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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현 Apr 09. 2020

스반홀름 축제

19.06.21 스반홀름 6일차(덴마크47일차)

함께 사는 이들을 위해 마을의 잔일을 담당하는 그분들의 표정만으로도 이 사람들이 이 일을 얼마나 즐거운 마음으로 하고 있는지 느껴졌다.




여름이 무르익어 가고 있다. 생각보다 일의 강도가 약한 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버거울 수준도 아닌데 일하는 시간이 힘에 부친다. 아마도 더위 때문인 듯했다. 잔디깎이를 시작한 지 겨우 10분 만에 온몸에 땀이 배어 나왔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은 이전에는 한 번도 밖에서 더위 속에 고된 일을 해본 적 없다는 사실이었다. 어딘가로 이동하기 위해, 누군가를 만나거나 시간을 보내기 위해 한여름을 만났을 뿐이지 더위 속에서 노동을 해본 적은 없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이상하게 견딜 힘이 났다. 누군가는 이 더위 속에서 한평생 일해왔을 테니까. 화물차 기사인 아빠는 평생 땀을 뒤집어쓰고 열기를 온몸으로 느끼며 짐을 나르고 천막을 쳤을 것이다. 아빠의 몸에는 언제부턴가 검붉게 익은 살갗이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은 채 문신처럼 남아있다. 그 모습을 그려보며 온몸을 뒤덮은 땀도 그저 그렇게 두었다. 짜증스럽지도 유난하지도 않게. 그저 땀에 젖은 몸을 느끼며 해야 할 일을 계속해서 했다.



런모어(lawn mower)라고 부르는 잔디깎기 기계. 배터리가 들어가는 전자동식으로 밑에 달린 칼날이 잔디를 깎아준다



런모어(lawn mower)라고 부르는 잔디깎기 기계는 두 번째 사용이었지만 영 익숙지 않았다. 무엇이든 잘 해내고 싶은 강박 때문에 또 무리해서 몸을 쓰며 기계를 밀었다. 길고 빼곡한 잡초 더미에 기계는 자주 걸렸고 그럴 때마다 팔에 힘을 쥐어짜서 기계를 움직였다. 요령이 없으면 없는 채로 어설프게 해나가며 익혀야 하는데 자꾸만 어설픈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다. 그렇게 겨우 한 줄을 밀었을 뿐인데 진이 빠졌다. 잠시 주위를 돌아보니 다들 멀찍이 떨어져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고 그저 자기 할 일을 하고 있다. 그 누구도 아닌 내가 자꾸 스스로를 감시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세 커피 브레이크 시간이 됐다. 오늘 아침엔 식사 대신 잠을 선택했는데 오전 일을 하며 그게 잘못된 선택이었음을 깨달았다. 별 것 아니지만 아침에 간단히 먹는 뮤슬리가 생각보다 큰 에너지를 만들어준다는 사실을 알았다. 오전 일을 잠깐 했을 뿐인데 이미 기력이 다한 것처럼 배가 고팠다. 빵 한 조각을 찾아 커피와 함께 먹었다. 꾸준하게 몸을 쓰는 일을 하며 깨닫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일하는 만큼 먹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주기적인 식사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꼈다. 고열량보다 밸런스를 맞춘 식단을 선택하고 몸을 활발히 써야 하는 점심에는 좀 더 든든하게 먹을 것. 한국에서보다 먹는 양은 훨씬 늘었는데도 거의 살이 찌지 않았다. 다른 날보다 좀 더 강도 높게 일한 날이면 정말이지 먹은 만큼 다 써먹었다는 느낌이 여실히 든다. 그리고 그런 느낌은 삶의 질을 높이는데도 톡톡한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어쩐지 내 몸에 찌꺼기가 별로 남지 않은 듯한 홀가분한 느낌이 차오른다.


직접 그린 그림들로 꾸며진 소 무대를 설치했다. 백조 두마리는 스반홀름 마을 로고.


이번 주말은 스반홀름 축제가 있는 날이라고 했다. 매년 여름이 시작될 즘이면 성대한 마을 축제를 열었다. 마을 축제라고 주민들끼리 소소하게 여는 잔치 수준이 아니었다. 유명한 밴드와 가수도 초대하고 외부 방문객들도 수백 명 가까이 축제를 즐기기 위해 온다고 했다. 빌딩그룹은 축제 준비를 위해 마을 단장과 세팅을 도맡았다. 마을 전체적으로 지저분하게 웃자란 잔디를 다듬고 본격적으로 축제 세팅에 들어갔다. 토그(Toke)를 비롯한 빌딩그룹 직원들은 무대와 여러 시설 작업을 하고 우퍼들은 각 구역에 일손이 필요한 곳을 도왔다. 쇠얀과 나는 피자리아 세팅과 키즈존 세팅을 맡았다. 직접 만든 화덕에서 피자를 구워 팔 예정이라고 했다. 마을 주민들이 손수 만든 간판을 나무에 걸고 테이블을 날랐다. 축제를 준비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마음이 붕붕 떠다녔다. 따듯한 봄볕에 땀이 온몸을 적셨지만 힘든 줄도 모르고 짐을 옮겼다. 어린이들 코스프레용 옷가지와 장신구들을 고를 때는 이미 축제를 즐기는 아이가 된 것 같았다. 


피자리아 간판 설치중인 쇠얀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를 준비한다는 것이 이토록 즐거운 일이라는 걸 새롭게 느꼈다. 각 구역에서 밝은 얼굴로 축제 준비를 하고 있는 빌딩그룹 사람들을 보자 이제야 빌딩그룹이 어떤 일을 하는 곳인지 알 수 있었다. 음식을 만드는 키친 그룹, 작물을 재배하는 베지터블 그룹, 마을을 유지하기 위해 뒤에서 필요한 모든 일을 하는 빌딩 그룹. 잔디를 다듬고 창틀을 정비하고 마을 공동 창고를 청소하고 일손이 필요한 곳에 헬퍼로 배치되는, 눈에 띄지는 않지만 이 마을이 이 모습대로 유지되기 위해 꼭 필요한 일들을 담당하는 곳이 빌딩그룹이었다. 



무대 설치 중인 빌딩그룹 사람들



빌딩 그룹이 마음에 든다는 유곤, 예지, 찬빈씨의 말처럼 나 또한 금세 이 팀이 좋아졌다. 아직 이 곳 사람들을 다 파악하진 못했지만 언제나 정중한 태도로 할 일을 알려주는 토그(Toke)와 푸근한 미소와 느릿느릿한 영어로 우리에게 말을 거는 몬스(Morgens), 두 분만으로도 이 팀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함께 사는 이들을 위해 마을의 잔일을 담당하는 그분들의 표정만으로도 이 사람들이 이 일을 얼마나 즐거운 마음으로 하고 있는지 느껴졌다. 빌딩 그룹의 일들이 점점 좋아질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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