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0. 14.
곧 다가올 조카의 100일 준비가 한창이다. 마침 조카의 100일이 올케의 생일이자 앞뒤로 동생 부부의 결혼기념일과 동생의 생일까지 있어서 11월은 큰 잔치가 예정되어 있다. 과한 허례허식을 즐기지 않는 요즘 추세에 맞추어 기념사진용으로 간소하게 100일 상을 차리고 케이크만 바꾸어 올케의 생일까지 치를 거라고 알려왔다. 무언가를 기념한다는 건 일직선으로 흘러가는 시간 속에 방점을 찍어 삶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한 일종의 주문인데 어느샌가 의미보다 기념하는 모양새가 우위가 되어 과도한 치레를 하곤 한다. 특히 동생의 결혼식을 준비하며 전쟁 같은 과정을 치르는 걸 지켜보며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행사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많은 돈이 두어 시간 만에 뚝딱 하고 사라지고 식이 끝나고 녹초가 된 가족을 보며 가능하다면 작고 소박하게, 우리에게 정말 뜻깊은 기념을 하고 싶었다. 물론 머리로는 그랬다. 사랑하는 조카를 생각하면 사실 해줄 수 있는 모든 걸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생겼다. 웬만하면 더 좋은 분유로, 다른 아기들 다 하는 놀이와 장난감을 해줄 수만 있다면 다 해주고 싶었다. 그게 부모 마음이라는 걸, 사랑하는 존재를 위해 넘치게 애쓰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게 자연스럽다는 걸 조카의 탄생 이후 분명하게 느끼고 있다.
딱히 종교를 갖고 있거나 미신적 믿음이 강하진 않지만 올케는 ‘삼신상’을 준비한다고 했다. 어떤 믿음 때문이라기보단 우리 아이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건 해주고 싶은 마음 때문일 것이다.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 엄마와 나는 그럼, 해야지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기가 몇 살까지는 삼신할머니의 소관이라고 하는 이야기가 있는 만큼 연약한 생명이 무사히 성장하는 데 부모의 노력 외에도 어떤 운, 믿음, 신비로운 작용이 필요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만큼 완전하게 여물지 않은 생명은 매 순간 위태로운 일들이 예상치 않게 일어날 수 있다. 그리고 동생과 나는 그런 순간, 부모의 역량만으로 어찌할 수 없는 순간들을 많이 만나왔고 그 순간들을 모두 무사히 넘겼다. 우리는 정말이지 삼신할머니의 덕을 톡톡히 봤다.
유난히 성장이 빨랐던 나와 동생은 돌 무렵 뒤뚱뒤뚱 잘도 뛰어다녔다고 엄마는 말했다. 세상에 새로이 나온 여느 아기들이 그렇듯 두 아기 모두 호기심이 왕성했다. 특히 아기 때부터 엉뚱하고 대범한 성격을 강하게 드러냈던 나는 동네에서 내로라하는 거지꼴로 다니기 일쑤였다. 잘 씻겨서 새 옷을 입혀 놓으면 금세 어딘가 흙탕물에 넘어져서 반쯤 더러워지고 젖은 걸레를 어깨에 턱하니 걸친 채 노란 고무신을 신고 찔뚝찔뚝 동네를 누볐다. 하도 걸레를 어깨에 걸치고 다녀서 걸레를 숨겨 놓으면 어떻게든 찾아내서 다시 척하고 매고 다녔더랬다. 엄마 화장품을 작살내고 김치통을 뒤엎는 건 일상이었다. 내 기억 속에는 없지만 엄마와 아빠의 이야기로 복원한 그때의 아기 지현이가 나는 아주 만족스럽다. 호기심과 독특한 취향과 행동력이라니. 그야말로 요즘 인재상 아닌가.
