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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훈 Oct 20. 2022

겨울방학, 이불, TV 그리고 노래

천상지희-다나 "장난스런 키스"


어릴 때 TV 앞에 앉아 눈앞에 펼쳐지는 오프닝 신(scene)을 보며 함께 흘러나오는 노래를 들어서일까. 아니면 친구들과 애니메이션 캐릭터들을 모방하며 놀아서 그런 걸까. 성인이 되어 다시 듣는(보는) 애니메이션 오프닝은 유난히 더 물리적인 시간 여행을 시켜주는 것 같다. 오프닝에서의 캐릭터들 움직임을 따라 하던 내 몸이 음악에 반응해서 다시금 그들을 따라 하려는 느낌이랄까. 아련해지는 기분을 시작으로 나는 그 시절 액션을 따라 하던 때의 공간, 함께하던 친구 등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스마트폰도 없고 유튜브도 활성화되기 이전의 2000년대 초반, 당시 아이들은 애니메이션을 잔뜩 보았고 때로는 자신의 몇몇 기억을 그곳에 기대어 놓았다. 나도 그들 중 하나. 오늘 내가 할 이야기도 애니메이션에 기대어 있는 어떤 하루에 대한 이야기이다.


초등학생 시절 어느 겨울방학 때의 일이다. 아빠가 다니던 회사에서 부부 동반 야유회가 1박 2일로 열렸는데 나와 동생은 가지 않기로 했다. 대신 우리는 할머니 댁에서 이틀간 머무르기로 했고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할머니 댁에서는 TV를 제재 없이 마음껏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할머니가 해주신 맛있는 밥을 먹고 나머지 시간은 방학 숙제를 하는 둥 마는 둥 TV만 보았다.


TV 시청은 밤에도 어김없이 이어졌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안방에서 주무셨고, 나와 동생은 TV가 있는 작은방에서 이불을 끌어안고 베개를 벽에 세워 기댄 채 세상 편한 자세로 TV를 보았다. 우리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랬듯 투니버스(Tooniverse)와 챔프(Champ)라는 채널을 번갈아가며 애니메이션만 보았다. 레이브, 나루토, 케로로, 쾌걸 근육맨 2세 등.


이윽고 자정을 넘긴 새벽, 나와 동생은 이 시간까지 TV를 보는 건 흔한 일이 아니라며 마치 밤늦게 놀이공원에 몰래 들어가 기구를 타고 있는 듯 두근두근해하며 TV를 계속 보았다. 이번에 방영된 애니는 <이누야샤>였다. 2000년대 초반, 어린이들에게 많은 영향력을 끼친 애니 중 하나. 어린이들은 접은 우산을 들고 기술 이름 "바람의 상처"를 외치며 칼싸움을 하거나 화살을 쏘는 시늉을 했고, 누군가는 또 다른 기술 "풍혈"을 따라 한답시고 오른 손바닥에 검은 사인펜으로 동그라미를 그리곤 했다. 나도 그러면서 자라던 어린이이었다.


"아직까지도 그댄 내가 어리게만 보이나요~"


어느새 TV에서는 오프닝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누야샤>를 좋아한 이유를 꼽으라면 여러 개를 말할 수 있겠지만 우선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들 중 하나는 오프닝들이 좋다는 점이었다. 그날 흘러나온 오프닝 "장난스런 키스"는 특히나 더 좋아하던 오프닝이었다. 걸그룹 "천상지희"의 멤버 "다나"가 산뜻한 목소리로 노래하는 이 오프닝은 이전 오프닝들의 잔잔함이나 비장함과는 다른 느낌이어서 인상적이었다. 노래와 함께 나오는 장면은 이누야샤가 혼자 풀밭을 달리는 장면이었다. 노래가 후반부에 다다르자 이누야샤는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뛰어들었고 이윽고 단체샷이 화면에 담겼다. 당시 방영되던 스토리는 꽤나 강적들과 대치하는 상황의 연속이었는데 그 긴장감 속에 이 따뜻한 오프닝은 마치 강적들을 다 이겨내고 결국은 동료들과 함께 모험을 계속할 것임을 암시하는 듯해서 묘한 카타르시스가 있었다.


나와 동생은 즐겁게 오프닝을 감상하고 어떤 에피소드가 방영될지 기다렸다. 어떤 강적이 나올까? 그런데 이번에는 잠깐 쉬어가는 번외 편 에피소드가 방영되었다. 원래대로라면 전국 시대로 타임 슬립한 중학생 가영이가 이누야샤를 포함한 동료들과 함께 요괴들을 해치우며 나락이라는 악당을 쫓는 내용을 이어가야 하는데, 그날 방영된 건 현대로 잠깐 돌아온 가영이가 학교 축제에 참여하는 사건을 다루고 있었다. 문제는 가영이가 전국 시대의 건어물을 챙겨 왔다는 것. 그건 사실 버섯 요괴의 포자였고, 한눈판 사이 자라난 요괴들이 축제를 습격하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요괴들이 엄청 웃기면서도 귀엽게 생겼고, 뒤늦게 학교에 도착한 이누야샤가 비밀리에 요괴들과 대치하는 장면은 시트콤 같아서 긴장감보다는 발랄함이 감돌던 에피소드였다.


기존 스토리 라인에서 벗어난 이 이색적인 에피소드는 내게 몽글몽글한 감상을 남겼다. 이거 <이누야샤> 맞아? 하며 의외의 감상을 한 나와 동생은 방송을 보면서 많이 웃었고, 웃음소리는 할머니 댁의 작은방을 가득 메웠다. 다 보고 난 후 슬슬 잠이 온 우리는 이불속에서 잔뜩 하품을 했다.


'애니메이션에 학교 나오니까 학교 가고 싶다. 애들은 지금쯤 뭐 하고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 TV에서는 엔딩곡으로 "장난스런 키스"가 한 번 더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누야샤가 달리면서 동료들 품에 뛰어드는 장면도 똑같았다. 그걸 보면서 나도 겨울방학이 끝나면 다시 친구들 품으로 뛰어들 생각에 설렜다. 겨울방학의 자그마한 일탈이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지금도 "장난스런 키스"를 들으면 그때의 생각, 몽글몽글함, 할머니 댁의 이불 문양 등등이 아직 생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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