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의 반감기
<왕좌의 게임>을 보내버리고 명성을 일부 잃어버린 HBO가 칼을 갈았습니다. 후속작도, 정식 시리즈도 아닌 5부작 미니시리즈로 전 세계를 강타했죠. <무서운 영화> 시리즈와 <행오버> 속편 등 영 심심한 코미디 시리즈들의 각본을 써 오던 크레이그 메이진이 총괄을 맡았는데, 이 모험이 이런 엄청난 결과를 내놓을 줄 누가 알았을까 싶습니다.
<체르노빌>은 전 인류의 상식이 된 바로 그 사건을 중심 소재로 두고 있습니다. 후속 조치를 위해 파견된 과학자, 현장에 투입된 소방관의 아내, 사고의 직접적인 책임자로 보아도 무방한 관련자까지, 비교적 호흡이 느린 드라마 시리즈만이 취할 수 있는 시점으로 여러 인물들의 여러 이야기를 조명하죠. 자레드 해리스, 스텔란 스카스가드, 에밀리 왓슨, 배리 케오건은 물론 HBO 작품들의 단골 배우들도 대거 투입되었습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체르노빌 사고를 다룬다고 했을 때 취할 수 있는 가장 편리한 접근엔 무엇이 있을까요. 기본적으로는 재난 장르로 분류되겠고, 재난 하면 신파와 휴머니즘이 목록의 맨 위에 있습니다. 인간의 노력으로는 어떤 대처도 무의미한 재해 앞에 선 우리의 주인공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많지 않습니다. 평소에 소홀했던 모든 것에 마지막 눈길을 보내거나, 와중에도 어떻게든 살아 보겠다며 몸부림을 쳐야 합니다.
지금껏 대부분의 동종 작품들은 비슷한 노선을 택했습니다. 기구하디 기구한 사연을 안은 주인공을 통해 감정의 골을 극한으로 밀어냅니다. 한두 명의 사람이나 세력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합니다. 재난의 묘사는 기술력의 자랑으로 너무나 쉽게 대체되고, 한껏 쳐올린 눈물이나 분노가 영화의 평가를 대신합니다. 사람의 그런 면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재난이니 너무나 무섭지 않느냐고 되묻습니다.
<체르노빌>은 그러지 않기로, 그 곳을 출발점이나 도착점으로 잡지 않기로 결정하면서 순식간에 독보적인 자리를 가져갑니다. 감정은 양념에 불과합니다. 남편의 몰골에 눈물을 흘리는 아내도 있고, 죽어도 내 탓은 아니라며 법정에서조차 마지막 발악을 이어가는 책임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극의 중심엔 그보다 훨씬 거대하고 원론적인 물음표가 있습니다. 거짓의 가치에 대한 물음이죠.
뉴스에서 이런저런 사고들이 보도된 며칠 후에 따라붙는 후속 기사에선 '예고된 인재'라는 표현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체르노빌>은 그 곳에 주목합니다. 모두가 알지만 항상 외면해 인명의 손실까지 이어지고 마는 그 근원에 주목하죠. 언젠가 어떻게든 드러날 수밖에 없는 진실을 가리려 폭발할 재난의 크기만 불리고 있는 거짓입니다.
<체르노빌>의 감상과 여파가 시공간을 불문하는 이유입니다. 시리즈가 전달하는 메시지를 이해하기 위해 폭발한 원자력 발전소나 수만 년이 지나도 나아지지 않을 폐허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어느 곳의 누구에게나 작은 거짓에서 비롯된 크고 작은 상처는 있기 마련입니다. 돌이킬 수 없어진 이 커다란 흉터가 생길 줄 알았다면 하지 않았을 거짓말이 아니냐고 묻습니다. 체르노빌 사고는 이를 전달한 가장 효과적인 소재였을 뿐입니다.
덮어 놓고 묻지 않기 너무도 편한 체제와 사상 하에서 진실과 광명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그 존재만으로 극에 생명력을 부여합니다. 레가소프와 셰르비나, 호뮤크를 필두로 한 주인공들의 행적도 마찬가지구요. 모두가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 때, 그저 옳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옮기는 발걸음엔 '지금'을 바꿀 힘이 있죠. 매 초 방사능만큼이나 스산한 강렬함을 뿜어내는 <체르노빌>의 동력은 그 곳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