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의 효용에 대하여
저는 철학과를 나왔습니다. 요즘 많은 학교에서 철학과가 없거나 있더라도 정원이 줄어든다고 하더군요. 같은 전공자들이 줄어드는 현상은 아쉽지만 대학도 세상의 흐름을 반영할 수밖에 없으니 어쩔 수 없겠지요. 철학과를 전공하는 경우는 대게 두 경우입니다. 하나는 자기 고집이 강해서 한번 공부하겠다는 사람이거나 두 번째는 학교 이름과 전공을 트레이드하여 점수를 맞춘 현실주의적인 경우입니다. 저는 전자였습니다. 1학년을 인문계열로 입학하고 나서 알 수 없게 철학과가 뽀대 나고 아무도 쉽게 배우지 못하겠다고 생각했죠. 남들이 안 가는 데는 사실 이유가 있는데 그때는 그게 멋으로 느껴지던 나이였습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면 대학 전공은 끊임없는 꼬리표가 됩니다. 전공이 특이하면 더욱 심하죠. 철학과는 아마 특이함의 정점에 있는 전공인 것 같습니다. 신입사원 면접부터 경력직 면접, 그 외 사교모임에서도 철학 전공은 많은 이들의 궁금증을 자아냅니다. 철학과에서 무엇을 배우는지 많이들 궁금해합니다. 하지만 사실 궁금증의 원천은 과연 그걸 해서 어떻게 먹고 사는지가 궁금합니다. 그에 대한 답을 하면 철학으로 먹고 사는 건 사실상 불. 가. 능. 합니다. 위대한 철학자들을 보면 먹고사는데 지장이 없으신 분들이 많았죠. 아니면 후원을 해주는 사람이 있던가요. 나아가 채용 담당자로서는 철학과 갈 정도로 고집이 세면 조직에서 잘 적응할까라는 의문도 갖게 되죠. 매번 듣는 질문에 가끔은 귀찮아서 얼버무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그래서 철학과가 내 삶에 준 영향이 뭐지?'란 질문에 진지하게 답해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철학과에서는 무엇을 배울까요? 강의 시간에 무엇을 배웠는지는 사실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망각은 축복이라고 하는데 10년이 훌쩍 넘은 지금 기억이 나면 정상이 아니라고 스스로를 그렇게 위로해 봅니다...
그래도 무슨 과목이 있었나 떠올려보기 위해 성적증명서를 받아봤습니다. 현대독불·영미철학사, 예술철학, 언어철학, 존재론, 철학적인간학... 등 이런 과목을 제가 수강했다고 나와있네요. 네.. 그렇다고 합니다.. 유명한 철학자들의 이름이 드문드문 기억나네요. 수업에서 배운 것은 결국 그들의 사상을 외우고 시험에서 표현했던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기억에 남지 않은 것이겠죠.
그렇다고 전혀 배운 게 없는 것은 아닙니다. 철학과에서의 진정한 배움의 꽃은 니체, 하이데거, 러셀, 프로이트, 마르크스의 사상에서가 아니라 진지하게 대화하고 토론했던 교수님과 선후배님 사이에서 피어났습니다.
철학 전공을 하여 얻은 효용성에 대해 두 가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1) 타인과 존중하며 대화하는 방법
철학 전공은 크게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이 있습니다. 저는 서양철학을 전공하였습니다. 서양철학은 '스승의 등에 칼을 꽂아' 발전해 온 역사이기도 합니다. 누군가의 제자이지만 스승의 사상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며 위대한 철학자의 반열에 오릅니다. 그런 사조 때문인지는 몰라도 선후배 관계가 정말 수평적이었습니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도 권위가 부정될 수 있는데 선후배 관계라면 권위를 내세우는 것은 우습죠. 갓 입학한 신입생과의 대화에서도 선배들은 진지하게 경청하고 대화에 참여합니다. 가르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말하죠. 나아가 강의시간에도 교수님의 말씀에 한 학생이 손을 들고 다른 생각을 말하자 진심을 다해 교수님이 답하셨고 그에 대한 다른 학생의 반론이 이어져 수업시간 1시간이 끝나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권위주의적인 문화의 학창 시절을 보낸 저로서는 상당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런 게 진짜 대학 문화이고 수업인가를 생각했습니다. (물론 복수전공으로 경제학을 하면서 대학교가 원래 그런 곳이 아니란 것을 정확하게 깨달았습니다.)
(2) 나 자신의 생각에 대한 겸손함
철학은 고대부터 중세, 근대, 현대를 거치면서 세상을 지배하거나 변화시키는 영향력을 행사해 왔습니다. 이름만 들어도 유명한 철학자들의 이론과 사상에는 빈틈이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시대는 그들의 이론에 한계가 있음을 끝없이 증명해 왔습니다. 천재들의 이론도 한계를 보이는 법인데 평범한 우리는 어떨까요? 위대한 철학자들도 시대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평가를 듣고, 여러 가지 오류가 증명되는데 우리의 생각은 과연 편협함과 오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결국 철학 전공수업을 들을수록 스스로 겸손해야 한다는 점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상적인 방향은 설정하되, 항상 내가 틀릴 수 있다는 겸손함과 상황에 맞게 변할 수 있는 유연함을 갖춰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철학을 전공한 것에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저란 사람을 만드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고, 삶의 태도와 자세를 형성하는데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남들 앞에서 철학과를 나왔다고 말하는 것이 부끄러울 정도로 지식적인 측면은 부족합니다. 하지만 철학과를 나온 사람으로서! 한 가지 꼭 말하고 싶은 점이 있다면! 철학이 누군가의 소유물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철학자들의 이름은 모르더라도 우리는 각자 나름대로의 철학을 하고 있습니다. 그 생각이 멋진 말로, 논리적으로, 책으로 쓰이지 않았더라도 한 개인의 철학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나의 철학이 누군가의 소유물이 아닌 것처럼, 타인의 철학을 나의 소유로 만들려고 해서도 안됩니다. 그렇기에 존중하는 대화와 토론이 중요하고 스스로에 대한 겸손함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한 번 진지하게 나만의 생각에 잠겨보시고, 마음 맞는 사람과 토론해 보시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