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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훈 Feb 28. 2023

수채화

MC 스나이퍼 & 아웃사이더 "나의 옛날이야기"


명곡은 세월이 흘러도 종종 여러 예술가들에 의해 리메이크된다. 마치 여러 세대를 통해 구전되는 전래동화처럼 말이다. 여러 사람의 입을 거치는 바람에 각색된 버전도 여러 개 존재한다는 점 역시 다. 개개인이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재창조하느냐에 따라 결과물은 각각 다른 개성을 갖게 된다. 원곡과 비슷해질 수도 있고 아예 색다른 버전이 될 수도 있다. 누군가는 리메이크에 실망하기도 하고 좋아하기도 한다. 비교될 작품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리메이크 작업은 해당 아티스트에게 부담감을 안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표되는 것은 곡에 대한 아티스트의 사랑 때문일 것이며, 그 사랑이 있기에 후대에도 옛 곡은 전해질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옛날이야기"라는 곡도 마찬가지다. 리메이크 현상의 대표 주자라고도 볼 수 있을 정도로 이 곡은 무수한 리메이크 버전을 탄생시켰으며 그중 하나인 아이유 버전은 원곡 발매일로부터 약 30년이라는 세월을 뛰어넘어 전국적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조pd나 MC 스나이퍼 & 아웃사이더 등 래퍼들도 여러 번 리메이크할 정도로 "나의 옛날이야기"란 곡은 뛰어난 보편적 감수성을 보이기도 했다.


각각의 버전은 저마다 뛰어난 특색을 갖춘 채 완성되어 훌륭한 리메이크의 표본이 되어주었다. 어떤 곡을 골라 들어도 '굳이 리메이크를 할 필요가 있었나'라는 의문을 지울 정도로 편곡자의 의도가 담긴 이유 있는 리메이크였으며 원곡의 정신도 이어오고 있었다. 하나의 작품으로도 손색이 없었으며 현대에 원곡을 소개하는 역할을 하기에도 충분했다.


내가 처음 접한 버전은 MC 스나이퍼와 아웃사이더 버전이다. 원곡자 조덕배 분이 부른 후렴 부분을 샘플링해 피치 업 시켜 활용한 힙합 곡이다. 후렴 사이 사이로는 MC 스나이퍼, 아웃사이더, 그리고 피처링 아티스트 Room 9가 랩을 올렸으며 잔잔한 원곡에 비해 밝은 아련함이 돋보이는 버전이다.


이 버전의 독특한 의의는 하나 더 있다. 원곡의 어쿠스틱함을 살리는 게 대부분 리메이크곡의 특징인데 이 곡은 꽉 찬 모던 사운드로 빚어졌기 때문이다. 쉴 새 없이 일렁이는 건반 소리와 짝을 이루는 듯한 드럼, 뒤로 환상처럼 퍼지는 신시사이저는 이 곡이 옛날 일을 옛날 일이라고 인정하는 것 역시 아름답다고 말해주는 듯하다. 어설프게 옛 사운드와 현대적 사운드를 섞었다가는 애매해질 수도 있었는데 이 곡은 아예 현대적 사운드로 옛날을 그리워하는 모습으로 완성되었다. 그래서인지 이 버전으로 "나의 옛날이야기"를 들으면 나는 옛날 일을 옛날 일이라 인정하게 되는 것 같다.


2010년 9월. 곡이 발표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때였다. 아웃사이더의 신곡이 나왔었다고? 중학생이던 나는 뒤늦게 곡의 발표를 알고 까만 워크맨에 곡을 넣어놓고 버스를 탔다. 도착지는 부산 민주공원. 사생대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햇살 반짝이는 가을에 1학년 전교생이 교복을 입은 채 공원에 모였다. 아직 초등학생 티를 다 못 벗은 때였고 여전히 초등학교를 꽤나 그리워하고 있던 나였다. 나는 중학교에서 만난 친구들과 어울리는 와중에도 못 본 지 오래된 초등학교 친구들이 생각났다. 집합! 선생님이 우리를 불러 모았고 도화지를 건넸다. 우리는 도화지를 들고 돗자리를 깔고 앉았다. 나는 한쪽 귀에 이어폰을 꽂고 노래를 틀었다. 그날 아침에 다운로드했던 "나의 옛날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수줍어서 말 못 했나 내가 싫어 말 안 했나

지금도 난 알 수 없어요"


공원의 햇살과 싱그러운 녹색 빛의 풀잎 그리고 이마를 간지럽히던 가을바람, 학생들의 수다 소리가 어우러지며 곡의 아련함을 배가시켰다. 나는 듣자마자 워크맨을 한 손에 든 채 멍해졌다. 지금도 난 알 수 없어. 그때 초등학생 때 왜 말 못 했는지. 너희들이 좋다고. 졸업식 땐 왜 말 안 했는지. 또 보자고. 왜 그랬을까. 모르겠어. 수줍어서였을까. 이토록 그리워질 거란 걸 미처 몰라서였을까. 어느새 옛날인 초등학생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던 나는 손에 든 워크맨을 내려다보았고 중학생인 내가 입고 있는 교복까지 보였다.


"떠나간 나의 님아 떠나간 나의 사랑아

떠나간 나의 사람아 떠나간 나의 삶의 모든 것들아 안녕

우리 다시 만나는 그날이 오면 잠시 걸음을 멈춰

우리가 함께 나는 추억들을 회상하자"


후렴 이후로 들려오는 아웃사이더의 랩은 내게 있어 마치 초등학교 시절과의 이별을 인정하는 선언문 같았다. 나는 가사를 되새기면서 마음을 정리했고 눈앞의 중학교 친구들과 수다를 나누고 그림을 그리는 것에 집중했다. 도화지 위로 붓 터치가 이루어졌다. 눈앞의 새로운 친구들은 휴대폰 게임을 하거나 술래잡기를 했고 몇 명은 무리 지어 선생님 눈을 피해 담배를 피우러 갔다. 이곳이 지금 내가 있는 곳. 나는 붓으로 지금 내가 여기 있음을 확인하듯 도화지에 물감을 찍었다. 눈앞의 풀밭과 꽃을 도화지에 옮겨 나갔고 뒤편에는 내 이름을 기재했다.


며칠 후 교실에서 선생님이 내 이름을 불러 앞에 세우더니 사생대회 대상 수상자라며 상을 주셨다. 그건 유난히 지난 시절을 못 벗어나던 내가 드디어 진짜 중학생이 되었음을 인정해 주는 특별상 같았다. 친구들이 박수를 쳐주었다. 상을 받은 나는 그들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 그러나 그것도 벌써 옛날이야기다. 나는 이 이야기의 원작자지만 지금으로서는 이 글로 리메이크를 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원작의 본질을 유지하되 나의 견해를 덧붙여 쓰는 글. 그렇다면 이 리메이크는 어떻게 마무리 지을까. 그날 그린 수채화가 바람에 펄럭이다 민주공원 그 장소에 툭 떨어지는 장면으로 마무리해야겠다. 그리고 "나의 옛날이야기(MC스나이퍼&아웃사이더 버전)"의 끝 가사가 흘러나온다.


"아직도 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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