자신의 왕국에 들어온 나를 환영했다. 그리고 손수 트랙터를 몰아 나를 태우고 구석구석 안내해주었다.
킴의 밭은 마을에서 걸어서 5분 정도 거리에 있다. 초입에 있는 밭에는 식당에서 쓰는 감자, 양파, 상추, 양상추, 콜라비, 딸기 같은 작물들을 키우고 트랙터를 타고 십 분쯤 더 들어가면 농기계를 보관하고 목재를 다루는 하우스와 돼지 농장이 나온다. 돼지 농장 너머는 깎아지른 절벽과 푸른 바다가 펼쳐진 섬의 끝이다. 맑은 날이면 삼쇠와 윌란(Jylland) 반도 사이에 있는 아주 작은 섬 ‘Tunø’가 보인다.
킴은 자랑스러운 얼굴로 하우스를 보여주며 이곳이 그의 놀이터라고 했다. 그는 밭과 하우스를 오가며 자기만의 생활을 꾸리고 있었다. 하우스 뒷마당에는 목재로 만든 이런저런 작은 소품들이 있었다. 식당의 간판이나 간단한 트레이, 테이블 같은 것은 킴이 그의 아들과 직접 만든다고 했다. 덴마크에서 그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덴마크에서는 어릴 적부터 여자들은 뜨개질을, 남자들은 목공을 실생활에서 직접으로 사용할 수 있는 수준으로 배운다. 덕분에 남자들은 간단한 목공으로 가구나 소품을 만들고 여자들은 겨울 스웨터를 직접 떠서 사용한다. 마트나 상점엘 가면 간단한 목공 도구와 실타래와 뜨개질 도구를 팔았다. 숲과 나무가 많고 춥고 서늘한 기후의 지리적 특성 위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은 생활양식이었다.
농장 구경을 마치고 돌아와 킴이 일구어 놓은 밭으로 갔다. 양파를 새로이 심는 자리였다. 킴은 콩알만한 양파를 일렬로 콕콕 흙 속으로 박아넣으며 시범을 보였다. 작업용 바지에 무릎 패드를 부착하고 무릎을 꿇고 앉았다. 양옆에 일구어 놓은 길을 따라 5cm 정도 간격으로 양파를 콕콕 찔러넣었다. 킴은 내가 금세 익숙하게 하는 걸 보고는 조금 떨어진 다른 밭으로 가서 할 일을 했다. 덕분에 나는 마치 주인이 된 것처럼 오롯이 밭을 누볐다. 누가 감시하는 것도 아닌데 신중하게 양파를 심고 허리 한 번 펴지 않고 속도를 냈다. 어느새 접힌 다리가 저리고 어깨며 등이 쑤시기 시작했다. 한참 심었는데도 여전히 끝이 안 보였다. 양동이에 덜어 온 양파가 반절이나 사라졌지만 아직 몇 포대가 더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 먼 곳에서 킴이 나를 향해 소리쳤다.
“이 소리 들리니? 우릴 위해 노래하고 있어.”
킴의 그 말이 끝나자 거짓말처럼 사위가 온통 소리로 가득 찼다. 넓고 조용한 밭, 덩그러니 조그맣게 웅크리고 있는 우리 머리 위로 작은 새들이 빙빙 돌며 지저귀고 있었다. 하늘은 그림처럼 높고 환했다.
킴은 새소리를 흉내내며 만화영화처럼 “랄랄라~”하고 노래를 부르더니 다시 웅크려 앉아 잡초를 뽑기 시작했다. 나도 다시 무릎을 꿇고 앉아 양파를 콕콕 박았다. 작은 새들은 시끄러울 만큼 맑고 우렁차게 노래했다. 어쩐지 안도감이 온몸 가득 퍼졌다. 어딜 가나 사람들로 가득 차 있던 도시를 떠나 위를 올려다보면 높은 건물 하나 없는 푸른 하늘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고 새는 내 곁을 맴돌며 노래하고 눈앞에는 푸근한 등이 웅크리고 있고 손끝에는 보슬보슬한 흙의 감촉이……. 나는 지금 이름도 생소한 섬의 북쪽 끝 마을에 와 있다. 하늘과 바람과 흙이 위로가 되는 곳에서 나는 세상에 처음 나온 아이처럼 지금 이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