그에 비해 동생은 순하디 순하게 자랐다고 했다. 보행기에 태워놓으면 조용히 울지도 않고 혼자 꼬물꼬물 놀다가 엎드려 잠들었고 아기 지현이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바빴던 엄마는 그런 동생의 모습에 짠하고 마음이 저렸다고 했다. 나와 동생 모두 그때로부터 많은 변화를 겪고 성격도 더 복합적으로 깊어졌겠지만 성향은 여전히 남아 있다. 지금도 나는 엉뚱한 행동력으로 엄마와 아빠의 걱정을 유발하고 동생은 무던하게 차곡차곡 자기의 삶을 단단히 다져내고 있다.
그럼에도 두 아이 모두 고유의 성향과 무관하게, 부모의 관심과 보호와 무관하게 아찔한 사고들을 겪었다. 한창 무언가를 붙잡고 기어오르고 몸을 쓰던 무렵, 나와 동생 모두 추락 사고가 있었다. 큰방 창문을 열면 마당이 있던 주택에서 살던 시절, 창문 아래 쌓여 있던 물건을 밟고 올라선 내가 창문 너머로 떨어졌다. 창문 아래에는 선인장 화분들이 있었고 그 위로 떨어져 우는 나를 발견하고 깜짝 놀란 엄마가 달려와 나를 안아 들었다. 엄마는 아직도 놀랍다는 표정으로 “상처 하나 없더라고.” 하고 말했다. 선인장 가시와 시멘트 바닥으로 고꾸라진 아기는 상처 하나 없이 어디 하나 부러지거나 멍든 데 없이 말짱했다고 한다. 우리에겐 보이지 않는 어떤 손이 아기를 받아주기라도 했던 걸까? 성인 허리 위로 달린 높은 창문에서 고꾸라진 아기가 다치지 않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은 동생에게도 있었다. 순하던 아기는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TV장을 밟고 기어 올라가 뚱뚱한 브라운관 TV 위로 올라갔고 TV와 함께 떨어져 깔렸다. 느닷없는 울음소리에 뛰어온 엄마의 눈앞에는 거대한 TV 아래 아기가 깔려 버둥거리고 있었다. 조카의 몸을 보며 TV 밑에 깔린 아기를 떠올리는 건 상상만으로도 께름칙하다. 그렇게 구조된 동생 역시 조금 놀랐을 뿐 상처 하나 부러진 데 하나 없이 말끔했다. 그야말로 어떤 ‘운’이, 어떤 ‘신비로운 힘’이 작용했다고 할 수밖에. 이런 걸 두고 삼신할머니가 지켜줬다라는 말 외에 설명할 수 있는 다른 말이 있을까? 가출하는 2세 지현이를 귀신같이 포착해 부모의 품으로 돌려주었던 어묵 장사 아주머니는 삼신할머니의 현현이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심심찮게 극적으로 돌아온 아이들, 놀랍도록 무사한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부모의 노력만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이 그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왕왕 일어난다. 하나의 생명이 유지되는 데에는 인력과 더불어 ‘우주의 기운’이 정말로 필요한지도 모른다. 더욱이 스스로를 지켜낼 힘을 갖지 못한 생명에게는 더더욱. 우주의 기운은 어찌할 수 없더라도 인력은 우리 손으로 가능하다. 부모가 충분하지 않으면 형제가, 이웃이, 사회가 그렇게 할 수 있다. 아이를 학대하는 부모들, 위력으로 아기를 다루는 베이비시터들, 아이를 화풀이 대상으로 삼는 어린이집 교사들, 맨발의 아기를 무사히 돌려 보내주지 않는 사회는 우리 손으로 바꿀 수 있다. 조카의 100일날, 정성껏 차린 삼신상 앞에서 나는 염원을 가득 담아 기도할 것이다. 우리 아기를 지켜달라고. 우주의 기운이 아니라 사람이, 사회가 생명을 소중히 생각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이 세상 모든 아기를 우리 손으로 지켜낼 수 있게 해달라고 온 마음을 다해 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