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 간지러운 말하기

쑥스러움에 대하여

by 빈공간의 미학

1. 어떤 말들을 나누셨나요?

설 연휴가 끝나가는 오후 무렵입니다. 가족들과의 만남은 어떠셨나요? 굳이 가족을 만나지 않고 여행을 다녀오신 분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의례적인 전화 한 통씩은 하셨을 것 같네요. 만나서 나눈 대화 또는 전화로 나눈 대화는 어떠셨나요? 쑥스러워서 일찍 끊어버리셨나요? 아니면 보고 싶다거나 응원한다거나 하는 살짝은 쑥스러운 말 한마디씩 하셨나요?

설이나 추석 명절은 매년 돌아오고, 시대가 변하며 그저 쉬는 날 정도의 의미로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인식에서 특별함이 희미해져 가는 것처럼 명절이나 나누는 대화의 특별함도 희미해져 갑니다. 오히려 세대갈등, 젠더갈등, 고부갈등의 두려움 속에서 할 수 있는 말의 범위는 갈수록 줄어드는 것 같네요. 오늘은 명절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어차피 쑥스러운 거 명절이라는 핑계로라도 한번 해보자는 낯 간지러운 말하기에 대해 생각해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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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아버지! 좀 쑥스러워져 봅시다!

설 연휴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 아내가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보는 참 낯 간지러운 말을 잘하는 것 같아. 나는 그런 말 잘 못하는데, 언제부터 그런 말들을 잘했어?" 아내가 저에게 이런 말을 하게 된 건 제가 아버지에게 건넨 조언 때문입니다.

이번에 저의 누님이 늦은 나이지만 석사 학위를 취득했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습니다. 졸업식장에 가기로 한 아버지께 제가 물었습니다. "아빠, 이번에 누나 졸업식 때 가서 뭐라고 하실 거예요?" 무뚝뚝하고 현실적인 아버지의 대답은 골치 아팠습니다. "그래, 석사 졸업하면 앞으로 승진하고 장학사 하는데 큰 문제는 없을 거다. 도움이 될 거다."이렇게 말한다는 겁니다. 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렇게 말하지 말고, 이렇게 하세요. 'OO아, 아이 둘 키워가며 바쁜 와중에도 이렇게 석사 졸업까지 해서 수고 많았다. 아빠는 네가 너무 자랑스럽다. 멋지다 내 딸' 하면서 어깨 한번 쓰다듬어 주세요." 평소 같았으면 손사래 칠 대사였지만 아버지가 유독 주의 깊게 듣더라는 아내의 전언이 있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전혀 쑥스럽지 않을 멘트지만 아버지에게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멘트라는 걸 알기에 마음에 기대를 품게 되었습니다. 저는 누나에게 꼭 그렇게 말할 겁니다. 너무 자랑스럽고 누나 덕분에 공부할 용기를 얻었다고. 그리고 항상 그렇듯이 누나는 내 앞길을 밝혀주는 멋진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 좀 쑥스러워져 봅시다!


3. 쑥스러움을 배우기까지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아내의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 저는 꽤 낯간지러운 말을 잘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처가에 가서는 장인어른의 직장인으로서의 커리어가 너무 멋지다고 소주 한잔 받으며 직장 생활의 노하우를 여쭤보았고, 어머니가 최근에 은퇴하실 때는 엄마의 성실함이 내 인생의 가장 큰 스승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제가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라는 겁니다. 저는 경상도에서 태어나 남중, 남고를 나왔습니다. 모든 경상도 사람들을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저와 비슷한 또래 친구들은 상당히 무뚝뚝했던 기억이 나네요. 학창 시절 쑥스러운 말은 우리에게 금기와도 같았습니다. 친할수록 친근함의 표시를 욕으로 했고, 걱정되면 '괘안나'란 한마디로 모든 것을 퉁쳤죠.

변화는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자기표현이 뚜렷한 철학과 친구들은 서로를 칭찬하고 격려하는 말을 자연스럽게 주고받았습니다. "너 오늘 발표 정말 좋았어", "그 생각 진짜 멋진데?" 같은 말들이 일상적으로 오가는 모습을 보며 저는 쑥스러움에 말을 잃었지만, 조금씩 배워갔습니다.

그렇지만 결정적 계기는 대학 시절 사귄 여자친구가 "도대체 나를 좋아하는지 모르겠다"라고 말했을 때였습니다. 충격이었죠. 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다고 했지만 표현하지 않으면 모르는 법이었습니다. 어렸을 적 배웠던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는 허상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조금씩 노력했습니다. 쑥스러움을 잠깐 이겨내면 손해 볼 게 없다는 걸, 아니 오히려 삶이 편해진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말을 하고 나면 상대방의 표정이 환해지고, 관계가 부드러워지고, 오해가 풀리는 경험을 반복하면서 '낯간지러운 말하기'가 제 삶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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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쑥스러움의 정체

'쑥스럽다'는 말의 사전적 정의는 '하는 짓이나 모양이 자연스럽지 못하고 어색하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대인관계에서 쑥스러움은 조금 다른 감정을 의미합니다. 내 안의 감정이 상대에게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이 마치 '민낯'을 보이는 것처럼 느껴져 자기 노출의 어색함이 느껴지는 것이죠. 또는 내 응원이 상대에게 부담되거나 거창하게 구는 것은 아닌가 하는 배려의 마음이 깔려있기도 합니다.

생각해 보면 쑥스러움은 방어기제의 일종인 것 같습니다. '거절당하면 어떡하지?', '오버한다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진심이 통하지 않으면 어떡하지?' 하는 두려움 앞에서 우리는 쑥스러움을 방패로 삼아 한 발짝 물러섭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물러서면서 정작 중요한 말들을 하지 못하게 된다는 겁니다. 사랑한다는 말, 자랑스럽다는 말, 고맙다는 말, 응원한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채 마음속에만 머물러 있게 되는 거죠.


5. 기꺼이 쑥스러워지기

그래서 제가 내린 결론은 그겁니다. 이런 이유로 '쑥스럽다'면 기꺼이 쑥스럽길 택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그냥 낯간지럽게 한번 말해보면 어떨까요? 우리는 지금까지 '쑥스럽다'는 말로 지금 해야 할 말을 피하기 위해온 것일지도 모릅니다. 해보고 나면 별것 없는데 말이죠. 별것 없는 게 아니라 우리 삶에 큰 도움이 될지도 모릅니다. 관계에 엄청난 진전이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낯간지러운 말을 하는 데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3초의 용기면 됩니다. 입을 여는 그 순간만 넘기면 나머지는 자연스럽게 흘러갑니다. 그리고 그 3초의 용기가 때로는 10년 동안 쌓인 서먹함을 녹이고, 평생 기억에 남는 순간을 만들어냅니다.

이번 명절도 반복되는 명절이라 그냥 지나갔다면, 다음에는 쑥스러움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시간으로 만들어보시면 어떨까요? 부모님께 "사랑해요"라고 말하기는 어렵다면 "항상 건강하세요. 저는 부모님 덕분에 잘 살고 있어요"라고 말해보는 건 어떨까요? 형제자매에게 "네가 있어서 든든해"라고, 배우자에게 "당신과 함께여서 행복해"라고 말해보는 건 어떨까요?

낯간지럽습니다. 하지만 그 낯간지러움 너머에 우리가 정말 원하는 관계가 있습니다. 솔직함과 따뜻함이 오가는 관계 말이죠. 그러니 오늘, 지금 이 순간, 3초의 용기를 내보시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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