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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킴지 Nov 24. 2019

<나이브스 아웃> 리뷰

첨단의 고풍


<나이브스 아웃>

(Knives Out)

★★★★


 <블룸 형제 사기단>, <루퍼>를 넘어 2017년 <스타 워즈: 라스트 제다이> 덕에 평생 누릴 관심을 한몸에 받았던 라이언 존슨 감독이 돌아왔습니다. 다니엘 크레이그, 크리스토퍼 플러머, 크리스 에반스, 제이미 리 커티스, 마이클 섀넌, 아나 디 아르마스, 토니 콜레트, 라키스 스탠필드, 캐서린 랭포드, 제이든 마르텔, 프랭크 오즈 등 이 배우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 <나이브스 아웃>이죠. 



 어느 날 불후의 명작들을 수도 없이 써내며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로 이름을 떨친 할란 트롬비가 자신의 방에서 숨진 채 발견됩니다. 간만에 열린 가족 모임 다음날 벌어진 일이라 경찰들은 만일을 대비하려 수사를 시작하고, 이 시대 마지막 사립탐정이라 불리는 브누아 블랑도 현장에 함께하죠. 누구도 용의선상에서 제외할 수 없지만 타살인지조차 불분명한 상황, 블랑은 끝이 없는 미스터리와 물음표를 해결하려 발걸음을 옮깁니다.


 액션이나 미스터리 등 기본적인 장르 분류에서 가지를 하나 더 치면 '파운드 푸티지(Found Footage)'니 '버디 캅(Buddy Cop)'이니 하는 외래어들이 튀어나옵니다. 그 중 하나로 사건을 먼저 던져둔 뒤 범인의 정체를 추적하는 추리물 장르를 '후더닛(Whodunnit)'이라고 하죠. 말 그대로 '누가 저질렀는지' 밝히는 내용입니다. 이번 <나이브스 아웃>은 그의 훌륭한 예시가 되겠구요.



 기본적인 뼈대는 아가사 크리스티 소설과 비슷합니다. 각자의 사연을 숨긴 수많은 등장인물을 헤치고 우스꽝스러운 이름/억양/행동이 특징인 명탐정이 나타나죠. 사람이 많은 만큼 대사도 많고, 제 3자인 관객들이 능동적으로 기억해야 할 것들도 많습니다. 프레임에서 조금이라도 눈에 튀거나, 아주 잠깐이라도 시선을 잡아끄는 모든 것들은 단서이자 복선이 되어 관객들 모두를 탐정으로 만들죠.


 이 쪽 영화들의 관건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일단은 당연히 기본적인 이야기가 재미있어야 하겠죠. 범인의 정체와 사건의 전말 자체가 흥미로워야 합니다. 누가 어떤 동기를 가지고 어떻게 사건을 저질렀는지, 그 구조부터 잘 다져놓아야 끌고 가는 과정과 모든 것이 드러난 뒤의 결과를 흥미롭게 받아들일 수 있죠. 재료 중 어느 하나라도 말이 안 된다면 톱니가 돌아갈 턱이 없습니다.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적절한 타이밍에 적절한 양의 단서를 흘리는 것이죠. 극중 사건을 해결하려는 탐정에게 흘리는 것일 수도, 이를 바라보는 관객들에게 흘리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지금 보여주는 단서가 진짜일 수도 있지만, 놀랍게도 가짜일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균형추 사이에서 완급을 조절하는 손은 그 상황을 비추는 카메라와 그 뒤에 있는 감독이죠.


 대부분의 접근 방식들은 한 영화가 써먹은 뒤엔 다른 영화가 그대로 따라하기가 어렵습니다. 시작하자마자 죽은 사람이 범인이라거나 알고 보니 탐정 본인이 범인이라는 식의 충격적인 전개는 그 작품의 정체성이 되는 경우가 많죠. 때문에 새로운 작품들은 항상 자신만의 무언가를 찾아야 하며, 갈수록 기억에 남는 추리물이 뜸해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을 고려했을 때 <나이브스 아웃>의 성과는 놀라운 수준입니다. 지금까지 제작되었던 어느 추리물과도 다른, 본인만의 분명한 매력점을 갖고 있는 각본이자 영화죠. 21세기의 고풍스러운 저택이라는 무대부터가 그렇습니다. 고전 추리물의 뼈대를 취하는 것 같으면서도 현대의 기술과 설정들을 마음대로 가져올 수 있죠. 셜록 홈즈나 에르큘 포와로가 녹음기나 지문 감식, CCTV를 활용하는 격입니다.


 흥미롭게도 이와 같은 신구의 조화는 라이언 존슨이 <라스트 제다이>에서도 선보인 접근법입니다. 전통적인 것을 뼈대 삼아 현대의 관객들도 거부감 없이, 이렇다할 진입 장벽 없이 받아들일 수 있게끔 하는 방식이죠. <라스트 제다이>는 <스타 워즈>라는 프랜차이즈의 정통성과 지지층을 과소평가한 탓에 뜨거운 감자가 되었지만, 고전 추리물에 도전한 <나이브스 아웃>은 이 덕에 꽤나 특이한 개성을 확보합니다.



 <나이브스 아웃>은 대담하게도 범인의 정체를 밝히면서 출발합니다. 하지만 기승전결은 범인이 분명히 나와 있는데도 시종일관 어딘가 해결할 것이 남아 있는 찝찝함을 안고 있죠. 영화와 탐정 브누아 블랑은 범인의 정체나 명확한 동기보다는 바로 그 물음표를 쫓아갑니다. 분명 모든 것이 완벽하게 설명되는 것처럼 보임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하나의 빈 퍼즐 조각은 많은 것을 바꾸게 되죠.


 영화는 이런저런 단서들을 꺼내놓으며 탐정 브누아 블랑과 제 3자인 관객들을 동일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관객들은 블랑이 무언가 혼자만 알고 있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영화는 과거 회상이나 다른 상황 등 블랑이 아닌 관객들만 볼 수 있는 장면들을 끊임없이 제시하며 블랑과 관객의 정보 간극을 메우죠. 덕분에 관객들은 블랑의 입장에서도 자신만의 추리를 펼칠 수 있고, 영화가 꺼내놓는 진실들의 힘도 함께 커집니다.


 여러모로 굉장히 영리한 영화입니다. 배우들의 면면을 고려하면 특별출연 급에 그치는 일부 이름들이 못내 아쉽기도 하고, 받아들이기에 따라 대화 위주의 진행이 지루하게 느껴질 여지도 있습니다. 하지만 구성 내지는 장르의 태생적이고 불가피한 한계일 뿐, 영화는 가진 것에 적절한 유머까지 더해 최대한의 흥미를 이끌어내죠. <레이어 케이크>, <로건 럭키>에 이어 다니엘 크레이그는 다시 한 번 단체극에서도 의외의 존재감을 증명해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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