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 한쪽에 CD 케이스가 놓여있다. 케이스 안쪽 새하얀 프린팅 위로는 글자가 적혀있다. 일리닛의 <Triple I>. 내가 처음으로 산 음반이다. 게다가 그게 놓여있는 자리는 지금 플레이어에서 재생되고 있는 음반의 빈 케이스가 놓이는 곳이다. 스피커에서는 삽입된 심장처럼, 수록곡 중 하나인 "Love & Hate"가 흘러나오고 있다.
"땀의 장마를 견디는 여름 두려워 장판을 못 트는 겨울"
처량하면서도 따스하게 연주되는 피아노 선율 위로 가사를 읊는 일리닛(Illinit). 그는 자신이 놓인 처지를 시적으로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나는 입이 계속 꿈틀거린다. 한창 외우고 다닌 지 10년이 훌쩍 넘었는데도 가사들이 저절로 발음되는 사실에 놀라워 한다.이 음반은 내게 어떤 의미일까. 700장 넘도록 음반을 모은 현재, 그 시작인 이 <Triple I>가 내게 갖는 의미를 생각해본다.
2011년, 중학생일 때였다. 아웃사이더의 "주변인"을 시작으로 힙합 음악에 흠뻑 빠져있다가 그가 소속된 스나이퍼 사운드라는 곳을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나는 페이스북까지 가입해 기획사 계정을 팔로우했고, 마침 일리닛이라는 소속 래퍼가 앨범을 발표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일리닛이라고? 아웃사이더 곡들에서 몇 번 피처링했던 그 일리닛이구나. 믿고 들을 수 있는 래퍼지. 그런데 CD 발매를 하네? 저 디자인과 음악을 손으로 잡아볼 수 있다고? 나는 그때 앨범이 CD로도 판매되는 걸 처음 알았고 아빠에게 사달라고 떼를 썼다.
너무나 길게 느껴졌던 배송 시간을 지나 택배 상자가 도착했을 때 나는 보석을 들듯 두 손으로 조심스레 음반을 상자에서 꺼냈다. 포장을 뜯고 케이스를 펼치자 두툼한 부클릿과 CD가 모습을 드러냈다. 귀로 들릴 뿐만 아니라 손에 가득 쥐어지는 것. 이게 앨범이구나. 보고 쥐고 있는 것만으로도 든든해졌다. 나는 부클릿을 구경한 후 CD를 리핑해서 mp3에 음원으로 넣었다. 그리고 학원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밤의 골목에서 감상을 시작했다. 터벅터벅 걸으며 가사 하나하나를 주의 깊게 들었다. 앞으로 계속 외울 가사들이었다.
선율과 가사를 새로 접하며 나는 황홀해 했고 다음은 어떤 곡이지? 설레했다. 곡들이 바뀔 때 잠깐의 침묵이 이뤄지면 유난히 두근대고 있는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정도로 나는 창작가가 펼쳐놓는 음악이라는 위대한 공간에 매료되었다. 이윽고 "Love & Hate"라는 곡이 나왔고 나는 놀이터의 그네에 앉았다.
"힙합. 넌 때론 세상의 칼부림 속의 방패.
밤새 취해 흔들거리는 그네 같애."
피처링을 한 권을(Kwon Eul)의 운문이들릴 때 나는 놀랐다. 그네에 앉아 듣고 있는 나의 상황을 비유에 쓸 수도 있구나. 경험은 이렇게 가져오는 것이구나. 마음을 사로잡는 표현이란 이런 것이구나. 나는 온몸으로 깨달은 듯 자극받았다. 뒤에 깔린 피아노 반주는 운문의 서정성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그 소리와 표현의 조합이 얼마나 힘을 발휘하던지. 그 힘은 곡의 어두운 주제를 소화해내고 있었다. -화자를 살게 하는 힙합이 때로는 화자를 힘들게 하는 원인이기도 하다-는 주제는 화자의 솔직한 고백과 극복 의지를 담은 가사를 통해 '그럼에도 계속 힙합을 하겠다.'는 더 나아진 결론을 맞이했다
이후로도 나는 곡들을 입에 복사하려는 듯 중얼거렸다. 발음 하나 하나를 따라가며, 각각의 마디마다 내 사연을 빗대보며 치유를 받는 것 같았다. 그 현상이 내가 힙합에 빠진 이유였고 힙합은 앞으로도 세상의 칼부림을 막아줄 방패의 역할을 해줄 수 있어 보였다. 힙합에 빠진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지만 충분히 자극을 받은 나도 그런 작품을 만들어 세상에 전하고 싶어 했다. 경험에서 길어올린 시적인 문장, 뒤로는 운율이 들리는 것 같은 문장을 말이다.
다시 지금으로 돌아와, 나는 케이스에서 <Triple I> 부클릿을 꺼내 좌르륵 넘겨 본다. 가사와 일리닛의 사진들이 빼곡히 실려 있다. 마지막 페이지에는 Thanks to라 하여 주변 사람들을 향한 감사 인사가 가사만큼이나 길게 적혀 있다. 그렇다. 이것을 처음 봤을 때 나는 꿈을 가지게 되었지. 나만의 앨범(작품집)을 만들어 마지막에는 감사 인사를 전하는 꿈을. 누구에게? 나를 키워주고 여행시켜준 가족에게, 다양한 상황을 함께 해온 친구들에게, 서로를 형제처럼 여기며 창작 활동을 하던 팀 ABO에게. 그러면 그들도 기뻐해 주겠지. 내가 골목길을 다니며 랩을 외우던 건 그 마음가짐을 잊지 않기 위한 곱씹음과도 같았다.
"Yes, 나는 징징대러 나온 게 아니야. 다만 빚진 게 있어.
가족 친구 형제 다 챙기러 밤마다 깨있어."
나는 여전히 외우고 있는 "Love & Hate"의 가사를 따라 되뇐다. 이 앨범 옆에는 내 초심이 항상 있는 것 같다. CD를 처음 기다리던 설렘과 처음 받아들던 기쁨 그리고 작품집을 만들려는 꿈과 주변 사람들에게 감사를 전하고픈 마음까지 전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