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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현 Apr 05. 2020

베지터블 그룹(Agricultural group)

19.06.18 스반홀름 3일차(덴마크44일차)

실반지를 손가락마다 끼고 피어싱을 한 패셔너블한 청년들이 퇴약볕 아래에서 BTS의 노래를 들으며 잡초를 뽑는 모습이라니. 그 얼마나 생명력이 가득한 모습인지.





오랜만에 강도 높은 일 때문이었는지 죽은 듯이 자고 일어났는데도 몸이 회복이 안 됐다. 배관이 네 개나 지나가는 지하 방이어서 습도가 높았는지 쇠얀은 영 잠을 못 이룬 것 같았다. 유독 시간이 느리게 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겨우 3일째 날이다.



빌딩그룹 사무실로 출근하니 토그toke가 베지터블 그룹Agricultural group에서 지원 요청이 왔는데 가줄 수 있겠냐고 부탁해왔다. 삼쇠samsø에서 밭일에 적성이 맞았던 나는 흔쾌히 그러겠다고 했다. 오랜만에 밭에 나갈 생각을 하니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아직 자전거를 배정받지 못한 우리는 숲길을 십여 분쯤 걸어 밭에 다다랐다. 숲을 헤치고 나오자 한눈에 다 담기지도 않는 큰 밭이 펼쳐졌다.



밭이 넓고 다양한 작물을 한 번에 키우므로 팀 별로 각 구역마다 배정된다


베지터블 그룹의 사이먼simon이 우릴 반겨주었다. 일을 도와주러 온 우리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곤 우리가 할 일 알려주었다. 오늘의 할 일은 잡초 뽑기다. 밭일의 80프로는 언제나 잡초 뽑기다. 특히 약을 치지 않는 덴마크 유기농장에서는 정말 돌아서면 새 잡초가 자랐다. 매일이 잡초와의 전쟁이었다. 여름이 시작되고 있다. 아직 시원한 바람이 부는 넓은 밭에는 작물만큼이나 이름 모를 수많은 잡초가 쑥쑥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틈새의 작은 잡초 한 올도 남기지 않으려고.. 잡초 뽑기의 핵심은 허리를 끊어내지 않고 뿌리까지 뽑는 것이다


정신없이 잡초를 뽑고 있는데 기분은 더없이 상쾌했다. 오랜만에 만져보는 흙의 감촉도 좋고 볕도 어제처럼 마냥 뜨겁게만 느껴지진 않았다. 아무래도 기계를 다루는 일이 낯설어 몸이 잔뜩 긴장했었나보다. 줄기 사이사이 열심히 들여다보며 잡초를 뽑다가 기지개를 폈다. 삼쇠섬의 킴kim 할아버지네 밭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큰 밭이었다. 킴 할아버지네 밭에서는 음악을 들으며 한참을 하다 보면 몸은 뻐근해도 한 줄씩 깨끗하게 이발된 이랑들이 한눈에 들어왔는데. 두세 명씩 한 이랑에 붙어 몇 시간째 속도를 내고 있지만 아직 한 줄도 다 끝내지 못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밭을 둘러보며 아연해졌다. 이걸 사람 손으로 다 할 수 있는 게 맞나 싶었다. 조금 지쳐 갈 즈음 커피 브레이크를 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외부에서 일을 도우러 온 아주머니가 만들어주신 디저트. 터키쉬딜라이트를 넣어 만든 샌드


밭 가에 모여 아무렇게나 퍼질러 앉았다. 베지터블 그룹 직원들과 나와 쇠얀søren, 덴마크인 시슬sidsle, 프랑스인 피에르pierre, 독일인 프란시franzi와 닐스neils 이렇게 우퍼 6명 외에도 외부에서 일을 도와주러 온 분들이 한 데 모여 커피를 나눠마셨다. 아직 제대로 인사를 나누지 못한 베지터블 그룹의 우퍼들과도 다시 한번 인사했다. 물론 그 날 그 자리에서 이름을 다 외우진 못했지만. 아직은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한 자리에 앉아 눈을 맞추며 있는 것이 어색했다. 덴마크의 작은 마을에 온 국적의 사람들과 얼굴을 맞대고 있다는 것이 새삼 신기했다.


밭에서의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점심을 먹고 돌아온 후에도 끝없는 잡초 뽑기가 이어졌다. 햇빛이 강렬해지자 우퍼들은 옷을 훌렁훌렁 벗고 블루투스 스피커로 신나는 음악을 광광 틀어놓은 채 젊음을 마구 뿜어냈다. 반바지와 민소매 티셔츠를 입은 젊은 농부들이라니. 농사하면 떠오르는 몸빼 바지 차림의 나이 든 시골 농부의 이미지가 싹 가셨다. 


인건비가 비싼 덴마크에서는 인간 노동을 필요로 하는 직업에 매겨지는 값이 높았고 덕분에 한국에서 선호되지 않는 많은 직업이 안정적인 임금을 받는다. 청년들은 큰 고민 없이 택시기사, 농부, 요양보호사 같은 직업을 선택한다. 농업 관련 학과에 진학하는 대학생 비율이 높고 많은 대학생들이 스반홀름 같은 유기농장으로 실습을 나간다. 무엇보다 이와 같은 직업들을 향한 사회적인 편견이 없다. 젊고 건강한 청년들이 용돈을 벌기 위해 요양보호사로 일하고 평생 직업으로 선택한다. 젊은 손을 빌어 이루어지는 서비스의 질이 높은 것은 당연할 수밖에.



트랙터를 능숙하게 다루는 시슬sidsle


베지터블 그룹에 있는 소피와 시슬도 실습을 나온 학생이었다. 베지터블 그룹의 직원들은 스반홀름에서 평균 연령이 제일 낮다. 어쩌면 고강도의 체력을 요하는 직업에 젊은이들이 있는 것은 당연해 보이지만 한국 사람 눈에는 특별한 광경이다. 실반지를 손가락마다 끼고 피어싱을 한 패셔너블한 청년들이 퇴약볕 아래에서 BTS의 노래를 들으며 잡초를 뽑는 모습이라니. 그 얼마나 생명력이 가득한 모습인지.


이들의 에너지에 휩쓸려 나도 함께 힘이 났다. 푸릇푸릇 자라는 작물이 내뿜는 신선한 냄새를 맡으며 다시 박차를 가했다. 맨발의 사이먼이 저만치 앞서서 폭주 기관차 같은 힘으로 잡초를 뽑아내고 있었다. 삶의 에너지가 바로 여기 가득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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