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에 대하여
작년 9월부터 PT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어느새 5개월째 PT를 받고 있네요. 저는 헬스란 운동에 대해 지루하고 재미없는 운동이란 인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조금씩 변화되는 몸 상태를 관찰하고 있고, 초보다 보니 새롭게 배우는 재미를 느끼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람이 언제나 그렇듯 반복하다 보면 지루해지고 흥미를 잃지 않을까요? 저를 가르쳐주시는 트레이너분은 10년이 훨씬 넘으셨습니다. 여쭤보니 헬스 외길 인생이시더군요. 어쩌면 회사 생활보다 단조로울 수 있는 생활일 수도 있는데 어떻게 10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헬스 외길 인생을 유지하실 수 있으셨을까요?
처음 회사에 입사하면 빨리 습득하고 싶고, 잘하고 싶고, 성과를 내고 싶습니다. 모든 것이 처음이라 지루할 시간이 없죠. 배우는 것만으로 벅차고 인정의 달콤함은 자신을 더 채찍질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사람들 대부분은 반복하다 보면 지루해지고 흥미를 잃는 시기가 옵니다. 낯설던 업무들이 익숙해지고, 연차가 쌓이면서 나의 일이 매년 반복되는 사이클 안에 있다는 생각이 들면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목적을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지금 제가 그런 상태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저에게 헬스는 건강을 지키기 위한 '수단'이자 '취미'이지만 트레이너분께는 '일'일 것입니다. 익숙함과 반복성을 생각하면 회사 업무보다 헬스장이 더 심할 수도 있는데, 트레이너분께는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저 지루함을 참으면서 일한다고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1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대회 참가를 위한 운동이 즐겁다고 하셨고, 회원들을 가르칠 때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한 번 여쭤보았습니다.
"선생님, 한 가지를 10년 넘게 꾸준하게 한다는 건 정말 대단한 것 같습니다. 가끔은 지루하고 왜 해야 되나 생각들 법도 한데, 매일매일 꾸준히 이어오실 수 있었던 비법이 있으신가요?"
그런데 전혀 생각지 못했던 답변을 들었습니다.
"물론 하기 싫고, 귀찮을 때 있죠. 그치만 지루하진 않아요. 남들이 보면 맨날 똑같은 동작을 반복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어제 들던 100kg과 오늘 든 100kg의 차이가 분명히 있어요. 어제보다 오늘 동작이 더 잘 나오면 왜 더 잘될까 고민하고, 어제보다 오늘이 더 무겁게 느껴지면 오늘 내 컨디션을 방해한 건 무엇인지 고민해요. 그걸 찾으려고 하다 보면 매일 같은 동작이라고 느껴지지 않아요. 지루할 틈이 없다고 해야 되나?(웃음) 그렇게 고민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많이 흘렀네요. 하하."
먼저 섣부르게 지루할 거라고 단정 지으면서 그분의 일을 폄훼한 것 같아 죄송스럽고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저는 제게 주어진 시간의 흐름과 트레이너분께 주어진 시간의 흐름이 같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객관적인 상황이 나의 시간을 결정짓는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제가 체험하는 시간과 트레이너분이 체험하는 시간은 전혀 다른 시간입니다. 물리적으로 같은 24시간, 같은 공간의 회사 또는 헬스장이라고 하더라도 한 명의 개인이 체험하는 시간은 경험적으로도 질적으로도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시간에 대한 개념을 두 가지로 나누어 보았다고 합니다. 하나는 크로노스(Chronos)이고, 다른 하나는 카이로스(Kairos)입니다. 크로노스는 모두에게 똑같이 일정한 속도로 과거부터 미래란 방향으로 흐르는 연속한 시간을 의미합니다. 정량적이고 객관적인 시간의 개념이라 볼 수 있죠. 반면, 카이로스는 개개의 인간이 주관적으로 체험하는 상대적인 시간으로서 정성적이고 주관적인 시간의 개념이라고 정의합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특정한 개념을 신으로 많이 묘사하였습니다. 카이로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기회의 신'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기회의 신'이라고 하는 카이로스의 형상은 굉장히 특이합니다. 앞머리는 풍성하지만 뒷머리는 대머리이고, 발과 등에 큰 날개를 갖고, 손에는 저울과 칼을 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카이로스의 형상에 대해 표현한 문헌의 기록이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나의 앞머리가 무성한 이유는 사람들이 내가 누구인지 금방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이지만,
나를 발견했을 때는 쉽게 붙잡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나의 뒷머리가 대머리인 이유는 내가 지나가고 나면 다시는 나를 붙잡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며,
나의 발에 날개가 달린 이유는 최대한 빨리 사라지기 위해서다.
왼손에 저울이 있음은 일의 옳고 그름을 정확히 판단하라는 것이며,
오른손에 칼이 주어진 것은 칼날로 자르듯이 빠른 결단을 내리라는 것이다.
나의 이름은 "기회"다.
저는 왜 제게 주어진 시간이 그저 반복되는 시간이라고 단정 지었을까요? 트레이너 분께서 말씀 주신 것처럼 같은 일을 하더라도 어제와 오늘은 같지 않습니다. 분명히 조그만 차이라도 있을 수밖에 없죠. 하다못해 어제보다 능숙하게 일을 처리하는 스스로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겁니다. 다만, 크로노스의 시간에서 시간은 반복될 뿐이라 생각하고 주어진 상황이 우리의 삶을 지배할 거란 저의 인식이 있었을 뿐이죠. 제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사이 카이로스의 시간은 빠르게 사라지고 도망가고 있었습니다. 주어진 모든 시간들이 "기회"임을 알아채지 못한 채 말이죠.
가장 좋은 것은 주어진 시간 안에서 적극적으로 변화를 도모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보다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은 주어진 시간의 의미를 다시 정의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에게 체험되는 것은 크로노스의 시간이 아니라 카이로스의 시간이어야 합니다. 같은 크로노스의 시간을 산다고 하더라도 카이로스의 시간을 잡는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삶에서 벌어지는 조그마한 변화에 주목하고 그것을 자신의 삶으로 가져와야 합니다. 자신의 부족한 부분, 발전할 수 있는 부분을 생각하고, 어제보다 조금 더 능숙해진 자신을 발견한다면 매일이 조금씩 다른 체험으로 다가올 수 있으리란 확신을 하게 됩니다. 트레이너분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어제의 100kg과 오늘의 100kg은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내 삶에 있는 변화의 흔적 · 증거들을 찾아내는 게 풍성한 카이로스의 시간을 만들어내는 지혜가 아닐까 싶습니다.
'기회의 신'인 카이로스는 '행운의 신'이라고도 합니다. 카이로스는 매일매일 우리를 찾아오고 있습니다. 그 기회들을 잡는 사람들에게 카이로스는 행운이 되어주나 봅니다. 그렇기에 행운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라는 말이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나가는 중생에게 인생의 현자가 말을 건넸다고 해야 할까요...
카이로스의 시간을 일깨워준 트레이너분께 감사드리면서 30회 PT를 연장해 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