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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킴지 Oct 30. 2019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 리뷰

부품 교체의 마지막 한계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

(Terminator: Dark Fate)

★★★


 터미네이터가 돌아왔습니다. 때가 되면 미래에서 한 대씩 보내는 진짜 터미네이터들처럼, 속편부터 리부트까지 벌써 안 해 본 것이 없는 시리즈가 되었죠. 지금도 명작 대접 받는 2편 이후 어딘가 나사 하나 빠진 듯했던 3편 <라이즈 오브 더 머신>, 크리스찬 베일이 주연을 맡았던 <미래전쟁의 시작>, 에밀리아 클라크를 내세운 <제니시스>까지 많이도 나왔습니다. 최대 수혜자는 6편 모두 얼굴을 비춘 아놀드 슈왈제네거가 되겠죠. 



 아빠, 남동생과 함께 공장에서 일하며 평범한 삶을 살고 있는 대니.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의 모습을 한 괴한이 나타나 자신을 죽이려 들고, 현장에 나타난 또 한 명의 낯선 사람은 괴한과 맞서 싸웁니다. 자신을 그레이스라 소개한 그녀는 대니가 인류의 새로운 희망이고, 괴한은 대니를 제거하기 위해 자신처럼 미래에서 온 터미네이터라고 이야기하죠. 도무지 죽지 않는 기계의 습격은 계속되고, 정신없이 도망치던 그들 앞에 사라 코너가 나타납니다.


 <터미네이터 2>의 제임스 카메론은 어느새 10년째 <아바타> 시리즈만을 바라보고 있지만, 아직 터미네이터 시리즈를 향한 사랑을 놓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계속되는 속편들의 반복되는 실패를 차마 더 볼 자신이 없었는지, <데드풀>의 팀 밀러 감독과 원년 멤버 린다 해밀턴을 데리고 돌아왔죠. 사실상 이번 <다크 페이트>가 진짜이자 정통 3편이라고 보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사라 코너와 존 코너의 활약 덕에 스카이넷도 사이버다인도 사라졌지만, 언제나 그렇듯 인류는 같은 실수를 반복합니다.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엔 또 한 번 기계 문명이 비상했고, 멸종 위기를 맞은 인류에겐 또 한 명의 구도자가 나타났습니다. 인류의 말살을 계획한 인공지능은 구도자의 출현을 막기 위해 과거로 터미네이터를 보냈고, 그를 저지하기 위해 얼마 남지 않은 인류 역시 최고의 전사를 내세웠습니다.


 시간 여행과 코너 가문, 구도자와 무적의 터미네이터. 사실상 동어 반복이라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지금까지의 속편들은 그 반복되는 구조를 취하면서도 발전한 기술력 덕에 볼거리를 자랑할 수 있었고, 자기만의 각색 내지는 반전을 한두 개씩 얹어 팬들의 목마름에 대비했죠. 하지만 터미네이터들이 으레 그렇듯, 살의 크기와 모양새를 아무리 바꾸어도 결국 중요한 것은 뼈대입니다. 


 이제 그 뼈대는 우리고 우려서 육수에 골수까지 쪽쪽 뽑혔습니다. 쏘고 분해하고 쪼개도 언제 다쳤냐는 듯 재생해 버리는 액체 괴물(?)의 충격은 로버트 패트릭의 T-1000에서 시작되어 끝이 나야 했습니다. 기술력의 발전으로 더 무섭고 대단한 무기를 들고 와서는 그걸로도 죽지 않는다고 해 봤자 결국은 똑같은 무적이자 불사의 괴물일 뿐이죠. '최초'는 어떤 방법으로도 대신할 수 없습니다.



 가브리엘 루나의 Rev-9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이고 또 죽여도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살아나니, 어느 시점부터는 긴장부터 생기지 않습니다. 대충 이 상황만 무마하고 도망치면 또 살아나서 징글맞게 쫓아오는 장면만이 반복됩니다. 그러더니 러닝타임이 다 됐다 싶으면 사실 숨겨 놓은 비장의 대책 내지는 무기가 있었고, 이걸 쓰면 재생이 불가능하게 죽는다고 주장하며 현실로 옮기는 식이죠.


 달리 말해, 설정이 설정을 낳는 통에 영화가 오로지 본인 편한 대로 나아갑니다. 어떤 것도 설명되지 않습니다. 왜 하필 과거의 이 시점을 선택해서 터미네이터를 보냈는지, 왜 그렇게 강한 터미네이터가 딱 한 대만 왔는지, 왜 처음부터 정보를 모두 공개해 적극적인 협조를 구하지 않았는지 알 길이 없죠.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만 들려주고 보여주고 싶은 장면만 보여주며 철저히 본인 위주의 전진을 택합니다.



 이처럼 각본과 전개는 B급 영화들의 스타일에 가깝습니다만, 원년 멤버들의 귀환과 존재감은 무시할 수 없기도 합니다. 2019년의 프레임에 함께 서 있는 아놀드 슈왈제네거와 린다 해밀턴의 모습만으로 그 이상의 팬서비스가 없죠. 거기에 놀라운 수준의 CG로 재현해낸 그 때 그 시절 사람들의 모습, 대사와 장면 연출 등 원조들과 함께한 향수와 추억의 힘은 역시 무시할 수 없습니다.


 새롭게 합류한 그레이스 역의 맥켄지 데이비스는 신체조건만으로 강화 인간 설정을 만족하는 것 같고(!), Rev-9 역의 가브리엘 루나는 일상 사진의 웃는 얼굴과 영화 속 살인 기계의 모습이 도무지 매치가 되지 않았죠. 대니 역의 나탈리아 레예스는 영화 중반까지 이사벨라 모너라고 반쯤 확신하고 있었던 터라 꽤 놀랐더랬습니다. 


 액션의 8할은 가브리엘 루나의, Rev-9의 성능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엄청난 속도와 힘을 기반으로 끊임없는 재생과 분리 등 인간 대 인간으로는 불가능한 연출을 책임지죠. 다른 요소들과 마찬가지로 반복으로 단물을 꽤 빨리 빼먹긴 하지만, 초반 임팩트는 확실히 책임지고 있기도 합니다. 덕분에 후반부에 펼쳐지는 구 터미네이터와 신 터미네이터의 대결도 자연히 기대하게 되구요.



 <미래전쟁의 시작>이나 <제니시스>보다는 나은 결과물이지만, 박수치며 보내줄 수 있는 마지노선에 아슬아슬하게 걸립니다. 이마저도 원년 멤버들의 퇴장이라는 의의가 없었다면 도달할 수 없었을지 모릅니다. 여러 영화들을 거치며 할 수 있는 각색과 연출은 진즉 동이 났습니다. 시대를 대표하는 영화들은 그 때 그 시절에 머물러 있기에 명작으로 남는다는 사실도 이제 인정할 때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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