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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킴지 Nov 12. 2019

<아이리시맨> 리뷰

자국마다 자욱한 기품


<아이리시맨>

(The Irishman)

★★★★


 마틴 스콜세지 감독에 로버트 드 니로, 조 페시, 알 파치노, 하비 케이텔이 다시 뭉쳤습니다. 그 때 그 시절 <대부>쯤 이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았던 조합이죠. 이 수식과는 왜인지 어울리지 않게도 11월 말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 예정이며, 무려 3시간 29분에 달하는 러닝타임에도 어제 시사회는 쉬는 시간 없이 진행되었습니다. 간만에 본의 아니게 수련의 시간을 가졌네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양로원, 휠체어를 탄 한 노인이 입을 엽니다. 그는 과거 마피아 조직 간 킬러로 일했던 프랭크 시런이죠. 식당에 고기를 납품하던 트럭 운전수였던 프랭크는 우연한 기회로 지역 유지이자 권력자 중의 권력자인 러셀과 안면을 트게 됩니다. 러셀은 대의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개의치 않을 프랭크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그렇게 프랭크의 새롭고도 파란만장한 삶이 시작되죠.


 최근 마블과 디즈니가 지배하는 극장가에 더 이상 '시네마'는 없다는 스콜세지의 발언이 뜨거운 감자가 되었습니다. 이에 동조 혹은 반대하는 영화인들과 팬들의 설전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죠. 상대적으로 상업성도 떨어지는 장르에 무려 1억 6천만 달러를 들여 209분으로 만들었으니, 제작사와 마찰을 빚으며 생각이 많았을 겁니다. 상영이나 제작 단계의 효율성보다는 영화 그 자체를 중시했던 과거가 그리웠던 모양이죠.



 다행히도 넷플릭스 덕에 완전한 자유를 부여받은 스콜세지는 <아이리시맨>을 정말 만들고 싶은 대로 만들었습니다. 액션이라고 해 봐야 권총 몇 방 쏘고 주차된 차 몇 대 터뜨리는 것이 전부지만, 그 길고 긴 러닝타임 내내 배우들의 얼굴을 젊게 만드는 CG로 막대한 제작비를 사용했죠. 스콜세지의 창작욕도 이해가 되고, 허가를 내주지 않은 제작사들의 입장도 이해가 되는 지점입니다.


 예상된 대로 <아이리시맨>은 긴 러닝타임을 순전히 배우들의 힘으로 꽉 채우는 영화입니다. 로버트 드 니로와 조 페시, 알 파치노 등을 중심에 배치하고는 조연과 카메오 사이의 배우들을 촘촘히 배열해 폭발력을 키웠죠. 감정의 격앙 없이도, 양복 빼입고 몇 마디 없는 대사만으로 프레임을 휘어잡는 노장과 대가들의 오케스트라를 감상할 수 있습니다. 



 영화는 미국 역사상 손꼽히는 노조 위원장이었던 지미 호파 실종 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이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의 샤론 테이트 사건처럼 하나의 재료에 불과합니다. 정확히는 프랭크 시런, 러셀 버팔리노, 안소니 프로벤자노 등 지미 호파만큼이나 중요하게 묘사되는 인물들이 벌이는 크고 작은 대화와 사건들을 일대기처럼 따라가는 구성이죠(기억해야 할 이름과 얼굴이 굉장히 많습니다).


 특이하게도 영화는 이 과정에서 인물과 사건 어디에도 집중하지 않습니다. 분명 프랭크 시런을 화자로 두어 그의 목소리와 시선에서 사건을 전개하지만, 정작 중요한 사건들에서 그는 철저한 관찰자이자 중개인으로 남아 있습니다. 주인공의 성장 혹은 변화, 격동하는 역사 중 딱히 어느 것도 강조하지 않습니다. 쉽게 비유하자면 전자는 <범죄와의 전쟁>이, 후자는 <국제시장>이 선택한 방식이죠.



 <아이리시맨>은 인물을 통해 사건을 이야기합니다. 사람을 통해 시대를 이야기하죠. 얼굴은커녕 이름만 튀어나와도 모두가 벌벌 떨었던 이름들은 이제 백과사전을 뒤져도 나올까말까합니다. 한 사람이 자신의 일생을 바쳐 지켰던 무언가는 어느새 자신도 무엇인지 말하지 못할, 말 그대로의 '무언가'가 되었습니다. 잔뜩 무게잡은 사람들의 첫 등장 씬마다 사망 정보를 친절하게 기입한 감독의 의도엔 이 무상함이 듬뿍 담겨 있죠.


 이런 방향성을 처음부터 연출로 티내지는 않습니다. 그들만의 세상에서 벌어지는 그들만의 이야기를 나열하듯 보여주죠. 이런 장소에서 총을 몰래 쏴야 할 땐 무슨 권총을 몇 자루 챙겨야 한다느니, 실없는 팁까지 덧붙이며 순간의 흥미에 충실합니다. 하지만 그 여정이 쌓이고 쌓여 넘을 수 없는 세월의 벽을 마주치고, 그 땐 미처 몰랐고 알 생각도 없었던 모든 것들이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자리를 찾아갑니다.



 3시간 반 중 의외로 낭비하는 시간은 없습니다. 롱테이크로 야심을 드러내거나 사족으로 관객들을 괴롭히지도 않죠. 그저 그만큼 하고 싶고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방대했을 뿐입니다. 멀고 멀었던 마지막 순간마저도 아쉬운 데엔 정말 마지막일 지도 모르는 이번 조합의 무게감도 큰 역할을 했을 겁니다. 2018년 <로마>에 이어 넷플릭스가 또 한 번 전통과 규율을 상대로 한 건 해낼 수 있을지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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