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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훈 Dec 17. 2021

오늘 밤 당신을 사랑할 거예요

E.L.O "Midnight Blue"


내가 어릴 때, 부모님은 연휴나 주말이면 나와 동생을 은색 아반떼에 태우고 전국 곳곳에 데려가곤 하셨다. 당시에는 어려서 그냥 따라간 거지만 어릴 때부터 많은 경험을 하게 해주고 싶었던 부모님의 뜻이 담긴 프로젝트였다. 교과서에 나오던 불국사, 무령왕릉은 물론 서울 전시회나 임실 치즈 마을 등등. 학습과 경험이 테마인 여행이라 할 수 있었다. 며칠 간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면 추억이 부쩍 늘어나 있었고 몸이 조금은 자란 듯했다. 그 모든 느낌은 차 안에서 천천히 나의 감수성으로 완벽하게 스며들었다. 캄캄한 밤의 긴 고속도로를 달리며 나는 점점 자라고 있다는, 복잡하면서도 충만한 감각을 느꼈고 사색에 잠기곤 했다.


카오디오에서는 부모님이 선곡한 7080 노래나 팝송이 흘러나왔는데, 나는 좌석에 몸을 기대거나 이마를 차창에 대고 바깥을 보면서 음악을 듣곤 했다. 음악은 고속도로를 달릴 때의 우우우웅하는 소리를 뚫고 퍼져 나왔고 내 사색에 좋은 지지대가 되어주기도 했다. ELO의 "Midnight Blue"라는 노래도 그중 하나였다. 그 곡을 처음 들을 때를 아직도 기억한다. 창밖으로 도시의 불빛과 그 너머로 어둑한 산이 지나가고 있었다. 앳된 선율은 내 귀에 들어와 창밖 풍경은 물론, 고속도로를 달리는 나의 상황과 곧 어우러졌다.


 "I see the lonely road that leads so far away

 저 멀리 이어지는 쓸쓸한 길이 보여요

 I see the distant lights that left behind the day"

 어둠 속에서 일렁이는 빛들이 보여요


당시 어렸던 나는 영어 가사를 전부 이해하지는 못했고 I see the ~라며 화자가 무언가를 보고 있다는 느낌만을 간직했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이 호소력 짙은 곡에 내 상황을 이입할 수 있었다. 나는 무엇을 보고 또 무엇을 멀리 보고 있는 중인가. 앞에서 운전하고 있는 아빠가 보였고 그 너머로는 캄캄한 길이 보였다. 합창단이 노래하는 듯한 아련한 후렴구는 내가 봐온 것들을 감싸주었고 앞으로 더 많은 것을 봐야하는 사실을 격려하는 듯했다. 그 느낌은 따뜻하면서도 고독했다. 어른이 되면 혼자가 되고, 나도 운전을 해야 하고, 긴 도로를 혼자 힘으로 달리게 되겠지.


여러 여행이 있었다. 가족 여행뿐만 아니라 수학여행, 대학 MT는 물론 혼자 하는 여행도 다녀오며 나는 나이를 먹어갔다. 그런데 모든 여행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묘한 고독감이 일었다는 것이다. 여행을 하면 시간의 흐름과 주위의 변화를 확실히 느낄 수 있었는데 그 느낌이 고독의 원인이었다. 시간이 꽤 흘렀구나. 많은 게 변했구나. 몇몇은 떠나갔구나. 결국 사람은 혼자구나. 그러나 그런 고독이 절망적이기만 한 건 아니었다. 나는 가슴속에서 차의 불빛처럼 일렁이는 무언가도 분명히 느끼곤 했으니까. 그건 바로 추억에 대한 애정이었다. 추억은 내 품에 가득 안겨 꺼지지 않는 빛을 발하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앞을 보면 캄캄한 도로가 끝없이 펼쳐지고 있었다. 삶은 여정이고 되돌아갈 수 없는 길과도 같지만 계속 나아가야 했다. 나는 빛을 내며 나아갔다. 그 빛에서 무게를 느꼈는데, "Midnight blue"는 그 무게를 사랑이라고 말해주는 듯하다.


 "I will love you tonight

 나는 오늘 밤 당신을 사랑할 거예요

 And I will stay by your side loving you

 사랑하는 당신 곁에 머무를 거예요

 I'm feeling midnight blue"

나는 밤의 외로움을 느끼고 있어요


곡 내내 일렁이는 전자음은 놀이공원의 불빛처럼 머릿속에서 감돌며 어릴 적의 나를 떠올리게 했다. 고속도로 위에서 밤의 외로움을 느끼고 사랑에 대한 동경을 갖던 때. 달라진 게 없구나. 지금도 캄캄한 고속도로 같은 미래를 밝히며 달려가고 있는 나는 여전히 사랑에 대한 동경을 감지하고 있었다. 예전과 같은 상황임을 확인한 나는 이 곡을 내 삶의 주제가로 채택해도 부족함이 없으리라 생각했다.


한 번씩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서 생각에 잠기면 복받쳐 오르는 게 있다. 그건 분명 사랑 때문이었다. 모든 종류의 사랑. 내가 앓고 있는 그리움에 대한 사랑, 풍경에 대한 사랑,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사랑. 사랑들은 내 에너지의 근원이었다. 밤의 외로움 속에서도 사랑만 있다면 계속 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손끝을 천천히 내 어깨선에서 가슴 쪽으로 쓸어 내려본다. 그 부위에 분명 노래 "Midnight blue"와 일치하는 감수성이, 마르지 않는 샘 같은 그 감수성이 있는 것만 같다. 나는 오늘 밤도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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